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카맣지만 시원해…오키나와 술자리 마지막엔 이 해장국 '이카지루(오징어 국)'
- 프로야구 전지훈련지 사랑받는 이토만시
- 오키나와 본섬 최남단, 어업이 주력 업종
- 작은 주점서 마주한 향토 요리 ‘이카지루’
- 강렬한 검은빛, 맛은 우리네 ‘오징어뭇국’
- 이방인의 술값도 기꺼이 내주는 호탕함
- 매월 곗돈 모아 한 사람 주는 ‘모아이’문화
- 흥 많고 정 많고 다정한 부산과 닮았네요
“다 먹고 나면 이가 새까맣게 물들지도 몰라요.”
투명한 하늘과 에메랄드빛 바다, 거리에 늘어선 야자수와 시사(シ-サ-·오키나와 수호 동물) 조각상들. 부산에서 비행 편으로 약 2시간 떨어진 ‘동양의 하와이’ 오키나와에서 느끼는 남국 정취다.
일본 최남단에 있는 오키나와는 연평균 기온 20도 이상인 아열대 기후를 자랑한다. 물놀이를 즐길 수 있는 여름이 관광 성수기에 해당하지만, 한겨울에도 평균기온 15도 안팎 온난한 날씨를 보이는 만큼 비수기에는 스포츠팀의 전지훈련지로 사랑받는다. 올해도 일본 프로야구 구단은 물론, 롯데자이언츠와 삼성라이온즈, 기아타이거즈 등 국내 프로야구 구단이 훈련을 위해 오키나와를 찾았다. 지난달 21일부터 28일까지 국내외 프로야구팀 스프링 캠프를 취재하고자 니시자키 구장이 위치한 이토만시를 다녀왔다.
# 우민츄의 고향 ‘이토만시’
“이유콘쵸라니?(イユ、コ-ンチョ-ラニ-·오키나와 말로 ‘물고기 사실래요?’라는 뜻)”
이토만시는 오키나와 본섬 최남단에 자리한 시로, 우민츄(海人·오키나와 말로 어부를 뜻함) 마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오키나와현의 전통적인 어장이다. 어업 말고도 오키나와현 내 이름난 농산지로서 사탕수수 생산과 화훼 재배가 활발하다.
어부의 마을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마을 곳곳에서는 생선을 파는 시장 상인과 다양한 해산물 요리를 취급하는 어민 식당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다. 예전에는 남성들이 ‘사바니(サバニ)’라고 불리는 전통 배를 타고 생선을 잡아오면, 여성들이 물고기를 가득 담은 바구니를 머리에 얹고서 “이유콘쵸라니 (イユ、コ-ンチョ-ラニ-)”라고 외치며 나하 시장까지 걸어가는 풍경이 펼쳐졌다고 한다.
# 이가 까맣게 물들어요, ‘이카지루’
프로야구 스프링캠프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숙소 인근 작은 이자카야(일본의 요리 주점)를 마주했다. 어둠 속 붉은빛을 발하는 붉은 등에 홀린 듯 들어섰다. 간판에 새겨진 ‘이카지루(いか汁·오징어 국)’라는 생소한 메뉴가 호기심을 자극했다.
낡은 미닫이문을 열고 가게로 들어서자, 단골손님들이 이름을 써 맡겨놓은 술들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관광객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점포 안은 취기가 오른 현지인들 목소리만이 가득했다. 남동생과 함께 18년째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는 에츠코 씨에게서 이카지루라는 요리의 유래에 관해 들을 수 있었다. 에츠코 씨는 “이카지루는 신선한 흰오징어를 재료로 하는 오키나와의 향토 요리다. 자양 강장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이토만시에서는 일반 가정이나 음식점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잠시 후 음식이 등장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강렬한 검정 빛의 국. 그 외엔 흰 쌀밥과 단무지뿐인 소박한 구성이다. 국물이 워낙 검으니, 먹고 나면 이가 새까맣게 물드는 건 아닌지 물었다. 에츠코 씨는 “다 드신 직후에는 이가 잠깐 까맣게 물들지도 모른다. 꼭 충치가 생긴 것 같은 모습 때문에 식사 후에 바로 양치를 하는 손님들도 종종 있다”라고 들려주며 웃었다.
