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노조가 함께 만든 ‘100억짜리 동행’... 깨져가는 이중구조의 벽

특별취재팀 2024. 3. 22.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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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재단-조선일보
창간 104주년 공동기획
‘12대88의 사회를 넘자’
[10·끝] 깨져가는 이중구조의 벽
18일 오후 동국제강 인천공장에서 한 직원이 크레인에 달린 자석으로 ‘쇳물’의 원료인 고철을 전기로에 넣고 있다. 이 현장에서 4조3교대로 일하는 크레인 기사들은 작년까지는 협력사(하청) 소속 직원으로 저임금, 불안한 고용 상태를 겪었다. 하지만 올해 1월 1일부터 동국제강 소속 정규직으로 채용됐다. 협력사 직원이었던 총 889명이 동국제강그룹 로고가 새겨진 근무복을 입게 된 것이다./김지호 기자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와 관련해 한국 사회 곳곳에선 조금씩 상생의 길을 찾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올해 1월 동국제강그룹이 사내 하도급 업체 20곳의 직원 889명을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한 것도 그중 하나다.

지난 18일, 동국제강 인천 공장에선 크레인 6대로 퍼 올린 고철(철 스크랩) 더미를 120t(톤)짜리 전기로에 투입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고철은 전기로에서 녹아 철강제품 원료인 ‘쇳물’이 된다. 이 크레인을 4조 3교대로 조종하는 24명도 올해 1월 1일 동국제강에 정규직 직원으로 입사했다.

이날 크레인을 타고 일한 강우섭(51)씨는 6년간 동국제강 협력사 2곳에서 일했다. 강씨 등 889명 중 적잖은 사람이 저임금과 복지가 부족한 상태에서 미래를 걱정하며 일해왔지만 정규직 전환으로 연봉이 평균 17% 올랐다. 주택 자금 대출이나 본인·가족 의료비 지원, 자녀 대학 학자금 지원 등 복지 혜택도 누리게 됐다.

동국제강의 사례는 이상적이지만 일반적인 해법은 될 수 없다. 직접 고용으로 원·하청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는 없고, 이를 모든 산업 현장에 적용하기도 어렵다. 불황이 닥쳤을 때 회사 경영에 중대한 부담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동국제강도 이 결정으로 매년 급여로 나가는 인건비만 100억원이 더 든다. 하지만 근로자들의 생산성을 높여 이 비용을 상쇄할 수 있을 거란 기대로 과감한 실험에 나선 것이다. 3개월이 지난 지금 현장의 유의미한 변화에 기업도, 노조도 희망을 걸고 있다.

전태일재단과 본지는 지난 5일부터 10회에 걸친 ‘12대88의 사회를 넘자’ 공동 기획을 통해 한국 사회의 노동시장 곳곳을 살폈다. 한국 사회를 근원적 위기로 몰고가는 저출산, 노후 빈곤, 양극화, 극단적 정쟁의 배후에는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문제를 해결해야 할 정치권은 이 문제를 정쟁에만 활용했다. IMF 외환 위기를 계기로 파생한 한국 노동시장의 각종 문제는 지금껏 그렇게 곪아 왔다.

이번 공동 기획에서 전태일재단은 10가지 제안을 우리 사회에 내밀었다. 재단은 “이 공동 기획을 계기로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개선하고 대한민국이 더 나은 나라가 되도록 노사정이 지혜를 모으길 바란다”고 했다. 본지는 앞으로도 재단이 제시한 제안이 한국 사회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취재와 보도를 이어갈 것이다.

동국제강 인천 공장에서 크레인 기사로 일하는 정지문(55)씨는 1991년부터 지금까지 33년간 인천 지역 공단의 하청 근로자로 일했다. 철강 대기업 협력사에서 주로 일했는데, 대기업이 협력사를 바꿀 때마다 생계가 흔들렸다. 2014년 크레인 기사 자격증을 딴 후 조금씩 전문성이 쌓였지만 넉넉지 않은 형편에 노후 고민이 늘 컸다. 그러던 그가 지난 1월 동국제강 정직원이 됐다. 정씨는 “이 회사 직원이라는 자부심이 정말 커졌다”고 했다.

2024년 3월 18일 오후 동국제강 인천공장에서 직원이 크레인으로 고철 분류작업을 하고 있다. 이 회사는 사내 협력사에서 직접고용으로 동국제강 본사 직원으로 전환된 직원들로 상생고용의 모범사례라고 볼수 있다. /김지호 기자

그는 작년까지만 해도 한 달에 연장 근무(추가 8시간)를 2~3회 했을 때 세후 250만~300만원을 받았다. 지금은 같은 일을 하고 400만원 안팎을 받는다. 그는 “더 감사한 일은 복지”라고 했다. 그의 첫째 자녀가 올해 3월 대학에 입학해 학비 마련이 걱정이었는데, 이 회사 정규직이 되면서 학비를 전액 지원받게 된 것이다.

