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관료들의 정치 토론장…태종은 중전의 화 피해 ‘피난처’로 쓰기도[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2024. 3. 2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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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 (26) 경서 강론·논의의 장 ‘경연청’
의정부 재상·육조판서와 참판
학문적 능력 갖춘 관료들 망라
신하들과 오랜 시간 마주 앉아
정치문제 논하고 인물평 교환도
중전의 최측근 궁녀 취한 태종
분노·눈총 피해 보름 피난살이
후궁 들일때마다 민씨 공격받자
처남 넷 죽이고 처가 몰락시켜
일러스트 = 김유종 기자

# 고려 말부터 시작된 정치 토론장

경연청(經筵廳)은 왕을 위한 학문 기관이자 정치 토론장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곳은 관직은 있지만 관청은 없다. 그러나 경연 장소는 있었으니, 실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경연 장소는 바뀔 수도 있으니 가변적인 기관이었다. 말하자면 경연청은 특정한 건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경연 자체를 일컫는 것이었다. 따라서 왕이 경연을 여는 곳이면 어디든 경연청이 될 수 있었다. 그렇다고 경연청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개 일정한 장소를 정해놓고 경연청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경연청에 속한 관원으로는 영사, 지사, 동지사 등 3원이 있고, 특진관, 정3품의 참찬관들과 승지들, 홍문관의 부제학, 시강관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겸직이었다. 영사, 지사, 동지사 등은 의정부의 재상과 홍문관 대제학, 또는 학문적 능력을 갖춘 판서가 맡았고, 특진관은 판서나 참판 중에 학문적 능력이 있는 관료가 지명되기도 했으며, 시강관들은 홍문관의 직제학 이하의 학사들이 맡았다. 시강관 아래로 시독관, 검토관, 사경, 설경, 전경 등도 모두 홍문관 관원들이었다. 또한 참찬관은 각 조의 참판이나 참의 또는 성균관의 고위직들이 맡았다. 이렇게 볼 때 경연청에 속한 관리는 의정부의 재상들과 육조의 판서와 참판, 참의, 학문 기관의 장 또는 고위직, 그리고 승정원의 승지들과 홍문관의 관원들이 망라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경연이 처음 시작된 시기는 고려 말 공민왕 때부터였다. 공민왕은 왕실 도서관인 청연각을 경연장으로 사용했다. 당시에는 경연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서연이라는 용어를 썼다. 그러다 공양왕 때 경연으로 고쳤다. 그리고 조선에서는 왕에게 강론하는 곳은 ‘경연’, 왕세자에게 강연하는 곳은 ‘서연’이라 구분하였다.

경연에서 하는 일이 주로 경서를 강론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왕이 신하들과 만나고 오랜 시간 마주하는 자리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정치문제나 인물평을 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경연이 정치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 왕비에게 쫓겨나 경연청에서 자야 했던 태종의 뒤끝

실록의 기록을 보면 경연청은 단순히 왕과 신하가 정치 토론만 했던 곳은 아니었다. 실록은 1400년 12월 19일에 이런 기록을 남기고 있다.

“왕이 중궁의 투기 때문에 경연청에 나와서 10여 일 동안 거처하였다.”

실록 연대상으론 이 기록은 정종 2년 때의 일로 되어 있다. 하지만 당시 왕은 정종이 아닌 태종이었다. 정종은 1400년 11월에 태종에게 왕위를 내주고 상왕으로 물러났으니, 1400년 12월은 태종이 왕위에 오른 지 한 달 남짓 되던 때였다.

당시 태종은 원경왕후 민씨에게 쫓겨나 잘 곳이 없어 경연청에서 잠을 자야 했다. 원경왕후가 남편까지 내쫓을 정도로 화가 난 이유는 여자 문제였다. 태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여인 하나를 취했는데, 하필 그 여인이 왕비 민씨의 최측근인 비서 궁녀였다. 훗날 정식으로 후궁에 책봉되어 신빈 신씨로 불린 이 비서 궁녀는 왕비 민씨가 몹시 아끼던 본방 나인이었다. 본방 나인이란 왕비가 사가에서 데려온 여종을 일컫는데, 대개 왕비가 가장 아끼고 신뢰하는 시녀다. 그런데 왕이 되자마자 바로 왕비의 비서를 건드렸으니, 왕비가 뿔이 날 법도 하였다.