예사롭지 않은 첫인상. 그런데 그 맛은 의외로 친숙했다. 매콤한 향이 없다는 차이 외에는 한국의 오징어뭇국과 닮았다. 다만 오징어의 향은 훨씬 깊게 느껴졌다. 일본의 해장 문화인 ‘시메(締め)’에 관한 소개도 들을 수 있었다. 에츠코 씨는 “일본에서는 술자리가 끝난 당일 마무리로 해장 음식을 먹는 ‘시메(締め·마무리)’ 문화가 있다”며 “라멘이나 우동을 먹는 게 보통이지만, 오키나와에서는 이카지루 또는 또 다른 향토 요리인 야기지루(やぎ汁·염소 국)를 시메로 먹는다”고 알려줬다. 술 먹은 다음 날 별도로 해장을 하는 경우가 많고, 해장국으로 오징어나 염소는 좀체 즐기지 않는 한국과 달라 흥미로웠다.
오키나와현 이토만시에 위치한 ‘이카지루캇짱(いか汁かっちゃん)’의 이카지루는 소(小) 1200엔(한화 약 1만2000원), 대(大) 1600엔(한화 약 1만6000원).
# 오키나와의 계모임 문화 ‘모아이’
“혼자서 여행하러 오셨어요?” 테이블 건너편 손님이 말을 건네온다. 이토만시 출신으로 운송업에 종사하는 카즈 씨는 “이 가게를 자주 찾는 단골”이라고 했다.
카즈 씨와 에츠코 씨에게서 오키나와의 계 모임 문화인 ‘모아이(モアイ)’에 관해 들을 수 있었다. 모아이는 한국의 계모임 또는 품앗이와 비슷한 문화다. 그 원형은 18세기 이전 오키나와를 류큐 왕조가 다스리던 시대에도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개 모아이 운영 방식은 다음과 같다. ①구성원들 간 매월 저축할 금액과 이달의 오야(親·부모를 뜻하는 낱말로 모아이에서는 총무 역할을 일컫는다)를 정한다. ②오야는 해당 월의 모임 장소를 마련해 술자리를 열고 회원들의 돈을 걷는다. 저축액은 5000엔(한화 약 5만 원)에서 3만엔(한화 약 30만 원) 수준이 일반적이다. ③이렇게 모인 곗돈은 해당 월의 오야가 갖는다. ④매달 한 사람씩 오야를 번갈아 맡으며 위의 과정을 반복한다.
에츠코 씨는 “도움이 필요한 모아이 구성원이 먼저 곗돈을 받는 다스케모아이(助けモアイ·도움 모아이), 일정 기간 저금한 뒤 다 같이 여행을 떠나는 형태 등 모아이가 운영되는 모습도 각양각색”이라고 설명했다. 멤버 구성도 다양하다. 고교 친구들이나 동네 주부들의 모임, 직장동료 간은 물론 다양한 직종이 모이는 비즈니스 모아이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카즈 씨는 “모아이가 운영되는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결국 그 목적은 매달 한 번씩 친구들과 술 한잔하며 서로의 삶을 공유하는 데 있다”며 “일본의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문화지만 오키나와에서는 대부분 사람이 각자의 모아이가 있을 만큼 자연스러운 문화”라고 덧붙였다.
# 한국과 닮은 오키나와의 ‘정(情)’
에츠코 씨, 카즈 씨와 셋이서 한바탕 이야기꽃을 피운 끝에, 가게 영업이 끝나는 밤 11시가 돼서야 주점 문을 나섰다. 음식값을 계산하려 하자 카즈 씨가 대신 지갑을 꺼낸다. 한사코 만류해도 “다음에 만나면 동생이 한턱 내라”며 에츠코 씨에게 내 음식값을 함께 쥐여준다. 손을 흔드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문득 오전 야구장에서 만났던 한 한국인 관중과 나눈 짧은 대화가 떠올랐다. 10년 넘게 오키나와에 거주하는 중이라는 그에게 오키나와에 살기로 결심한 이유를 물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술도 잘 마시고 흥도 많지만, 특히 정(情)이 많아요. 제 남편도 오키나와 출신인데 다정한 성격이거든요. 일본 본토보다 오히려 한국과 정서적으로 더 닮은 면이 있는 것 같아요.”
글·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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