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인종주의에 힘입어 형성된 근대 자본주의 체제

최원형 기자 2024. 3. 22.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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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계 역사학자 ‘중국인 문제’ 탐구
19세기 골드러시 이후 이주와 배제
백인 노동계급 자극하는 정치적 수단
2010년대 이후론 ‘중국위협론’ 부상
1852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 북부 오번라빈에서 세광업자에게 함께 고용된 중국인과 백인 들의 모습. 책과함께 제공

중국인 문제
19세기 골드러시, 이주와 노동과 배제
메이 나이 지음, 안효상 옮김 l 책과함께 l 4만3000원

니그로 문제, 유대인 문제, 중국인 문제, 여성 문제 등 서구 역사에는 “무슨무슨 문제”라 이름 붙는 문제 제기의 한 형태가 있다. “무슨무슨”에 해당하는 집단이 우리나라에 속할 수 있는지, 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 투표할 권한을 가질 수 있는지 묻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이런 물음이 나온다는 사실 자체가 말해주듯, 궁극적으로 “무슨무슨”을 ‘배제’하기 위해 설정된 ‘문제’다.

‘중국인 문제’는 오늘날 자본주의 근대 세계가 주조되는 초입에 불거졌다는 점에서 깊은 의미를 지닌다. 중국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노동조합 조직가, 노동교육 전문가로도 활동했던 역사학자 메이 나이(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중국인 문제’에서 미국 캘리포니아, 영국 식민지인 오스트레일리아와 남아프리카 트란스발 등에서 ‘골드러시’ 이후 ‘중국인 문제’가 어떻게 불거지고 전개됐는지, 또 그 의미는 무엇인지 파고든다.

19세기 초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돼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로 몰려드는 ‘골드러시’가 일었고, 1850~1900년 사이 중국인 32만5000명도 여기에 참여했다. 골드러시로 인한 중국인들과 유럽-미국인들 사이의 “첫 대규모 접촉”은 상대적으로 평등한 조건에서 자발적 이민자이자 독립적 탐광자로 서로 만났다는 점에서 이전의 플랜테이션 도급노동(‘쿨리노동’)과는 달랐다. 앞서 도급계약에 묶인 중국인 노동자들이 영국령 식민지 플랜테이션으로 장거리 이주해 노동한 사례들이 있었고, 이는 ‘쿨리무역’이라 불렸다. 골드러시 당시 중국인 이민자들은 다른 지역에서 온 이민자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자유이민자 ’였다.

1885년 미국 와이오밍테리토리 록스프링스의 인종폭동은 광산들에 열정적으로 번졌는데, 이 과정에서 타운의 중국인 거주지들이 불태워졌고, 중국인 28명이 사망하고 400명이 집을 잃었다. ‘하퍼스 위클리’ 1885년 9월26일치에 당시 상황을 그린 그림. 책과함께 제공

서로 다르고 이익을 놓고 경쟁했지만, 금광지들에서 인종 관계가 항상 적대적이거나 폭력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지은이는 ‘중국인 문제’가 불거진 데에는 정치의 영향이 컸다고 본다. 캘리포니아 초대 주지사 존 비글러는 “모든 중국인 광부에게 ‘쿨리’라는 낙인을 찍음으로써 중국인들을 자유노동의 대척점에 있는 흑인노예들과 비교하는 인종주의적 비유를 발견했고, 이를 통해 중국인들을 백인 광부들의 독립성을 위협하는 존재로 주조해냈다.” 백인 노동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한 이 정치적 수(手)는 성공적이었고, 1882년 5월 미국은 중국인 노동자들의 미국 이민을 10년간 중단하는 ‘중국인 배제법’을 통과시켰다. “특정 집단이 인종적으로 현지 사회에 동화될 수 없다는 주장에 근거해, 배제하는 특정 집단을 명시한 최초의 이민법”이었다. 중국인들에 대한 괴롭힘, 폭행, 방화 등도 기승을 부렸다. 연방대법원은 중국인 배제의 근거로 주권, 곧 국가안보를 들었는데, 실제 적대행위가 발생하지 않더라도 국가안보의 문제로 이민을 배제할 수 있다는 논리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1906년 총선에서 영국 자유당과 자유당의 노동자 측 동맹들은 중국인 문제를 주요한 선거 이슈로 이용했다. 책과함께 제공

영국 식민 전초기지였던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백인들은 대륙에 대한 자신들의 미약한 지배력이 중국인들에게 위협받는다고 두려워했고, 이들이 캘리포니아 백인들처럼 내세운 ‘반쿨리주의’는 중국인뿐 아니라 이런저런 비유럽인을 겨냥해 이민을 제한하는 ‘백호주의’(1901~1973) 정책의 주춧돌이 되었다. 남아프리카 트란스발에서 불거진 ‘중국인 문제’는 식민 본국인 영국에서 백인 노동계급의 두려움을 자극한 자유당이 ‘노예제를 반대한다’는 허울을 앞세워 1906년 총선에서 20년 동안 깨지지 않던 보수당 지배를 끝내는 계기가 됐고, 남아프리카에서는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인 배제가 급진적 백인우월주의와 인종분리 의제의 일부였다.

지은이는 “중국인들에 대한 배제가 당시 막 등장하던 전지구적 자본주의 경제에서 외재적인 것이 아니라 그 구성 부분”이었다고 지적한다. 전지구적 자본주의 체제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자유주의적 원칙에 인종에 따른 ‘예외’를 설정하는 그 방식, 곧 “인종과 돈의 연금술”에 기대어 형성됐다는 것이다. ‘중국인 문제’가 역으로 근대 중국이 민족주의에 기대어 스스로를 구성하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 또 2010년대 서구에서 부상한 ‘중국위협론’에서 보듯 ‘중국인 문제’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 등도 짚는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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