사실, 태종이 민씨의 최측근을 건드린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태종의 첫 번째 후궁인 효빈 김씨도 민씨가 가장 아끼던 그녀의 몸종이었다. 김씨는 어린 시절부터 민씨와 함께 자란 동무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 이방원이 그녀를 취하여 임신을 시켰다. 이 일로 민씨는 몹시 분개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김씨를 남편의 첩으로 인정하고, 김씨가 낳은 경녕군도 서자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또다시 자신이 아끼던 시녀를 취했으니, 몹시 분노했던 것이다.

태종은 민씨의 분노를 피해 경연청으로 피신한 셈이었다. 당시 태종이 머물던 궁궐은 개경의 수창궁이었다. 1400년 11월에 방간에 의해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고, 태종은 왕위에 오른 뒤에 경복궁의 기운이 좋지 않다며 수창궁으로 옮겨갔다. 그런데 수창궁은 제대로 조성된 정궁이 아니었기에 규모가 작았다. 고려의 정궁인 연경궁은 공민왕 때 홍건적의 침입으로 완전히 잿더미가 되어 소실된 상태였고, 그 이후 고려 왕실은 규모가 작은 이궁인 수창궁에서 지내야 했다. 태조 이성계도 이 수창궁에서 즉위했다가 경복궁을 지어 한성으로 도읍을 옮겼었다. 그런데 두 번에 걸쳐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태종은 경복궁을 버리고 개경으로 환도하여 수창궁에서 머물렀다.

그런데 수창궁엔 왕의 침실과 왕비의 침실이 따로 구분되어 있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방원은 왕비 민씨의 분노와 따가운 눈총을 견디지 못해 경연청으로 도망 와서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당시 경연청으로 쓰고 있던 곳은 왕의 서재나 도서관이었을 것인데, 이곳에서 태종은 무려 보름 가까이 피난살이를 해야 했던 것이다.

물론 이 피난살이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태종과 원경왕후의 다툼은 이후에도 수년 동안 이어졌기 때문이다. 태종은 이 사건 이후에도 여러 후궁을 받아들였고, 민씨는 태종이 후궁 수를 늘릴 때마다 무섭게 분노했다. 그리고 이렇게 따진다.

“상감께서는 어찌하여 예전의 뜻을 잊으셨습니까? 제가 상감과 더불어 어려움을 지키고 같이 화란을 겪어 국가를 차지하였사온데, 이제 나를 잊음이 어찌 여기에 이르셨습니까?”

민씨의 이런 공격을 받고 태종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녀의 시녀들을 모두 내치고 그녀를 중궁전에 유폐시키다시피 했다. 그리고 분노가 가라앉지 않아 민무구 등 그녀의 동생 네 명을 모두 죽이고, 처가를 완전히 몰락시켜버렸다.

침전에서 내쫓겨 경연청에서 자야 했던 ‘쪽팔림’을 처가의 몰락으로 되갚아준 것을 보면, 태종도 왕이 아닌 한 남자로 볼 땐 그저 뒤끝 장난 아닌 속 좁은 사내에 불과했던 것이다.

# 너무 열심히 준비한 이택의 경연

경연청과 관련하여 선조 6년(1573년) 8월 16일의 다음 기록은 매우 흥미롭다.

“예조참판 이택이 특진관으로 경연청에까지 왔으나, 코피가 몹시 나서 들어가지 못하였다.”

왕과 토론할 수 있는 경연에 참여한다는 것은 매우 영광스럽고도 긴장되는 일인데, 그것도 특진관으로 초청되었으니, 이택이 몹시 긴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왕에게 진강할 내용을 준비하느라 며칠 동안 온갖 정성을 다했을 것이다. 그런데 정성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코피를 쏟을 정도로 했다가 결국 진강은 물론이고 경연청 안으로 들어가 보지도 못했으니, 이택의 속이 얼마나 쓰라렸을까 싶다.

작가

■ 용어설명 - 홍문관(弘文館 )

조선시대에 궁중의 경서(經書)·사적(史籍)의 관리, 문한(文翰)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 왕의 자문에 응하는 임무 때문에 자주 왕에게 조정(朝政)의 옳고 그름을 논하거나 간언(諫言)하는 입장에 있었으므로 사헌부와 사간원의 합계(合啓)에도 왕이 그 간언을 듣지 않으면 마지막으로 홍문관을 합하여 3사합계로 간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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