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이 없어 방에서 밥을 해 먹을 수 밖에”…주민 목숨 앗아간 쪽방촌 화재 현장 가보니

오동욱 기자 2024. 3. 21.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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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서울 중구 후암로의 쪽방촌의 한 방이 전날 발생한 화재로 검게 그을린 채 방치돼 있다. 오동욱 기자

“불이야! 빨리 나와!”

고함이 들리자 쪽방 주민 임명환씨(64)는 방문을 열었다. 연기가 복도에 자욱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숨이 막혔다. 기억에 의존해 복도 창문을 열었지만 1층까지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임씨는 더듬대며 방으로 돌아가 문을 닫고 연기가 빠지길 기다렸다. 임씨는 21일 경향신문 기자와 만나 화재 당시 상황을 설명하며 “불이 꺼졌다는 소방관의 얘기를 듣고서야 나왔다”고 했다.

서울 중구 후암로에 있는 5층 건물의 3층 쪽방에서 20일 오후 5시22분쯤 화재가 발생했다. 임씨처럼 건물 안에 있던 쪽방 주민 3명은 자력으로 대피했지만, 50대 이모씨는 숨지고 70대 김모씨는 얼굴에 3도 화상을 입었다. 지하층 주민을 제외한 3층과 4층, 5층에 사는 주민 15명은 근처의 다른 쪽방에서 밤을 보냈다. 사고 수습을 도운 남대문쪽방상담소가 “일단 잠이라도 자야 하지 않느냐”며 안내한 곳이었다.

화재가 난 서울 중구 후암로의 쪽방촌 건물의 3층에 21일 미개봉 상태의 화재안전키트가 걸려 있다. 키트 뒤에는 ‘화재대피용 숨수건’이라는 안내문이 붙여져 있다. 오동욱 기자
화재가 난 서울 중구 후암로의 쪽방촌 건물 방에 21일 먹다 남은 컵라면괴 빈 캔 등이 널려 있다. 오동욱 기자

21일 기자가 찾은 이 건물 3층 쪽방 복도는 암실처럼 검게 그을려 있었다. 복도 한쪽에는 미개봉된 화재안전키트와 ‘화재대피용 숨수건’이라고 적힌 안내판도 그을린 채로 벽에 붙어있었다. 계단과 가장 가까운 호실엔 먹다 남은 컵라면에 젓가락이 꽂힌 채 그대로 있었다. 화재 진압을 위해 개방된 창문 사이로 바람이 불어오자 매캐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불이 난 건물 바로 옆 쪽방촌에서 거주하는 정남애씨(75)는 “어제 사람이 날아갈 정도로 바람이 너무 많이 불었다”면서 “불꽃이라도 튀었으면 싹 다 탈 뻔했다”고 했다. “방이 다닥다닥 붙어있으니까 아무래도 불이 나면 무섭지.”

소방당국은 화재가 이동식 가스버너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판단했지만 사망한 이씨가 왜 가스버너를 썼는지는 파악하지 못한 상태다. 화재가 시작된 3층의 호실 방문엔 이동식 가스버너가 뼈대만 남은 채 걸려 있었다.

화재가 난 서울 중구 후암로의 쪽방촌 건물 내부에 21일 휴대용 가스레인지와 석쇠의 잔해가 남아 있다. 오동욱 기자

쪽방촌 주민들은 실내에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자주 사용한다고 했다. 임씨는 “쪽방에 주방이 따로 없어서 부탄가스 써서 방에서 밥을 해 먹는다”고 했다. 오랫동안 주민들을 지원해 온 김선주 중림사회종합복지관 생활지원사(57)는 “쪽방 주민에겐 식권이 나오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해먹을 땐 주방시설 등이 열악해서 방에서 가스버너를 이용하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추운 날씨 탓에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보온용으로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소방당국은 화재로 숨진 이씨가 ‘평상시 난방용으로 버너를 자주 사용했다’는 주변인 증언을 확보했다. 실제로 이씨가 살았던 4~5평 남짓한 방 안쪽에는 1㎡ 크기의 직사각형 구멍이 뚫려 있었다. 창이 있었던 자리다. 구멍 맞은편에는 바로 옆 건물의 붉은 벽돌이 보였다. 구멍 사이로 찬 바람이 들어왔다. 불이 나기 전 창이 있었을 때도 외풍을 막아주기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노숙인과 쪽방 주민을 지원하는 ‘2024홈리스주거팀’은 이날 긴급성명을 내고 “방 안에서 간이버너로 음식을 조리하는 원인 사건이 없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참사”라며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비적정 주거에 대해 강행력 있는 주거안전기준을 도입하고, 공공임대주택 확대 등 주거권을 보장하기 위한 실질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쪽방 화재로 임시 피신한 이들은 다시 불안한 마음을 추스르고 쪽방으로 향하거나 여인숙·모텔을 전전해야 한다. 화재수습을 돕는 박종태 남대문쪽방상담소장에 따르면 화재 피해가 적은 4~5층 입주자는 자신의 거주지로 돌아가고, 화재 피해가 큰 3층 입주자는 여인숙이나 모텔에 장기투숙할 예정이다. 사망한 이씨는 부검을 앞두고 있으며 가족과 연락이 닿지 않으면 무연고자 장례 절차를 따르게 된다.

오동욱 기자 5do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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