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화났거나 무관심한 주주들에게 표 달라 읍소해야 하죠”… 의결권 대행 알바, 직접 해보니

정민하 기자 2024. 3. 23.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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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과 나이, 주소만 있는 주주명부
섀도보팅 폐지 후 치열해지는 표 싸움
“요즘은 11월 말부터 문의 와”
여기 우리 아들 안 사는디? 아들이 요 근처 살아서 매일 오는데, 오늘은 안 오네. 이따 늦게 반찬 가지러 올지도 몰라. 근데 우리 아들이 어디 투자했어?

벨을 누르기 전 옷매무시를 가다듬는다. 목에 걸린 방문증과 기업 설명이 담긴 방문 키트를 확인한다. ‘띵동’. 아무 응답이 없지만 익숙한 듯 다시 한번 벨을 누른다. ‘띵동’. 그제야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들린다. 명단에서 확인한 주주의 이름은 40대 남성이었지만,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 한 분이 나온다. 주주의 어머니였다.

로코모티브에서 배포하는 의결권 대리행사 권유 교육자료(왼쪽)와 방문증. 주주의 의결권을 모으러 다닐 때 방문증을 항상 착용해야 한다. /정민하 기자

지난 14일 오후 경기도 의정부시에서 의결권 위임 대행사 로코모티브 최범휘(41) 본부장과 함께 일부 기업 소액주주들을 대상으로 의결권을 모으는 업무를 직접 해봤다. 예상은 했지만, 업무는 역시나 쉽지 않았다. 주주 명단에는 연락처가 없고 주소만 있기에 일일이 가정 방문해야 했다. 또 의정부시로 구역이 정해져 있어도 주주 거주지 간 거리가 멀었고, 아파트의 경우 공동현관 보안에서 막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날 약 3시간 동안 방문한 다섯 가구 중 두 곳은 아무도 없었다. 한 곳은 이미 주주가 이사를 갔고, 나머지 두 곳은 사람은 있었으나 당사자인 주주가 없었다. 결국 딱 한 곳에서 어머니를 통해 아들인 주주와 간신히 전화 통화를 했다. 해당 주주는 오늘은 어머니 댁에 가지 않는다면서, 대신 의결권을 위임하는 전자 위임장을 작성해 주기로 했다.

최 본부장은 “상가나 60세 이상 주주가 사는 아파트는 오후 6시 이전에, 비교적 젊은 주주가 사는 아파트는 퇴근 시간 이후에 방문해야 만날 가능성이 높아진다”면서 “신축 아파트가 많아져 아예 거주지까지 가지 못하는 경우가 증가했고, 무엇보다 코로나19 이후로는 집에 있어도 없는 척 문을 안 열어주는 경우가 늘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의결권 위임을 신청한 곳은 분쟁이 있거나, 정족수가 부족한 회사”라면서 “이런 회사는 아무래도 주가가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다 보니 어렵게 주주를 만나도 화만 내는 경우가 있다. 아니면 이미 매도해 관심이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최 본부장은 또 “옛날엔 이 때문에 위임해 주는 주주를 대상으로 선물 공세를 펼치는 일도 있었는데 요즘은 시대가 바뀌었다. 오히려 이야기를 잘 들어드리는 게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이른바 ‘무서운 사람’들이 협박한다는 소문도 많지만 사실이 아니다”고 덧붙였다.

로코모티브 최범휘 본부장이 14일 경기 의정부시에서 방문안내문을 작성하고 있다. 주주 명부에는 연락처가 기재돼 있지 않다 보니 이 안내문을 본 주주가 담당자에게 전화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정민하 기자

국내 의결권 위임 시장은 2000년대 초반부터 형성됐지만, 당시엔 업체가 10여 곳에 불과했다. 그러던 2017년 말 섀도 보팅(Shadow Voting·의결권 대리 행사)이 폐지되면서 관련 시장이 커지기 시작했다. 섀도 보팅이란 주주총회 정족수 미달을 방지하기 위해 불참한 주주들의 표도 주총에서 나온 찬반 비율대로 투표한 것으로 간주하는 제도다. 이 제도가 폐지되면서 실제로 주주표를 모집하는 것이 필요해진 것이다.

여기에 2020~2021년 이른바 ‘동학개미’ 운동으로 소액주주 수가 급증했고, 최근 주총에서 경영진과 행동주의 펀드 간 표 대결이 늘어나면서 공격(행동주의)과 방어(회사) 측이 모두 전문 업체를 선임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대행사를 쓰지 않고 해당 기업 임직원들이 퇴근 후 표를 얻으러 ‘야근’하는 일도 있었지만, 52시간제 도입 등의 영향으로 아예 사라졌다. 이에 의결권 위임 대행업체는 현재 50여 곳으로 크게 늘었다.

의결권 위임 시장은 앞으로도 더 커질 전망이다. 올해 정부가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를 해소하겠다며 밸류업(가치 제고) 프로그램 등 여러 정책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주주 환원 요구가 소액주주들의 정당한 요구 사항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 분위기이고, 소액주주들을 모으는 플랫폼도 많이 늘어난 만큼 집단행동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의결권 위임사 중 선두 업체는 2005년에 설립된 로코모티브다. 전국에 60개 거점을 두고 있고 주총 시즌엔 500여명이 움직인다. 지난해 SK증권을 비롯해 경동도시가스, 한솔홈데코 등 코스피 상장사 5개와 젬백스링크, 오스코텍 등 코스닥 상장사 3개를 포함해 총 8개 기업으로부터 의결권 대행 수주에 성공한 바 있다. 이외에도 이름이 알려진 업체로는 비사이드코리아, 팀스, 리앤제이마커드아시아 등이 있다.

로코모티브 최범휘 본부장이 14일 경기 의정부시에서 의결권을 위임받을 때 사용하는 애플리케이션(앱)에 방문 결과를 기록하고 있다. /정민하 기자

업체별로 구체적인 사안은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통상적으로 의결권 대행 과정은 이렇다. 상장사가 의뢰를 하면 대행업체가 주주명부를 분석해 일정·견적 등 전략을 수립한다. 이후 계약이 성사되면 업체는 주주명부를 통해 지역·주식 수 별 주주 현황을 파악하고 주주안내문 및 위임장을 발송한다. 이후 사람이 직접 주주명부에 있는 이름과 주소를 보고 찾아가 의결권을 받아온다.

의결권 위임 대행업체는 직원만으로 일손이 부족하면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하기도 한다. 아르바이트생은 일당, 건당 수수료와 더불어 성공 보수를 받는다. 낯선 이의 방문을 허락해야 하는 만큼 아무래도 여성이 경쟁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보험 설계사, 카드 모집인 등으로 일하다 불황으로 건너 온 사람이 많다고 한다. 보험, 카드 모집 시장은 핀테크로 인해 일자리가 줄고 있다.

의결권 위임 아르바이트에 참가한 이모(49)씨는 “기본적으로 하루에 12만~15만원 상당의 일급을 받고, 위임을 많이 받아올수록 인센티브로 많게는 30만~40만원을 받는다”면서 “특히 보유 주식 수가 많은 주주로부터 위임을 받아오면 그만큼 수수료를 더 받을 수 있어 두세 번 찾아가기도 한다”고 말했다.

의결권 대행 전략 등을 담당하는 김상구(41) 로코모티브 차장은 “통상적으로 3월 주총을 앞두고 1월 말쯤에서야 의결권이 필요한 상장사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이번 시즌에는 안건 부결 위기감을 느끼는 것인지 좀 더 이른 11월부터 준비하는 회사들이 많아졌다”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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