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리사학·부패권력 맞서 가시밭길 마다않은 불꽃같은 삶

한겨레 2024. 3. 21.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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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이상철 평화통일시민연대 상임고문 영전에 바치는 글

지난 18일 별세한 이상철 상임고문. 조호진 시인 제공

‘영원한 청년 시민운동가’ 18일 별세
재벌사 임원· 중소기업 시이오 거쳐
50대에 사회개혁 민주화 운동 투신
군포에서 지방권력 감시운동도 적극

유신 때 박정희 초상화 뗐다 해직고초
87년 평신도교회 새길교회 설립 앞장
좌든 우든 ‘위선적 처사’ 용납 안해

‘영원한 청년 시민운동가’ 이상철 선생님께서 3월18일 88살의 일기로 별세하셨습니다. 선생님의 삶을 기리는 추모 행사가 3월 20일 저녁 7시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렸습니다. 양길승 전국비상시국회의 상임대표, 정금채 리영희기념사업회 대표, 김영수 평화통일시민연대 지도위원 등 시민운동가들은 불의한 권력과 비리에 맞서 일전불퇴의 용기로 싸우셨던 선생님을 추모했습니다. 특히, 세종대 미대 해직 교수였던 김동우 전 교수는 “비리 사학 투쟁에 앞장섰던 선생님의 도움으로 복직할 수 있었다”면서 조각가인 자신이 선생님의 은혜를 갚기 위해 흉상을 만들어 선물한 일화를 들려주면서 선생님에 대한 감사와 그리움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선생님은 불의한 권력에 맞서 싸운 비타협 투사이셨지만 누구보다 따뜻한 어른이셨습니다. 가난한 삶을 선택한 시민운동가들에게 따뜻한 밥을 사주고, 여러 시민단체에 휴대용 앰프를 기증하셨으며, 일본 핵오염수 방류를 규탄하는 노란 우산 500개를 기증하고, 촛불 집회에 참석한 청소년들에게 방한 외투 50벌을 지원하는 등 선한 싸움에 나선 이웃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셨습니다.

경주에서 최 부자 다음으로 큰 부자였던 경주 이씨 부잣집 출신인 선생님은 재벌그룹 임원과 중소기업 최고경영자를 역임한 뒤 50대에 시민운동에 뛰어드셨습니다. 한 사립대학의 비리를 목격한 선생님은 ‘불법 카르텔’ 가담을 거부하고 공익제보자로 양심선언을 했다가 체포영장이 발부되는 등 고초를 겪으셨습니다. 이 대학의 사무처장이었던 선생님은 자신을 채용한 설립자가 대학 법인 재산을 유용하는 등의 비리를 저지르자 즉각 사직하고 고발했던 것입니다. 선생님은 친분보다 공익을 우선하면서 고초를 선택했습니다.

서슬 퍼런 유신 치하에서 대기업 전무이사였던 선생님이 시민운동가로 변신한 것은 해직 교수였던 한완상 서울대 교수와 어울리면서였습니다. 유신 말기였던 1978년 한 교수가 일독을 권유한 리영희·강만길 교수의 저서를 읽으면서 사상이 바뀐 선생님은 자신이 근무하던 기업에 한 교수를 고문으로 영입했고, 한 교수는 임원 대상으로 기업의 윤리와 노동자의 권리 등의 특강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독재자를 우상화하는 초상화를 두고 볼 수 없다면서 회사에 걸린 박정희의 초상화를 떼어냈다가 사찰하던 형사에게 걸리면서 선생님은 해직됐습니다.

선생님은 1987년 한완상과 이삼열 등 진보 신학자 및 교인들과 초교파 평신도교회인 ‘새길교회’ 창립에 앞장섰고, 선교부장이 되어서는 교회 헌금으로 해직교사 후원, 문익환 목사와 노동운동가 단병호, 민청학련 사형수 김병곤, 여성노동자회 이영순 등을 후원하면서 사회개혁 및 민주화운동에 투신했습니다.

군포시 비리진상규명 시민대책위 결성식에서 고인이 발언하고 있다. 조호진 시인 제공

선생님은 ‘한겨레신문’ 창간 주주로 언론 민주화에 참여하셨고, 참여연대 1호 평생 회원으로 시민로비단장을 맡아 부패방지법 제정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사립학교법개정운동본부’ 정책자문위원도 맡아 사학비리로 몸살을 앓던 동덕여대를 비롯해 영남대, 경문대, 서일대 등 분쟁사학 개혁에 앞장섰습니다. 또 ‘우리민족서로돕기’ 감사를 맡아 북녘 동포를 도왔으며, 평화통일시민연대 상임고문으로 통일 운동에도 앞장섰습니다.

경기도 군포로 이주하신 뒤에는 ‘군포시비리진상규명시민대책위원회’ 고문이 되어 지방 권력 감시 운동에 앞장섰으며 선생님이 거주하는 아파트에서 유치원 원장이 경비원을 폭행하는 갑질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언론에 알리고, 원장을 고발하고, 경비원의 산재처리를 도왔습니다. 유치원 원장이 선생님을 비롯한 시민운동가들을 명예훼손 등으로 고소하면서 대법원까지 가는 소송전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은 누구의 편도 아니었고 누구에게도 편이었습니다. 억울한 이웃이면 같은 편이 되어주셨고, 그가 약자이면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책임을 외면한 권력자들이 불의한 권력을 휘두르면 그가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종교 권력자든, 토호세력이든 맞서 싸우셨습니다. 같은 편이라 할지라도 ‘운동’을 팔고, 정의를 팔아서 권력을 차지하는 꼴을 보면 도저히 참지 못하시고 규탄하셨습니다. 그래서 외로우셨습니다. 적당히 싸우면서 제 몫을 챙기는 세태를 외면한 채 너무 꼿꼿한 비타협 투쟁을 하신 선생님은 외골수 취급을 당하기도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이 땅의 고질 병폐인 ‘패거리’를 거부했습니다. 좌든 우든, 진보든 보수든 패거리 지어 이익을 도모하는 이 세상에서 선생님은 홀로 가시밭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돈과 권력에 회유된 운동 권력의 딴짓을 보시고는 한 편이 되길 거부하셨습니다. 그들의 위선적 처사를 절대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신체적으로는 여든이 넘은 노인이셨지만 불의한 정권에 대한 분노는 그 어떤 청년보다 뜨거웠습니다. 노구를 이끌고 찬바람 부는 광장으로 당당하게 나가셨습니다.

지난 19일 선생님의 부고를 받은 밤, 선생님께서는 제 꿈속에서 밝고 환한 미소를 지으시면서 손을 흔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불꽃 같은 삶을 사신 이상철 선생님의 맑은 영혼을 인도하셨을 것으로 믿습니다.

조호진/시인·전 오마이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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