아들이 떠나보낸 장난감에 아빠는 ‘진심’ [ESC]

신승근 기자 2024. 3. 23.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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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짠내 수집일지 : 레고
2006년 출시된 레고 ‘배트맨 7784 배트모빌’(앞)과 2007년에 나온 슈퍼카 ‘페라리 599 지티비 피오라노’. 엔진 내부까지 섬세하게 브릭으로 구현했다.

옥스포드, 타이코 슈퍼블록, 반바오, 메가블록, 카다, 마이브릭…. 수많은 플라스틱 결합 브릭(brick·장난감용 벽돌) 완구 제조사가 성업 중이다. 그중에서 레고는 완구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1958년 레고가 특허 출원한 가로 16㎜×세로 32㎜×높이 9.6㎜ 크기의 직사각형 ‘2×4브릭 튜브’는 9억5010만3765가지 형태의 결합이 가능하다. 제품 단종과 관계없이 그 뒤 출시한 모든 브릭과 결합할 수 있어 세대를 초월해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도구로 평가받는다.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앤디 워홀의 ‘매릴린 먼로’ 등의 명화를 레고 브릭으로 구현한 너선 사와야 등 레고사 공인 예술가가 등장하고, 승차 가능한 슈퍼카 부가티 시론도 레고 브릭으로 재현됐다.

경제적 부담에 중국산 ‘레진’도

덴마크 빌룬의 목제공장 사장 올레 키르크 크리스티얀센은 1934년 ‘잘 논다’(Leg Godt)는 뜻을 담은 레고를 설립했다. 초기엔 의자·스툴 등 목가구를 만들고 남은 자투리 목재로 ‘야옹야옹 고양이’, ‘꽥꽥 오리’ 등 작은 장난감을 만들어 판매했다. 나치가 덴마크를 점령해 목재 조달이 어려워지고, 화재로 공장까지 불타면서 레고는 1949년 플라스틱 소재로 눈을 돌렸다. 영국산 플라스틱 사출성형기를 사들여 ‘금붕어 모양 딸랑이’를 만들어 팔던 레고는 1949년 몬드리안의 추상화에서 영감을 얻어 빨강·노랑·검정 직사각형 결합 브릭을 출시했다. 처음엔 결합력이 약해 시장에서 주목받지 못했지만 브릭 뒷면에 파이프 모양의 원형 기둥을 추가한 ‘블록 튜브’를 1958년 특허 출원하면서 날개를 달았다.

레고는 ‘2×4브릭 튜브’를 기본으로 다양한 크기와 모양, 두께의 브릭을 지난 76년 동안 출시했다. 1978년 원통형 얼굴과 원형 고리 손이 특징인 미니 피규어를 시작으로 페라리·포드 등 슈퍼카부터 덤프트럭·크레인 등을 선보인 레고 테크닉(1980년대), 비디오 게임에 대응해 컴퓨터 프로그램과 연결한 레고 마인스톰(1990년대), 원통형 얼굴을 다양한 모습으로 바꾼 레고 바이오니클(2000년대)로 진화를 거듭했다. 또 스타워즈(1999년), 해리 포터(2001년), 닌자고(2011년) 시리즈를 내놓으면서 어린이는 물론 공학도, 프로그래머, 수집가까지 열광하는 결합 브릭 세계를 구축했다.

내 인생 첫 레고는 첫째인 딸이 4살 때인 2005년이다. 창의력 발달을 기대하며 당시 출시를 시작한 레고 시티 시리즈를 몇개 사줬다. 딸은 소방차·헬리콥터·주택 등으로 구성된 레고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바비 인형으로 갈아탔다. 주인을 잃은 브릭에 내가 심취했다. 다양한 건축물을 만드는 데 재미를 붙이고, 1천 조각이 넘는 성인용 레고까지 사들이기 시작했다.

