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꾸러기 세상에서 붓다와 예수가 보여준 것은

한겨레 2024. 3. 21.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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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파피야스여,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권속이여. 어둠의 아들아, 그대는 세속의 욕망으로 유혹해 나의 수행을 부수려 하지만 나의 서원은 결코 허물어뜨리지 못하리라. 내 이미 죽음의 고통을 삶과 같이 보아, 죽음의 두려움을 깨뜨린 지 오래이니라. 비록 모든 중생계가 다 멸해 없어져도 나의 서원은 멸하지 않으리.”

석가족의 왕자 자리를 버리고 거지꼴로 나란자 강가에 앉아 수행을 하고 있던 고타마 싯다르타는 자신을 유혹하는 마귀의 왕 마라 파피아스를 이렇게 꾸짖습니다. 불교 경전 ‘방광대장엄경’에서는 마치 마라라는 마귀의 실체가 따로 있는 양 적고 있지만, 마라 파피아스는 바로 싯다르타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그렇게 표현한 거겠죠. 마라는 계속해서 여러 가지로 유혹을 합니다. 아름다운 여인들을 보내기도 하고 18억명이나 되는 군대로 협박을 하기도 하고 싯다르타를 전륜성왕으로 만들어 중생을 구제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도 합니다. 마지막에는 마라 자신의 모든 권능을 내어주겠다고까지 합니다.

싯다르타는 당신 마음에 이는 색욕이며 권력욕, 명예욕, 종교적 욕심까지 다 털어버리고 마침내 깨달음을 얻게 되지요. 싯다르타가 수행을 하는데 최대 장애물은 바로 싯다르타 자신입니다. 이 ‘나’를 다 덜어낸 걸 불경에서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이죠.

그런데 깨달음을 얻은 이, 붓다는 그 후에도 다시 7일 동안이나 고민에 빠집니다. 어려운 깨달음의 이치를 사람들에게 전한들 알아듣기나 할 건가. 이 세상에 남과 구별되는 개체로 난 이상 나를 위해 사는 게 당연하지 어찌 나를 버리란 말인고,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럴 게 뻔하니까요. 경전은 이 고민을 역시 마라의 꼬임으로 표현합니다. 어차피 저 어리석은 중생들은 알아듣지도 못할 테니 중생 구제는 접고 붓다 당신은 어서 열반의 경지에 오르시라고 말이죠. 붓다는 마침내 이 고민을 넘어서서 중생들에게 이 도리를 전하기로 마음먹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세상 속으로 들어갑니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지요? 마태복음 4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다.”

40일을 굶으신 예수님께 유혹자는“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하고 꼬득입니다. 그 다음에는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라면서 천사들이 받쳐 주지 않겠냐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며 “당신이 땅에 엎드려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하고 유혹합니다. (마태 4,1-11)

하지만 예수님은 마음 속에 일어나는‘나’를 내세우려는 이 유혹들을 하느님만을 섬기라는 말로 떨쳐냅니다. 개체인‘나’를 넘어서서, 개체인‘나’들을 내신 전체이신 하느님께 귀의하라고 말입니다. 그럼으로써 개체 예수는 사라지고 하느님만을 온전히 드러내신 거죠.

그리고 붓다가 자신만의 열반을 마다하고 속세로 들어가셨듯이, 예수님께서는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옷은 빛처럼 하얘진, 그래서 베드로가 초막 짓고 살고 싶어 했던 높은 산을 내려와 욕심꾸러기‘나’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으로 돌아오십니다.

