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라디오 놓고 충돌한 新舊 세대갈등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2024. 3. 2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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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노장층은 전통음악, 청년은 유행가 선호…방송국에 서로 투서보내
1927년 개국한 경성방송국 라디오 프로그램 중 음악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오락프로그램 4개중 3개가 음악프로그램일 정도였다. 하지만 방송국은 골머리를 앓았다. 전통음악을 틀어달라는 노장년층과 케케묵은 전통음악은 싫으니 유행가나 서양음악을 틀어달라는 청년층과 일부 지식층의 요구가 팽팽히 맞섰기 때문이다./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1933년 12월 신문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1927년 개국한 경성방송국 라디오 음악프로그램을 둘러싸고 장년층과 청년층간 갈등이 심화돼 투서가 쏟아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수많은 청취자로부터 매일 희망 혹은 불평을 열거하야 투서가 여러 장씩 오게 되는데, 한 집안 가족으로서도 늙은 아버지는 신식 유행가는 듣기 싫으니 고래(古來)의 조선 노래를 많이 들려다오, 혹은 양악(洋樂)은 도무지 모르겠으니 가야금 같은 것을 많이 들려다오 하는 반면에 젊은 아들로부터는 케케묵은 예전 조선 노래는 듣기 싫으니 신식 유행가를 들려주오,가야금같은 시대늦은 악기는 듣기 싫으니 최신 양악(洋樂)을 들려주오 하는 등 신구(新舊) 충돌과…'(‘과도기 방송의 교향악-新舊사상이 안테나서 충돌’, 조선일보 1929년 12월17일)

한 집안에서도 늙은 아버지는 전통 음악을 선호하는 반면 유행가나 양악은 거부하고, 젊은 아들은 케케묵은 전통 음악은 싫으니 유행가나 서양음악을 틀어달라는 ‘투서’가 쏟아져 방송국이 골머리를 앓는다는 내용이었다.

◇전통음악 비중이 절반 이상인 라디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은 예나 지금이나 중요하다. 1930년대 경성방송국 오락 프로그램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높았다. 박용규 교수 연구에 따르면, 1930년대 하루 4개 정도 편성된 오락 프로그램 중 3개 이상이 음악이었다고 한다. 드라마, 야담, 방송소설 같은 프로그램이 나머지 1개를 차지했다. 프로그램 하나 당 약 30분 정도 편성됐다.

음악프로그램 중에서도 판소리, 잡가, 아악 같은 전통음악이 1930년대 내내 절반에서 70%를 차지했고, 서양음악은 20%~30%를 차지했다. 반면 유행가와 신민요 같은 대중음악 프로그램은 한자리 숫자이거나 최고 10%를 약간 넘어서는 정도였다는 것이다. 이애리수의 ‘황성의 적’(황성옛터) 고복수 ‘타향살이’ 이난영 ‘목포의 눈물’같은 히트곡을 정작 라디오에선 쉽게 들을 수없었다는 얘기다.

◇유성기 음반발매량은 유행가가 전통음악과 비슷

장유정 단국대 교수 연구에 따르면, 일제시대 발매된 유성기 음반 중 대중가요가 4125면으로, 전통음악(4258면)에 버금갈 뿐 아니라 서양음악(816면)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시기적으로 나누면 대략 1935년부터 대중가요 음반이 전통음악 음반보다 더 많이 팔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유성기 음반 발매 현황과 달리, 라디오 방송에선 대중가요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낮았다.

◇유행가는 ‘惡歌, 亡國가요’

경성방송국이 유행가를 덜 편성한 것은 지식층이 대체로 유행가와 신민요 같은 대중음악에 비판적이었기 때문이다. 파인 김동환이 그랬다. ‘조선지광’ 1927년8월호에 ‘망국적가요소멸책’을 발표한 파인은 아리랑이나 수심가같은 잡가는 조선 왕조 내내 학대받은 백성들의 신음과 애탄, 곡성이었고, 유행가요 또한 그런 잡가를 답습한 ‘악(惡)가요’이자 ‘망국가요’라고 주장했다.

