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는 죽어가는데, 작가는 영생을 누린다고?

김동식 소설가 2024. 3. 2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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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김동식의 기이한 이야기]
‘무한 수명’ 시대 열리자
예상 못한 문제가 생겼다

“돈 많은 놈들이 ‘무한 수명’으로 사는 거 아니꼽지 않냐?”

어두운 조명의 술집, 주먹코 남자가 옆 자리 친구에게 버럭 하며 말했다. 반대쪽 바 테이블에서 술을 홀짝이던 칼자국 남자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니꼽기는. 돈 있으면 유전자 시술도 하고 장기 교체도 하면서 오래 사는 거지 뭐.” 들릴 정도가 아닌 걸 보면 남 얘기에 혼잣말로 대꾸하는 게 그의 술안주인 듯했다. 주먹코가 다시 버럭 했다.

“인간이 영생하는 거, 좋다 이거야. 근데 왜 그게 소수의 전유물이어야 하냐고! 솔직히 말해서 텔로미어(telomere·세포 수명을 결정짓는 DNA 조각) 연장 시술 한 번에 10억원씩 하는 게 말이나 돼? 나오기는 수십 년 전에 나온 기술인데 왜 가격이 안 내려가냐고. ‘수명 정가제’가 말이나 되는 법이야? 정부에서 그딴 법을 계속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다 기득권들을 위한 거 아니냐고!”

칼자국은 속삭였다. “그럼 개나 소나 영생으로 살면 지구가 포화상태가 될 텐데 어쩌자고. 개판 돼서 자식의 자식의 자식의 자식의 자식을 못 알아보고 막장 드라마 찍으면 얼마나 끔찍해.”

주먹코는 ‘수명 정가제’에 불만이 많은 모양이었다. 고가의 목숨 값을 치르면 더 오래 살 수 있는 의료 제도. “비싼 가격이 아무나 함부로 할 수 없게 막는 나름의 역할이 있다고 치자. 그런데 10억이 같은 10억이야?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평생 일해도 못 벌 돈이지만, 부자한테는 재산의 몇 분의 일 수준밖에 안 되는 거잖아. 비싼 돈 주고 외식 한 번 하는 정도로 죽지 않고 사는 건데, 이게 공평해? 세금이라도 더 세게 붙이든가 해야지!”

일러스트=한상엽

칼자국은 또 혼자 중얼거렸다. “그건 억지지. 똑같은 물건을 사는데 왜 부자라고 비싸게 사야 해? 그런 논리면 부자들은 짜장면 한 그릇 사 먹을 때도 몇 억씩 내고 사 먹어야겠네.”

“영원한 삶이라는 건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한 부의 상속 같은 개념이라고. 안 그래? 그나마 예전에는 늙어 죽으면 상속세나 양도세로 재분배가 있었지만, 요즘 누가 상속세를 내? 놈들은 가만히 숨만 쉬어도 1분마다 우리 월급만큼 통장에 자산이 늘어난다고. 심지어는 그 1분이 이제 무한해졌어. 한계마저 사라졌다고. 이게 말이나 돼?”

주먹코는 계속 옆 친구에게 열변을 토했고, 칼자국은 술잔을 매만지며 비웃었다. “쯧, 살면서 한 번이라도 ‘영끌’로 등기 직접 쳐본 적 있으면 절대 저런 말 못하지. 노동은 종잣돈 만드는 데 쓰고, 투자로 계층 이동을 할 생각을 해야지. 부자들도 처음부터 부자였겠냐고.”

그러다 화제가 한 소설에게 향했다. “내가 ‘무한 수명’ 양반 중에 제일 싫어하는 게 누군지 알아? 소설책 ‘푸르스마 푸르스마나스’ 알지? 그거 쓴 작가가 벌써 200살 넘은 거 알아? 이놈이 딱 전형적인 돈에 미친 인간이야. 첫 책으로 대박 나자마자 한 일이 땅 투기잖아. 그 땅이 개발될 거라는 정보도 자기 팬을 통해 알아냈다는 소문이 있어. 책 잘 팔리기 시작하니까 바로 유명 인사 행세하면서 여기저기 인맥 쌓고 돌아다녔지. 아니 어떻게 소설가가 그럴 수 있어? 예술을 한다는 양반이.”

칼자국이 “자기들은 돈에 환장하면서 왜 예술가에게는 이상한 잣대를 들이대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그래서 말인데, 내 계획이 뭔 줄 알아?” 귀를 쫑긋 세웠다. 주먹코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춰 말을 이었다. “이 작가를 납치하는 거야.”

칼자국은 움찔 놀랐고, 주먹코는 속삭였다. “이 양반이 혼자 낚시하러 가는 곳이 어딘지를 내가 알아냈거든? 이번 주에 거기서 잠복하고 있다가 몰래 납치할 거야.” 칼자국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주먹코의 테이블로 향했다. 그리고 무서운 얼굴로 주먹코를 노려보았다. “이봐. 내가 들으려고 들은 건 아닌데, 범죄를 모의하고 있더군. 그것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를 말이야.”

칼자국의 험상궂은 얼굴과 덩치는 주먹코를 겁먹게 하기 충분했다. 테이블을 내리치며 앉은 칼자국이 이를 갈았다. “내가 가장 경멸하는 자들이 누군지 알아? 돈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는 놈들이야. 자본주의를 욕먹이는 더러운 놈들.” “자, 잠깐! 오해입니다.” “낚시터에서 납치한다는 거 다 들었는데 무슨 오해!” “제가 납치를 한다는 건 맞는데요, 사실은요!”

주먹코는 떨리는 목소리로 재빠르게 설명했다. 얘기가 진행될수록 칼자국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해갔다.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칼자국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주말 언제야? 나도 그 납치를 돕겠어. 정확한 계획이 어떻게 돼?”

이들의 갑작스러운 의기투합은 그 작가의 소설 때문이었다. “저도 정말 그 작가의 열혈 독자라고요. ‘푸르스마 푸르스마나스’를 몇 번이나 읽었는지 모릅니다. 근데 보십쇼, 신작 안 나온 지가 벌써 40년이 넘지 않았습니까? 어느 인터뷰를 보아하니, 앞으로 자기는 후속작을 100년에 한 권씩 내겠답니다. 이게 말이나 됩니까? 이게 다 ‘무한 수명’ 때문 아닙니까. 하여튼, 저는 그 작가를 가둬놓고 글을 쓰게 할 생각입니다. 우린 100년은커녕 앞으로 40년도 더 못 살 텐데 망할, 소설의 완결은 보고 죽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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