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열의 산썰(山說)] 22. 계절의 '막간', 3월의 산-자연의 순서를 아는 자에게 더 소중한 공간

최동열 2024. 3. 22.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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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에 영월 백덕산에서 만난 야생화. 성급하게 꽃을 피웠다가 ‘꽃샘추위’ 한파에 얼어붙어 파르르 떨고 있는 모습이 앙증맞다.

■계절의 경계-겨울도 아니고 봄도 아닌 애매한 지점

3월의 산은 밋밋하다. 1년 중에 산이 가장 볼품없는 계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음력으로 따지면 아직 겨울 언저리에 자리하고 있어 겨울도 아니고, 봄도 아닌 애매한 지점이다. 동장군의 위세를 등에 업고 산을 지배했던 겨울은 산골짜기 구석으로 밀려나 잔설과 함께 마지막 안간힘을 쓰고 있고, 봄은 아직 선뜻 다가서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때를 가늠하는 품새이다. 올해는 동해안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지난 2월부터 여러 차례 폭설이 내려 그나마 눈 구경을 하는 재미가 쏠쏠하지만, 눈조차 없다면 3월의 산은 뭐 하나 내세울 것이 없는 그저 그런 공간이다.

때는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우수(雨水)와 겨울잠 자던 개구리가 놀라 깨어난다는 경칩(驚蟄)·춘분(春分) 절기를 모두 지난 시점. 사람들 사는 평지에는 시나브로 봄기운이 피어오르지만, 깊은 산 계곡과 높은 산등성이는 계절의 경계에서 이방인처럼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갈팡질팡이다.

▲ 삼척 덕항산 등산 중에 바라본 고랭지 고원의 풍광. 바람개비 풍차가 쓸쓸히 떠나는 겨울을 배웅하고 있다.

3월의 산은 색깔마저 흐릿하다. 눈 녹은 물이 질척거리거나 먼지를 뒤집어쓴 상처투성이 낙엽만 뒹굴 뿐, 시선을 사로잡는 선명한 구경거리가 없으니, 산을 오르는 힘겨움은 평소보다 몇 곱이 된다. 바위산의 경우는 애당초 암릉 자체의 멋이 더 큰 매력이니, 그 나름으로 운치가 있겠으나, 낙엽 활엽수림과 포근한 흙으로 이뤄진 육산의 경우는 대개 거기서 거기다. 방금 지나오면서 본 풍경이 어느새 옮겨 와 다시 눈앞에 자리 잡고 있는 격이니, 오르기는 하되 힘만 들 뿐 제자리 걸음을 반복하는 느낌이다. 간혹 물러나려던 겨울이 되돌아와 눈을 뿌리며 심술을 부리는 바람에 산꼭대기 능선이 때늦은 겨울 풍광을 연출하는 경우도 있으나, 그 또한 한나절 반짝 잔치에 그칠 뿐이다. 새봄을 몰고 오는 양광(陽光)이 이미 산 구석구석에 볕 난로를 설치했기에 겨울 끝자락의 눈이 도통 맥을 추지 못한다.

▲ 강릉·평창 선자령 능선의 3월. 백두대간 능선의 산그리메가 저 멀리 황병산, 오대산 노인봉으로 이어지며 끝없이 펼쳐진다.

■연극으로 치면 일종의 ‘막간’-봄을 준비하는 시간

때는 분명 3월이로되, 산에서 ‘꽃피는 춘삼월’은 아직 이르다. 춘삼월은 음력 3월을 뜻하는 것이니 양력으로 볼 때는 달을 넘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기다리는 시간은 연극으로 치면 일종의 ‘막간’이다. 한바탕 흥에 취했던 무대를 접고, 다음 재미를 준비하는 시간인 것이다. 계절로 치면 ‘사잇계절’. 겨울 순백의 유혹이 막을 내리고, 새봄 꽃 잔치를 준비하는 때라고 할 수 있다.