◇'기생들이 부르는 歌曲을 증오한다’

해외 유학생이나 근대식 교육을 받은 지식인층 가운데는 전통음악에 비판적인 그룹도 꽤 있었다. 춘원 이광수는 ‘사람을 신경쇠약과 주색에 침륜함과 또는 불평과 나타로 인도하는 예술은 불건전한 예술이오, 멸망의 예술’이라고 비판한 뒤, ‘나는 오늘날 조선기생이 대표하는 민중예술이라 할 만한 모든 가곡(歌曲)을 체증(切憎·증오)한다’고 썼다.(‘예술과 인생’, ‘개벽’19호,1920년2월) 전통음악에 대한 반감을 ‘증오’란 표현까지 써가며 드러냈다. 그는 예술이 ‘창조와 표현의 새 힘’을 주고 근대를 달성하는데 결정적 요소라고 생각했다. 전통음악은 도리어 장해가 된다고 믿었다.

◇엘리트 출신 제작진, ‘조선 것 지킨다’ 전통음악 선호

하지만 고학력 엘리트 출신이 대부분인 라디오 제작진은 우리 문화를 지키기 위한 차원에서 전통음악을 의도적으로 많이 편성했다. 윤백남, 김정진, 이혜구, 이하윤, 이서구 같은 경성방송국 음악연예프로그램 담당자들은 모두 고등교육을 받았고, 기자나 문인으로 활동하던 사람들이었다.경성제대를 나온 이혜구를 비롯,나머지는 전부 일본 유학생 출신이었다.

1932년 경성방송국에 들어가 음악프로그램을 맡은 이혜구(1909~2010)는 서양음악 마니아였다. 경성제대관현악단에서 비올라를 연주했고, 바이올리니스트 채동선과 현악 4중주단을 함께 할 만큼 조예가 깊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당시 청취자들이 서양음악을 얼마나 이해할지 의심스러웠던 모양이다. ‘어느 활짝 개인 일요일 낮에 사직공원뒤 성벽을 끼고 산보하다가 문득 안하에 납작한 초가집이 다닥 다닥 붙은데서 슬레작(Leo Slezak·체코 출신 명테너)이 부르는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가 산위로 울려나왔다.그때 나는 저런 초가집속에 무명의 가난한 음악가가 있다면 그 ‘푸로’를 즐길까, 도대체 우리나라에서 몇사람이나 외국가요방송을 이해할까 하는 의문을 품었고, 지금도 가끔 그것을 환기한다.’(‘晩堂 文債錄’ 96쪽)

◇주 청취자인 장년층의 요청에 부응

출연진을 섭외하기 쉽고, 제작비가 상대적으로 적게 든다는 점도 전통 음악 방송비중이 높았던 이유 중 하나였다. 기생조합인 권번에 소속된 예기들이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 주요 출연자였고, 한두명 출연료만 주면 30분짜리 프로그램 하나 만드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전통음악 편성을 원하는 청취자들의 수요가 많았던 이유가 크다. 라디오 수신기는 싸게는 10원, 15원에서 고급 기종은 웬만한 월급쟁이 두세달치 월급을 호가하는 100원 이상 가는 사치품이었다. 방송 초기 이런 물건을 들여놓을 수 있는 계층은 상공업자, 회사원, 공무원 등이었다. 조선인의 라디오 보급은 방송 첫해인 1927년 949대에서 1935년 1만4537대, 1939년 7만5909대, 1941년 14만4912대로 급증했다.

◇라디오통해 급부상한 전통음악의 聲價

경성방송국이 1939년 청취자 조사를 했더니, ‘열광적 총애를 받는 음악방송 중에서도 가야금, 거문고, 육자박이 등 조선 음악팬이 압도적으로 많아 양악팬의 약 3배나 되었다’고 한다. 청취료를 내는 등록 청취자 중 장년층이 많았고, 이들에게 인기가 높은 판소리, 잡가, 민요를 주로 편성했다는 것이다.

전근대 궁중이나 양반집 사랑방, 시골 대청 마루에서 듣던 전통음악은 1930년대 라디오라는 뉴미디어를 통해 다시 태어났다. 전국구 스타들도 잇따라 탄생했고, 전통음악 또한 전국적,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국악 연구자들은 경성방송국 프로그램 연구에 뛰어들어 자료집을 내고 논문을 쏟아낸다.라디오가 국악 발전에 기여한 몫이 크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이광수, ‘예술과 인생’, ‘개벽’19호, 1920년2월

이혜구, 만당문채록, 한국국악학회, 1970

박용규, 일제하 라디오 방송의 음악프로그램에 관한 연구-1930년대를 중심으로, 언론정보연구 47권2호, 서울대 언론정보연구소, 2010

장유정, 일제시대 유성기 음반 곡종의 실제와 분류, 한국민요학 제21집,한국민요학회, 20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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