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21일!] "이봐, 해봤어?"… 개천에서 용났던 그 시절 회장님
정주영 현대그룹 초대 회장은 대한민국 기업계의 전설로 통한다. 정 회장은 대표적인 1세대 기업인으로 밑바닥에서 시작해 대한민국 최고 부자 자리까지 올라온 자수성가의 아이콘이다.
정 회장은 1990년대 정계에 진출한 적이 있지만 낙선한 후 1998년 소떼를 이끌고 방북한 것을 계기로 금강산 관광 등을 유치한 대북 사업의 선구자로 활동했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정 회장의 말은 그의 인생을 함축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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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일이 너무 싫었던 정 회장은 결국 아버지가 소를 판 돈 70원을 훔쳐 서울로 가출했다. 아들을 찾으러 간 아버지는 "서울에는 대학 나온 사람도 많은데 너처럼 초등학교 밖에 못 나온 사람이 뭘 할 수 있겠냐. 그냥 농사짓자"고 눈물로 설득했다. 하지만 정 회장은 그런 아버지를 뿌리치고 결국 서울에 정착했다.
정 회장은 건설 현장에서 돌을 나르거나 엿 공장에서 일하고 쌀가게에서 청소하고 배달하며 거의 한순간도 쉬어본 적 없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당시 정 회장의 나이는 19세였다. 돈을 모은 정 회장은 23세 때 자신의 쌀가게를 차렸다. 하지만 일제가 쌀 배급제를 실시하면서 가게 문을 닫아야 했다.
정 회장은 돈을 빌려 '아도 서비스'(ART SERVICE)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인수했다. 잘 되는 것 같았던 공장은 20일 만에 불이나 빌린 돈을 다 날리고 수리 중인 자동차에도 불이 옮겨붙어 막심한 손해를 입었다. 하지만 정 회장은 좌절하지 않고 처음 돈을 빌려준 사람을 찾아가 "한 번만 돈을 더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다시 한번 돈을 빌린 정 회장은 재기했다.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 정비공장을 세운 정 회장은 1947년 현대토건을 창업했다. 현대토건은 지금의 현대건설로 현대그룹의 모태가 되는 회사다. 현대토건은 당시 한강에서 제일 오래된 인도교인 한강대교 복구공사를 맡아 성공시켰고 미군정 시기에 미군 관련한 공사를 거의 도맡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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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1968년 현대건설은 국토 대동맥이라 불리는 경부고속도로 첫 구간 공사에 성공했다. 이외에도 발전소, 댐, 대한민국 아파트의 상징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까지 수많은 건물을 만든 현대건설은 2019년 해외사업 매출 기준 국내 1위를 기록했다.
현대건설이 중견기업으로 거듭나며 1971년 정 회장은 조선소를 건립하기 위해 유럽으로 향했다. 차관 때문이었다. 정 회장은 관계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한국 돈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 뒷면에 그려진 거북선을 가리키며 "이것 봐라. 우리가 영국보다 300년 먼저 철갑선을 만든 민족이다"고 설득해 1억달러를 빌리는 데 성공했다.
이에 더해 조선소 하나 없이 그리스로부터 26만t급 유조선 2척을 수주했다. 결국 2년3개월 뒤인 1974년 울산 조선소가 완공됐다. 그렇게 만들어진 현대중공업은 우리나라 경제 상징이자 세계 최고의 조선사가 됐다.
1982년 4월 정 회장은 충남 서산 천수만 지역에 간척지 공사를 시작했다. 간척지 공사 성공으로 대한민국 영토는 여의도 면적의 33배에 달하는 4700만평이나 늘어났다. 서산 간척지는 염분을 뺀 뒤 농지로 만들었다.
이후 정 회장의 관심사는 온통 서산농장이었다. 정 회장에게 서산농장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자 존경심이었기 때문이다. 말년에 정 회장은 파란 벼로 뒤덮인 농장을 바라보며 "그 옛날 손톱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한뼘 한뼘 농토를 만들어 가며 고생하셨던 아버지에게 그 농장을 꼭 바치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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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향민이었던 정 회장은 소를 몰고 고향인 북으로 가보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그러던 중 김대중 정부가 출범했고 대북 햇볕정책이 시작됐다. 정 회장은 그토록 기다리던 꿈을 이루기 위해 소떼 방북을 계획했다.
1998년 6월15일. 당시 83세였던 정 회장은 소 떼 1001마리를 이끌고 휴전선을 넘었다. 휴전 이후 첫 민간인 공식 육로 방문의 길이 열린 것이다. 소감을 묻는 질문에 정 회장은 "우리 고향 쪽을 가니까 반갑다"며 설레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7박8일 동안 정 회장은 금강산을 관광하고 친척과 상봉하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낸 후 처음 갈 때와 마찬가지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돌아왔다. 이후 정 회장은 금강산 관광 사업권을 유치해 금강산관광의 물꼬를 텄고 개성공단 건설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2001년 3월21일. 정 회장은 통일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정 회장의 빈소에는 분단 이후 최초로 북한 조문단이 찾아왔다. 소떼 방북은 불과 20여년 전 일이지만 정치적 상황과 별개로 '이런 일이 가능했던 시절이 있었다'와 같은 독특한 역사적 사건으로 우리 기억 속에 남아있다.
한국의 경제성장을 주도하고 국내 최대 대기업을 이끌었던 정 회장은 대표적인 입지전적 기업가로 국내외에 이름을 널리 알렸다. 어려운 일에 부딪혔을 때 임직원들에게 "이봐, 해보기는 했어?"라고 되물었다는 정 회장의 불굴의 의지는 지금껏 회자되고 있다.
차화진 기자 hj.cha9@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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