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의 변방 시대, ‘비매품’이었던 첫 책 [책&생각]

한겨레 2024. 3. 22.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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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책 │ 이금이 작가
올해 안데르센상 최종후보
장편동화 공모당선작 첫 책
출판사 전집의 ‘비매품’ 전락
18년 만에 원제 개정판 ‘부활’
“아동문학이 나를 선택했다”
‘아동문학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글 부문 최종후보에 오른 작가 이금이(62), 한국 작가로는 처음이다. 다음달 이탈리아 볼로냐국제아동도서전에서 최종 수상자가 발표된다. 작가 제공

나의 첫 책은 제7회 계몽사아동문학상을 받은 ‘가슴에서 자라는 나무’(1987년)다. 작가가 된 이들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 또한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 1970년대 초반, 아이들을 위한 책은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 같은 외국 동화가 대부분이었다. 잘하는 것도 없고 내향적이었던 나는 현실의 친구보다 ‘알프스의 소녀’ ‘소공녀’ ‘작은 아씨들’ ‘집 없는 아이’ 같은 동화 속 주인공들과 더 많은 시간과 마음을 나눴다. 그들의 이야기에 푹 빠져 살며 자연스레 작가라는 꿈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쓰고 싶은 글이 동화라는 사실은 미처 알지 못했다.

꿈을 이루기 위해 대학에 가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공부를 잘하지 못했고, 가정 형편도 넉넉지 않았고, 대학 진학률도 낮았던 때여서 반드시 대학엘 가야 한다는 압박도 없었다. 여러 정황을 보면 못 간 게 맞는데 나는 안 가는 거라고 여겼다. 글 쓰는 걸 대학에 가서 배워야 한다는 사실이 정말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읽은 책들처럼 재미있고 감동적인 글을 쓰면 되는 거고, 그 방법은 내 힘으로 찾아내야 진짜인 거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습작을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이 소설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자꾸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야기들만 떠올랐다. 나는 그 이야기들을 소설이라고 여기며 열심히 썼다. 그러다 우연히 어린이 잡지였던 소년중앙에서 주관하는 공모전 당선작을 보게 됐다. 내가 쓰고 있는 소설들과 결이 비슷한 걸 보고 응모를 해보았는데 최종심에 올랐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나를 가장 매료시키고, 내 안에 문학의 원형으로 자리 잡은 작품들은 동화이며, 내가 쓰고 싶은 글 또한 아이들을 1차 독자로 하는 동화라는 사실을. 내가 아동문학을 선택한 게 아니라 아동문학이 나를 선택했다고 믿어온 이유다.

1984년 새벗신인상에 단편 동화, 1985년 소년중앙문학상에는 중편 동화가 뽑히며 드디어 동화작가가 됐다. 아동문학은 비록 문학의 변방 취급을 받고 있었지만 나는 동화를 쓰는 게 행복하기만 했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은 서사가 출렁이는 긴 이야기들이었다. 열심히 장편 동화를 썼지만 갓 등단한 신인에게 출간 기회는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나는 당선작을 책으로 내주는 계몽사아동문학상에 응모했다. 그 당시 장편 동화 공모전은 아동도서 전문 출판사인 계몽사에서 만든 그 상이 유일했고 상금도 가장 컸다. 동화작가라면 누구나 꿈꾸던 상을 받고 책이 나왔지만 서점에서는 만날 수 없었다. 출판사에서 펴낸 전집에 끼워주는 비매품이었기 때문이다. 국내 창작동화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나 인식이 얼마큼 낮았었는지 알 수 있는 일화다.

비매품인 첫 책을 보며 서점에서 판매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독자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던 게 떠오른다. 출판사에서 몇 해 뒤 수상작들을 모아 전집으로 만들었던 기억이 나지만 오래전 일이라 분명하지는 않다. ‘가슴에서 자라는 나무’는 개정판(푸른책들, 2005)을 내면서 원래 내가 지었던 ‘다리가 되렴’이라는 제목을 되찾았다.

어린 시절, 나는 시공간을 뛰어넘어 내게 찾아온 동화를 읽으며 더할 수 없는 즐거움을 느꼈다. 어리고, 힘없는 존재들이 천진함과 강한 생명력으로 행복과 희망을 찾아가는 이야기에서 인간에 대한 믿음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게 동화의 힘이자 매력이라고 여긴다. 나의 첫 책 ‘가슴에서 자라는 나무’에는 신인의 어설픔이나 열정과 함께 동화에 대한 내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동청소년문학 작가

■그리고 다음 책들

밤티마을 큰돌이네 집

처음으로 팬레터를 받음으로써 내게도 독자가 있음을 알게 된 책. 엄마 없이 살며 제대로 된 돌봄과 사랑을 받지 못하던 큰돌이와 영미, 그 집에 들어온 새엄마 ‘팥쥐 엄마’를 통해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 싶었다. 후속편 ‘영미네 집’과 ‘봄이네 집’이 있으며 출간 30주년이 되는 올해에는 변화하는 사회적 감수성에 맞춰 다듬은 개정판을 냈다. 그와 함께 독자의 사랑에 보답하고자 30년 뒤의 이야기인 ‘밤티마을 마리네 집’도 새로 썼다.

대교출판(1994), 푸른책들(2004), 밤티(2024)

너도 하늘말나리야

500살 먹은 느티나무와 보건진료소가 있는 풍경에서 영감을 받은 장편 동화. 10년 가까이 품고 있었기에 미르, 소희, 바우 캐릭터를 보다 단단하고 입체적으로 그릴 수 있었다. 또한 엄마, 여성, 한 인간으로서 했던 고민을 어른 캐릭터들에도 담았다. 후속편으로는 결핍으로 조숙해진 소희의 본성을 찾아주고자 쓴 ‘소희의 방’, 농촌 청소년 미르와 바우 이야기를 담은 ‘숨은 길 찾기’가 있다. 이 시리즈 역시 새로운 시대 감각에 맞춘 전면 개정판을 냈다.

푸른책들(1999), 밤티(2021)

유진과 유진

처음 쓴 청소년 소설. 유치원에서 아동 성폭력 피해를 입은 같은 이름의 두 아이가 중2 교실에서 조우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무거운 소재지만 작품 분위기를 어둡거나 아프게 그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이 겪은 일은 결코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과 함께 어떤 상처도 그들을 영원히 무너지게 할 수 없음을 말하고 싶었다. 아동 성폭력 피해를 그린 소설이기에 보다 세심하게 수정한 개정판을 냈다.

푸른책들(2004), 밤티(2020)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

처음으로 쓴 역사 배경 소설. 10년 넘게 청소년들의 현실을 담은 소설들을 쓰면서 그들의 삶을 따라 한없이 좁아진 무대가 너무 갑갑했다.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청소년들의 가슴에 드넓은 공간을 들여놓아 주고 싶었다. 일제강점기, 가난한 소작농의 딸 수남이 온몸으로 자기 운명을 개척하며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쓸 때는 신이 나서 가슴이 뛰었다. 또한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삶을 함께 겪고 글로 옮기는 동안 인생을 공부한 것 같다.

사계절(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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