지난 연초에 야당 대표가 칼에 찔려 죽을 뻔한 사건이 벌어졌더랬습니다. 동영상을 보니 가해자는 온몸을 던져 힘을 실으면서 날카로운 칼로 목을 찌르더군요. 아무리 저와 생각이 다르다고 사람이 사람을 향해 어찌 저럴 수가 있을까. 그 뒤에 벌어진 일들도 그랬습니다. 칼날이 1밀리만 더 들어갔어도 죽었을 상황에서, 치료를 부산에서 받지 않고 왜 헬기를 타고 서울로 가는 특혜를 누렸느냐며 정치 문제화시키더니 치료한 서울 의사와 이송한 소방대원들을 상대로 고소까지 하더군요. 이런 잔인한 세상에 어디 아가들이 태어나고 싶겠나요.

픽사베이

노자(老子)는 이 욕심꾸러기 “나”들의 세상을 향해 이리 말씀하십니다.

“불상현 사민부쟁(不尙賢 使民不爭: 현명함을 떠받들지 않으면 사람들이 서로 저 잘났다고 싸우지 않을 것이요), 부귀난득지화 사민불위도(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얻기 어려운 물건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도둑질이 없을 것이라) ”

개체들로 태어난 이상 우리는 나를 위해 살기 마련입니다. 내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서로 싸우고, 돈이며 집이며 좋은 짝을 얻으려고 서로 죽어라 경쟁합니다. 이 세상 모든 싸움은 ‘내가 옳다’, ‘내가 가지겠다’, 이 두가지에서 비롯됩니다. 개인이건, 집단이건, 나라 사이건 다 마찬가지입니다. 개체들의 세상에서 이 싸움은 결코 끝이 나지 않을 겁니다. 바로 그래서 예수님도 붓다도 성스런 산속 초막에 머무르거나 열반의 경지에 오르는 걸 마다하고 이 어수선한 속세에 내려오신 거죠. 그리고 노자 말씀하신, ‘내가 너보다 잘났다, 내가 다 가져야겠다’를 그만두라고 가르치신 거죠. 사랑과 자비.

어제 출근길에 한강 다리 진입로를 눈앞에 두고 차들이 한없이 밀려서 30분을 기다리고 서 있었지요. 그런데 저 앞을 보니 차들이 옆 차선을 쌩쌩 달려와서는 계속 끼어들기를 하는 겁니다. 나도 모르게 욕설이 나왔지요. 사랑이고 자비고는 간데없이 말입니다. 저 얌체 같은 놈들이 내 시간을 빼앗아 가는구나. 저놈들이 사회 규칙을 무시하는구나. ‘일종의 정의감에서 비롯된 성냄?’이라고 나 스스로에게 변명하면서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한 세상을 내시고 물리적 생물학적 진화를 통해 인간이란 종이 이 세상과 자신을 넘어선 전체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셨으니 우리는 누구나 나를 버림으로 전체에 귀일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남는 어려움, 이 개체로 살아가는 동안은 ‘나’라는 한계를 넘어설 수가 없다는 거지요, ‘내가 옳고 내가 가져야’ 살아갈 수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당신께서는 모습이 성스럽게 변모하셨음에도 산에서 내려와 이 험한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세우자고 나서신 거죠. 마음이 가난한 이, 슬퍼하는 이, 온유한 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이, 자비로운 이, 마음이 깨끗한 이, 평화를 이루는 이들은 행복하다고 가르치신 거죠.

돈오돈수(頓悟頓修). 불교에는 단박에 깨닫고 단박에 닦는 거니 제대로 깨달으면 더 이상 닦을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절대의 경지에서 맞는 말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세상에 뿌리박고 사는 개체들로서, 자신을 버리고 깨달았다 해도 이웃과 경쟁하며 이 한목숨 부지하는 처지에서는 끊임없이 닦고 또 닦아야겠지요. 그래서 돈오점수(頓悟漸修)라, 단박에 깨달은 후에도 계속해서 닦아야 한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나를 버리는 일은 절대 세계의 일이고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 일은 상대 세계의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두 가지 일이 결국은 하나임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나를 버리고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 일은 하나입니다. 사랑과 자비.

글 김형태

*이 시리즈는 김형태 변호사가 발행하는 격월간 공동선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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