최근 법원은 포스코, 현대제철 등 철강 업계 주요 기업의 하청 근로자들이 불법 파견돼 일해왔다는 판결을 잇달아 내렸다. 기업의 지시를 직접 받으면서 파견법에서 정한 제한 기간인 2년 넘게 일한 만큼 직접 고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포스코, 현대제철 등은 자회사를 만들어 이 판결 취지를 따랐다. 동국제강은 관련 소송이 제기된 적도 없지만 직접 고용으로 이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단기적으로는 연 100억원이 더 들지만 과감한 실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장기적으로는 더 나은 성과를 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동국제강 관계자는 “처음엔 다른 기업처럼 자회사를 만들어 그곳 정규직으로 돌리는 것도 고민했다”면서 “협력사 직원이 계속 바뀌고 고령화되는 하청의 어려움이 결국 회사의 업무 연속성이나 생산성을 해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직접 고용해 관리하는 게 나아 보였다”고 말했다.

동국제강 노조의 협조도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 직원들 사이에선 회사가 앞으로 비용 부담이 늘었다며 임금 인상을 꺼리거나, 복지를 줄일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결정 당시 이 회사 노조 관계자는 “노사가 대화와 타협을 통해 좋은 선례를 남기게 됐다”며 “노사 상생 전통을 지키고 회사의 도약을 위해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다.

그래픽=양진경

동국제강은 대신 “무임승차는 없다”는 원칙을 세웠다. 실제 성실하게 일해왔는지 보기 위해 경력 증명서를 확인했고, 서류·면접 심사를 꼼꼼히 거쳤다. 대상 직원 945명 중 미지원, 불합격을 제외한 889명이 정규직으로 전환되면서 사내 하도급 인원은 사실상 0(제로)이 됐다. 올해 공채 입사자 52명을 포함해 생산직 기준 직영 직원 수는 2750명이 됐다. 유일하게 외부에 맡기는 일은 전문 기술이 있는 업체만 할 수 있는 특화 영역인 축로(築爐·용해 또는 열처리용 노를 쌓는 일) 분야(98명 규모) 하나다.

정규직 전환 이후 약 3개월, 회사에선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이찬희 동국제강 인천 공장장은 “협력사만 하던 일을 이제 모두가 함께 하니 시너지가 나고 있다”고 했다. 우선 생산 효율이 좋아지고 있다. 동국제강 11년 차 제강팀 조빈수 차장은 “전기로는 여러 고철을 투입하는 비율이 생산성을 좌우하는데, 전에는 현장에서 즉각 조치를 요청하려고 해도 직접 지시하지 못하고 협력사 소속 반장을 거쳐야 해 시간이 걸렸다”면서 “이제는 현장에서 바로 대응할 수 있어 소통이 원활하다”고 했다.

현장을 잘 아는 협력사 출신 직원들이 과거보다 적극적으로 사각지대를 없애기 시작하면서 안전 고민도 줄고 있다. 또 동국제강이 직접 고용한다는 얘기가 퍼지면서 젊은 지원자가 이어지고 있다.

우려도 적지 않다. 100억원 비용을 상쇄할 만큼 생산성을 끌어올릴 수 있느냐가 가장 큰 과제다. 또 협력사 출신 직원과 기존 직원들이 제대로 융화되지 않으면 오히려 갈등이 빚어질 수도 있다. 과거 업무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정규직화가 비효율만 낳은 사례도 있었다.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20년 직고용된 한국도로공사 톨게이트 요금 수납원 1500여 명은 직무 재교육 없이 도로안전팀에 투입돼 청소 업무를 맡거나, 주거지에서 수백km 떨어진 원거리 발령이 나면서 또 다른 갈등을 빚기도 했다. 인천국제공항공사 보안 검색 요원의 정규직 과정에서 벌어진 ‘불공정 논란’도 있었다.

☞12대88 사회

12대88은 국내 전체 임금 근로자의 12%인 대기업 정규직(260만명)과 나머지 88%인 중소기업, 비정규직 근로자(1936만명)로 나뉜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상징한다.

<특별취재팀>

팀장=정한국 산업부 차장대우

이정구 산업부 기자, 조유미 주말뉴스부 기자, 김윤주 사회정책부 기자, 김민기 테크부 기자, 한예나 경제부 기자, 양승수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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