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면서 채우는 마음의 양식…봄날의 도서관으로 [ESC]

한겨레 2024. 3. 2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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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왜 해? 도서관 여행
자유롭게 뒹구는 어린이도서관
음악·미술 등 다양한 특화 공간도
개학 이후 한산…3월이 방문 적기
경기 의정부시 민락동에 있는 의정부미술도서관. 3층짜리 도서관 건물 한쪽에 녹지를 바라보는 큰 통창을 냈고, 채광이 좋아 책 읽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생에서 도서관을 가장 많이 가는 시기는 아마 20대 중후반쯤일 테다. 수능을 보고 대학에 들어가도 대학생도 결국 학생의 신분인지라 자신을 증명할 방법은 공부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쯤, 취업 교재와 인강 자료를 들고 흔들리는 청춘들은 도서관으로 향한다. 책을 읽는 곳이라기보단 그냥 ‘공부하는 공간’이다. 그 답답함이 싫어도 이 시기에 여기 아니면 내가 있을 곳이 없을 거라는 불안함으로 지금도 수많은 취업준비생들이 새벽마다 도서관 자리를 맡으러 부산하게 움직인다. 약간은 쿰쿰한 오래된 책 냄새 사이로 짭짤한 매점 라면 냄새가 섞여 있는 그곳. 간혹 들려오는 헛기침 소리 사이로 사각사각 필기 소리가 들려오는 그곳. 양지 바른 문 앞 자판기 옆에선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 못한 복학생들이 컵 차기를 했던 그곳. 요즘은 컵 차기 대신 뭘 하고 노는지는 모르겠다. 그 시절 이후로 꼴도 보기 싫었던 곳인지라 직장인이 된 이후로는 도서관 방향으로 고개도 안 돌리고 살았다. 그곳에 가면 나의 불안했던 청춘의 삶이 왠지 되살아날 것 같아서였다.

키즈카페 가면 몇만원 깨지는데

그런 나와는 다르게 아내는 도서관을 여전히 좋아한다. 나 못지 않게 방황했던 걸로 아는데, 아내는 여러 이유를 들어 도서관을 “아주 좋은 곳”이라고 했다. 경제적이며,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이 되기도 하며, 스스로도 편안해지는 힐링 공간이라고. 겨울방학 내내 아이들과 도서관을 다녔고 특별한 일 없는 주말에도 도서관을 가자고 하는 ‘도서관 죽순이’ 아내를 보며 도서관의 미덕은 어떤 것인지 궁금해졌다.

아내의 진두지휘로 우리 가족이 자주 찾은 도서관은 경기 성남시 백현동에 있는 판교어린이도서관이다. 12만권 정도 되는 장서 중에 아동도서가 6만권 이상을 차지하는 어린이 특화 도서관이다. 1층엔 신발을 벗고 들어가 뒹굴뒹굴하며 책을 볼 수 있는 유아열람실이 있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누워서 책을 읽다가 마음에 맞는 아이들과 소곤거리기도 하고, 조그만 다락방에 숨기도 한다. 부모 입장에서도 안전하고 편안하게 아이들을 놀릴 수 있는 곳이라 특히 주말이 되면 많이 붐비는 편이다. 가만히 살펴보면 대체로 처음 온 부모는 아이에게 책을 읽어 주다가 아이가 무언가 스스로 놀거리를 찾으면 열람실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을 맞으며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평화로운 풍경이다. 2층에는 일반 열람실이 있다. 웬만한 책들이 구비되어 있어서 아이가 혼자 잘 놀고 읽으면 엄마·아빠도 책 한권 볼 수 있다. 이곳 도서관의 식음료에도 아내의 만족도는 높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덮밥류와 라면 등을 팔고 카레·짜장밥 등 그날의 특별메뉴가 추가되기도 한다. 아내는 말한다. 키즈카페만 가도 몇만원이 훌쩍 깨지는데 여기는 따뜻하고 안전하고 편안하다고.

경기 의정부시 민락동에 있는 의정부미술도서관은 이름에 걸맞게 참 아름답다. 장서 수(5만5천권)는 보통의 도서관보다 많지 않지만 3층짜리 도서관 건물이 녹지를 바라보는 큰 통창으로 연결돼 있다. 아마도 이 도서관을 지은 건축가는 자연채광을 통한 책 읽기를 선사하고 싶었던 것 같다. 어둑어둑한 독서등을 상상하던 내 경험 속 ‘도서관’과는 적잖이 다른 분위기 속에서 국내에 잘 소개되지 않은 예술서적만 1만권이 넘는다. 이 도서관에선 아이들이 책을 읽으러 가면 아내와 나는 멀리서 애들을 보면서도 꽤 우아한 데이트를 즐길 수 있었다. 어디에서도 아이들이 시야에 들어오는 도서관 구조 때문이다. 곳곳에 놓인 소파에서 아무렇게나 누워 책을 보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복잡한 감정이 몰려온다. ‘아이들이 중학교만 가도 책 읽을 시간이 없어질 텐데…그래, 지금이라도 책과 친하게 지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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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춥고, 따뜻해져도 황사가…

경기 의정부시 신곡동의 의정부음악도서관은 음악에 특화된 곳이다. 도서관과 어울릴 만한 음악으로 클래식이 먼저 떠오르지만 이곳은 그런 통념을 깬다. 도서관 벽면은 그라피티로 장식돼있고 1층 주요 서가를 차지하고 있는 장르는 알앤비(R&B)와 재즈 같은 흑인 음악이다. 의정부 자체가 미군 문화를 많이 받아들인 도시이다 보니, 이런 대중음악도 도서관의 주요 테마로 잡았다고 한다. 물론 국악과 클래식 등 다채로운 음악도 포용하고 있다. 이곳은 책보다 음악 관련 자료가 더 많다. 1만개가 넘는 엘피(LP)·시디(CD)를 듣고 악보 종류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다. 3층엔 근사한 ‘오디오룸’을 꾸며놓았다. 딱 봐도 보통 가정에선 구성하기 힘든 오디오 시스템에서 시간마다 선별한 프로그램을 들려준다. 지난 22일엔 ‘레스피기:새, 3개의 보티첼리 그림, 모음곡 지(G)장조’와 힙합 뮤지션 창모의 ‘보이후드’ 음반, 베르디의 오페라 ‘맥베스’가 1~2시간씩 오디오룸을 채웠다. 국철 회룡역에서 가까우니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은 들러봐도 좋을 듯하다.

아무래도 도서관은 방학 땐 붐비고 학기가 시작하면 한산해진다. 얼마 전에 캠핑을 갔는데 아직은 춥고, 날이 좀 따뜻하다 싶은 주말엔 황사 때문에 나가기가 망설여진다. 그래서 도서관 방문은 요즘이 적기다. 아내에게 이번에 도서관을 주제로 글을 쓰겠다고 했더니 “아일랜드의 트리니티도서관이 얼마나 아름답냐면…”으로 시작해 “미국 의회도서관엔 세상의 모든 책이 있다”, “언젠가는 이집트에 새로 지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가보고 싶다”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취미라는 게 비싼 걸 사고 휘황찬란한 경험을 해야 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도서관엔 읽을거리뿐만 아니라 놀거리와 먹을거리도 있다. 마음의 양식도 채우고 평안도 얻을 수 있는 곳이 도서관이다.

글·사진 허진웅 이노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낚시든, 악기든, 오토바이든, 세차든, ‘너 좋아하는 게 뭐야?’ 라고 물었을 때 무언가 한가지 서슴없이 대답할 수 있는 삶이야말로 좋은 삶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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