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死학’… 국가안보도 위험하다[Global Focus]

박상훈 기자 2024. 3. 21.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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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lobal Focus - 美 역사학 전공자 급감하며 국방부 인재 고용도 타격
인문학 기피 등에 역사학 외면
美 주요대학 예산 삭감 잇따라
학사·대학원 과정 폐지한 곳도
2010년이래 교수 3분의1 감소
FP “역사학, 안보와 밀접 관련”
국방부, 학자 300여명 고용해
군사교육·부대운영 등에 활용
게티이미지뱅크
美육사 역사학과서 가르치는 고대전쟁 전술·전략 프리드리히 대왕(프로이센)의 로이텐 전투 상황도(위 사진)와 알렉산더 대왕(마케도니아)의 이수스 전투 상황도. 자료 = 미 육군사관학교 역사학과

“우리 부대에 전투를 60회나 치른 노새가 두 마리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노새다.”

프로이센을 유럽 강국으로 일으킨 프리드리히 대왕은 훌륭한 전략가가 되기 위해서는 실전 경험이 중요하지 않냐는 한 장교에게 전쟁사 공부가 중요하다고 일갈했다. 최근 인공지능(AI) 열풍 등 첨단기술이 국가안보의 핵심으로 자리 잡으면서 대표적인 인문학인 역사학이 외면받는 상황에 경고음이 들어왔다. 알렉산더 대왕이나 한니발 장군, 율리우스 카이사르, 프리드리히 대왕, 나폴레옹 등 역대 최고 장군들의 전술·전략을 공부하는 역사학을 구식 학문으로 취급하는 역사학의 위기가 국가안보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교육이 줄어들면 정책결정자와 보좌관들의 역사적 지식이 줄어들 뿐 아니라, 선거 등을 통해 국가안보 전략에 간접적으로 개입하는 일반 대중의 역사의식도 저해돼 핵심 국가안보 결정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인문학 기피에 위기 맞은 역사학 = 미국 정치전문매체 포린폴리시(FP)는 최근 미국의 역사학이 위기에 빠졌다고 지적했다. 주요 대학에서 역사학과에 대한 예산이 삭감되며 은퇴하는 역사학 교수들이 새로운 학자들로 대체되지 않고, 이로 인해 역사학을 전공하려는 학생들의 수도 급감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 중서부에 위치한 대학의 역사학과를 대상으로 한 2022년 연구 결과에 따르면 2010년 이래로 역사학과 교수 수가 3분의 1가량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휠링 예수회 대학 등 일부 대학은 역사학과 자체를 폐지했으며, 털사대 등은 대학원 과정을 없애기도 했다. 대학들이 역사학과를 축소하며 박사 학위를 취득한 역사학자가 설 자리 역시 없어지고 있다. 역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졸업생이 졸업 후 4년 내에 종신 재직권이 보장되는 교수직에 임용되는 비율은 2013년 54%에서 2017년 27%로, 2022년엔 10%로 급감했다. 이러한 현상은 역사학을 전공하고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자 하는 학생 수 감소를 불러왔고, 이는 일반 국민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역할을 맡고 있는 초·중·고 역사교사 수 감소로도 이어졌다.

역사학의 위기는 대학생들의 ‘인문학 기피’ 현상과도 무관하지 않다. 실제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 대학생들은 졸업 후 고액 연봉이 보장되는 전공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이에 역사학을 포함한 인문학 전공의 경우 신입생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대학생들의 ‘인문학 기피 현상’은 각 대학이 역사학과 예산을 삭감하고 교수를 추가로 임용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에 사용됐다.

2003년 이라크 전쟁 당시 미 육군 101공수사단 장병들이 사담 후세인의 아들이 숨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에 토우(TOW) 대전차 미사일을 발사하고 있다. 미 국방부 제공

◇역사학 위기와 함께 찾아오는 국가안보 위기 = 포린폴리시는 역사학이 국가안보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고 지적했다. 실제 미 국방부는 사관학교나 전문 군사교육을 위한 사무교육부터 부대 운영상황 기록·분석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수의 역사학자들 고용해오고 있다. 국방부는 박사 학위를 취득한 역사학자를 300명 이상 고용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되며, 미 국무부 역시 다수의 역사학자를 고용해 이들이 가진 여러 국가의 역사적 지식을 정책 입안에 활용하고 있다.

포린폴리시는 이처럼 군이 많은 수의 역사학자를 고용하는 것은 놀랍지 않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과거 나폴레옹은 훌륭한 지휘관이 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알렉산더, 한니발, 카이사르 등의 작전을 반복해서 정독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투키디데스, 폴리비오스 등 군 경력을 가진 고대 역사학자들 역시 미래의 장교를 훈련시키는 최고의 방법으로 역사교육을 꼽은 바 있다.

미국의 군사 교리도 역사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2007년 이라크에 주둔하는 미군 병력을 대폭 증가시킨 결정은 20세기 영국이 말레이 반도에서 성공을 거뒀던 대반란(counter-insurgency) 전략에 영향을 받았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헤쳐나간 존 F 케네디 전 미 대통령도 당시 바바라 터크먼의 저서 ‘8월의 포성’에서 얻은 교훈을 참고한 것으로 전해졌다.

포린폴리시는 미국이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철저한 역사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역사학의 위기가 국가안보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 정부에 고용되는 역사학자의 수가 줄어들고 있을 뿐 아니라, 역사학자들이 연구를 통해 출판하는 논문과 저서가 줄어들어 정책결정자와 보좌관들이 현명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참조해야 하는 자료 역시 사라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일반 대중에 대한 역사교육 역시 약화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우려가 나온다. 미국과 같은 민주주의 국가는 일반 대중이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선출함으로써 국가안보 정책에 대한 간접적 결정을 내리기 때문이다. 이에 대중의 역사의식을 함양하는 데 실패하면 국가 경쟁력 자체가 쇠퇴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미국인, 역사는 공학만큼 중요하다 인식 = 다만 역사학의 위기는 아직까지 극복 가능한 문제로 여겨진다. 첫 번째 근거로는 아직 미국 국민이 역사교육을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인 84%는 역사가 경영학이나 공학만큼 중요하다는 데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두 번째 근거는 역사학의 위기가 불가항력적 시장 원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정책에 의한 위기라는 점이다. 이에 포린폴리시는 정책 변화를 통해 위기를 타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실제로 역사학 등 인문학 연구를 지원하는 미국국립인문재단이 운용하는 예산은 미국국립과학재단 예산(98억8000만 달러·약 13조2293억 원)의 2%에 불과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AI 등 첨단기술 연구에 사용되는 예산의 일부만이라도 역사학 등 인문학에 투자하는 것이 국가안보 향상에 기여하는 방안이라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박상훈 기자 andrew@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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