둘째인 아들이 유치원에 간 2010년부터 레고 수집에 불이 붙었다. 아들은 어린이날과 생일 등 기념할 만한 날엔 레고를 요구했다. 특히 2011년에 출시한 닌자고 시리즈에 몰두했고, 스타워즈와 슈퍼카로 영역을 확장했다. 대다수 부모가 그러하듯 브릭을 활용해 상상을 현실로 만들면서 도형과 공간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수학적 감각이 발달할 것이라 은근히 기대하며 경제적 부담을 감수했다. 하지만 헛된 바람이다. 설명서에 따라 일단 조립하면 흥미를 잃는다. 분해와 결합의 반복을 통한 창의력 향상보다 애니메이션 개봉에 맞춰 새로 출시한 새 제품에 눈을 돌렸다. 나는 저렴한 레고를 찾아 동대문 완구거리 도매상을 헤집고 다녔다. 부담을 덜기 위해 중국제 브릭인 ‘레진’을 사는 일도 많았다. 정품 레고와 색상·크기·브릭 숫자까지 일치했는데 가격은 절반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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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천개 넘는 브릭 결정체…장식 효과까지

레진의 ‘스타워즈 밀레니엄 팰컨’(왼쪽)과 ‘카일로렌 커맨드 셔틀’. 레진은 레고와 부품·색상이 같고 호환도 되지만 가격은 저렴하다.

그렇게 지난 20년 동안 사들이고 때로는 지인들에게 얻은 시티, 캐슬, 북극 탐험, 닌자고, 스타워즈 등의 레고 제품이 100여개에 이른다. 물론 오랜 세월 온전히 남은 건 몇개 안 된다. 이사를 하거나 재조립 과정에서 브릭 몇개를 분실하면 출시 당시 모습을 갖출 수 없고, 결국 보관상 편의를 위해 분리한 낱개 브릭을 크기와 종류별로 상자에 보관했다. 크기가 작아 보관이 쉽고 수집 가치도 높은 미니 피규어는 꼼꼼하게 모았다. 닌자고의 카이, 콜, 쟌, 악당 제왕 가마돈은 물론 스타워즈의 요다, 한 솔로까지 망라했다. 하지만 애써 모은 피규어도 사라졌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은 최신형 휴대전화 구매를 위해 ‘추억의 레고’를 번개장터에 팔아치웠다. 호통을 쳐봤지만 부질없었다. “그러면 새 폰을 사 주시든지….”라는 말대꾸에 할 말을 잃었다.

분해와 분실을 반복하면서도 ‘페라리 599 지티비(GTB) 피오라노’와 ‘배트맨 7784 배트모빌’은 10여년째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레진 제품인 ‘스타워즈 밀레니엄 팰컨’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1천개가 넘는 브릭을 정교하게 결합한 완성품은 수집 가치는 물론 장식 효과도 뛰어나기 때문이다. 슈퍼카 제조업체 페라리가 2006년 ‘페라리 599 지티비(GTB) 피오라노’를 출시했고, 2007년 레고는 같은 브릭 제품을 내놓았다. 1327개의 브릭으로 구성한 부품을 조립하는 건 고되지만 완성 뒤 만족감도 크다. 엔진, 조향 모듈, 트렁크, 백미러, 문, 바퀴까지 실물을 1:10 비율로 구현했고, 내부 구조가 보이도록 차체 외부를 가는 막대로 만들어 곡선미가 한층 도드라진다. 앞뒤로 움직이면 브이(V)12 엔진룸 안으로 노란 밸브가 왕복 운동을 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2006년 출시된 배트모빌은 1045개 부품으로 구성됐다. 검은색 차체에 자주색 시트, 회색 엔진을 구현했는데 톱니바퀴를 이어붙인 듯한 앞뒤 엔진 4개가 동시에 회전한다. 바퀴 휠에 새겨진 배트맨 로고가 시그니처다.

요즘엔 포르셰 911 지티(GT)3 알에스(RS), 부가티 시론, 람보르기니 시안, 페라리 테이토나 등 한층 진화한 레고 슈퍼카 시리즈에 어른들이 열광한다. 50만~60만원대 고가품이라 할인행사 때면 월차를 내고 매장으로 달려가는 직장인도 많다. 레고 블록을 기본 재료로 하고 3디(D) 프린터로 일부 부품을 만들어 자신만의 슈퍼카를 디자인하고 조립하는 브릭 크리에이터도 등장했다. 나도 짠내 수집을 넘어 언젠가 상자 속에 잠자는 수만개의 브릭 조각을 예술품으로 부활시킬 것이다.

글·사진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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