3월의 산이 더 썰렁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막간을 사이에 두고 경쟁하는 겨울과 봄, 두 계절의 존재감이 너무 강렬한 탓도 있다. 한쪽은 새하얀 순백의 눈꽃 잔치로 더없이 눈부신 황홀경을 선물하고, 또 한쪽은 푸릇푸릇 신록과 컬러빛 꽃잔치로 겨울의 순백을 지우니, 아무것도 보여 줄 것이 없어 마치 무대 앞으로 잿빛 휘장을 친 듯 흐릿하고 심심한 3월의 산이 더 초라해 보인다고 할 수 있다.

▲ 3월의 산에는 기온이 조금만 올라도 나뭇가지마다 새순이 요란하게 싹을 틔운다.

■순서와 조화를 아는 자연의 지혜를 체득하는 계절

그런데 또 한편, 산에서 꼭 무엇인가를 얻어 갈 요량으로 조급하게 굴지만 않는다면, 그 막간은 참으로 소중한 시간이라는 것을 새삼 실감할 수 있다. 가던 길 멈추고 조금만 세심히 주위를 둘러보면, 얼어붙었던 계곡과 산비탈에, 온기가 돌기 무섭게 잠자던 생명이 깨어나 혹은 땅을 박차고 솟아나고, 혹은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나뭇등걸까지 마구 싹을 틔우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니 이런 요술을 또 어디서 구경할 수 있다는 말인가.

자연 스스로가 연출하는 그 요술에는 질서가 있다. 세상의 조화를 안다고나 할까. 저 잘났다고 아무렇게나 제멋대로 싹 틔우고, 꽃 피울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생강나무 네가 나갈 차례야”, “진달래, 네가 꽃단장을 시작해야 할 시간이다”, “얼레지, 뭐 하고 있어, 나갈 준비해” 하는 식으로 모든 야생화초와 꽃나무들이 제 순서를 알고 기다리면서 준비한다. 산 아래에서부터 위로 거슬러 올라가는 개화(開花)의 차례도 매년 어긋남이 없다.

▲ 봄 기운이 완연해지자 나뭇가지 새순이 꽃처럼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다.

어느해인가. 등산 중에 계곡의 바위 밑에 앙증맞게 피어난 야생화가 눈을 뒤집어 쓴 채 얼어붙은 안타까운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세상 물정에 서툰 어린아이가 며칠 따뜻하다고 외투도 없이 성급하게 들로 나섰다가 심술처럼 쏟아진 눈을 만나 파르르 떨고 있는 꼴이었다. 그렇게 갑작스런 날씨의 일탈에 의해 예기치 않게 험한 꼴을 당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마치 풍금 건반 위에서 봄바람이 빠른 손놀림으로 연주를 하듯, 개화의 하모니는 일사분란하게 한 치의 오차도 없다. 그래서 3월의 산을 오를 때는 주마간산 격의 ‘구경’보다는 바위틈, 나뭇가지 끝에서 일어나는 작은 변화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요모조모 살피는 ‘관찰’의 자세가 필요하다. 그렇게 미시적 접근을 해야 새봄이 고산을 물들이기까지 얼마나 간절한 막간의 기다림과 치열한 몸부림이 있었는지 실감 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 새봄 야생화. 3월이 지나면 등산로 비탈길에는 이런 야생화가 바위 틈, 나뭇등걸을 비집고 앞다퉈 피어난다.

인생에서도 고진(苦盡) 뒤의 감래(甘來)가 더욱 벅차고, 즐겁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다. 3월의 산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지우고 준비하는 인내를 감내했기에 4월 신록의 산수화가 더욱 황홀해지는 것이다. 신비한 눈꽃 세상이 연출하는 겨울의 멋에 한동안 취해있던 등산객들에게 곧바로 봄꽃의 현란한 아름다움을 선물하는 것이 아니라, 사막 같은 황량함 뒤의 반전으로 극적인 효과를 배가시키는 연출 기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봄을 맞으러 나선 산은 기다림에 지친 연인처럼 해쓱한 얼굴을 하고 있되, 그 속내는 비견할 데가 없을 정도로 웅숭깊고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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