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다는 법이, 나를 2년마다 내쫓습니다

특별취재팀 2024. 3. 21.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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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재단-조선일보
창간 104주년 공동 기획
‘12대88의 사회를 넘자’
[9] 정착 못하는 기간제 근로자
지난 13일 어린이집 기간제 보조교사 채아영(가명)씨가 서울 소재 한 대형 마트 장난감 판매대 앞에서 과거 유아용 장난감 회사에서 일했던 당시를 떠올리고 있다. 채씨는 그곳에서 기간제 근로자로 일하다 최근 그만뒀다./장련성 기자

서울에 사는 송하연(29·가명)씨는 지금 다니는 직장이 7년 전 그가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 세 번째 회사다. 세 곳에서 모두 기간제 근로자로 일했다. 지금 월급은 240만원. 7년 전보다 40만원 올랐다.

올 연말엔 네 번째 직장을 알아봐야 한다. 지금 회사에서 일한 기간이 2년이 되기 때문이다. 월 50만원 적금도 넣다가 포기한 그는 결혼이나 출산 등 미래를 생각할 여유가 없다. 그는 “2년마다 실직과 구직을 반복하는 불안한 상황에서 장기적인 진로는 생각도 못한다”며 “우리 사회가 한 직장을 좀 더 오래 안정적으로 다닐 기회를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2007년 시행된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기간제법)은 한 회사에서 기간제 근로자를 2년 넘게 쓰지 못하게 한다. 정규직으로 전환을 하라는 취지다. 그 후 17년, 일부 기간제는 이 법에 따라 정규직이 되었지만 다수 기업에선 ‘2년’이 그 회사에 다닐 수 있는 최대 기간이 됐다. 기업들은 인건비 부담에 2년마다 새 기간제를 뽑는다고 말한다. 송씨 같은 기간제 근로자는 작년 481만명에 달한다.

모두가 정규직인 사회는 누구나 원하지만 실현 가능하지 않다. 이 법을 고쳐보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정부와 노동계 대립 속에 무산됐다. 전태일재단은 “더 이상 이 문제를 방치하지 말고 노사정 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기간제 2년’ 문제를 공론화하고 재검토할 것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송하연씨는 지난 2017년 입사한 첫 직장에선 2년간 부서 업무 관련 영수증을 회계 처리하고 협력사에 보내는 서류 양식을 만들었다. 두 번째 직장에서도 비슷한 일을 했다. 건설업계의 한 기업이었는데, 이 회사가 맡은 공사가 길어져 3년을 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기간제법은 ‘사업의 완료에 필요한 기간’인 경우 기간제 근로자가 2년을 넘겨 일할 수 있게 허용하는데, 이 조항의 적용을 받은 것이다. 지금 직장에서는 기업 임원 사무실의 비서 역할을 한다. 과거와 같은 비용 처리와 일정 관리 업무를 하고 있다.

송씨는 지금 직장에서 월 240만원을 받고 있다. 지금 회사에 들어올 때도, 앞선 직장에서도 경력을 인정받아 연봉이 오른 적은 없다. 최저임금보다 좀 더 높은 수준이 늘 그의 월급이었다. 송씨는 “점심은 회사 구내식당에서, 저녁은 회사에서 복지로 싸게 파는 간편식으로 때운다”며 “전세금 대출 이자 등 주거비로만 100만원 이상이 나가고, 이 일자리마저 올해면 끝나니 결혼 같은 먼 미래는 계획할 여유가 없다”고 말했다.

2007년 7월 기간제법 시행 이전에는 기간제 근로자 계약 기간은 최대 1년이었다. 하지만 이 계약을 여러 번 갱신하는 걸 제한하는 규정이 없어, 다수 기업은 기간제 근로자를 제약 없이 고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기간제법은 계약을 여러 번 해도 총 근무 기간을 2년 이하로 제한한다.

이 법 덕분에 정규직 또는 무기계약직이 돼 불안정한 상황에서 벗어난 이들도 있지만, 2년마다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도 생겼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기간제 근로자는 2006년 전체 임금 근로자 1542만명 중 274만명(18%)이었지만 작년엔 전체 2195만명 중 481만명(22%)으로 더 늘었다.

그래픽=양진경

일상에서 겪는 차별도 있다. 본지가 만난 기간제 근로자들은 “어차피 2년 뒤면 떠날 사람이라는 인식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일도 많았다”고 했다.

서울에 사는 채아영(29·가명)씨도 이전 직장에서 그런 일을 겪었다. 지난 2020년 한 유아용 장난감 등을 만드는 회사에 기간제로 입사했다. 월급 240만원쯤이었다. 임금이 낮은 건 각오했지만 ‘보이지 않는 벽’이 그를 힘들게 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직원들끼리 대화를 하다가도 채씨가 지나가면 갑자기 입을 다물거나 “당신은 안 들어도 되는 얘기야”라고 말하는 식이었다. 같은 프로젝트에 참여했는데도 채씨 몫의 상여금은 정규직에 비해 적었다.

채씨는 결국 2년도 안 돼 퇴사했고 지금은 방송통신대에서 학위 공부를 하며 어린이집에서 기간제 교사로 일한다. 그는 “기간제로 설움을 겪고 보니 시간이 좀 걸려도 학력을 높인 후 취업 준비를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영어 번역 프리랜서로 일하는 우모(29)씨는 기간제 계약을 한 회사를 그만두면서 퇴직금 한 푼 받지 못했다. 퇴직금은 1년 이상 계속 근로해야 지급되는데, 우씨 계약 기간은 11개월이었기 때문이다. 우씨는 “처음엔 계약을 11개월씩 하자고 해 왜 그런가 했더니 퇴직금을 안 주려는 꼼수였다”고 했다.

기간제 근로자들은 부당한 대우를 겪어도 호소할 곳을 찾기 어렵다. 기간제 근로자도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는 있지만 계약이 연장되지 않을까 두려워 노조 가입을 꺼린다. 또 불만이 있어도 관련 업계에 소문이 나면 2년 뒤 다음 직장 취업이 어려워질까 봐 이의 제기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12대88 사회

12대88은 국내 전체 임금 근로자의 12%인 대기업 정규직(260만명)과 나머지 88%인 중소기업, 비정규직 근로자(1936만명)로 나뉜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상징한다.

<특별취재팀>

팀장=정한국 산업부 차장대우

조유미 주말뉴스부 기자, 김윤주 사회정책부 기자, 김민기 테크부 기자, 한예나 경제부 기자, 양승수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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