핍박 속에서 살아남은 아일랜드인들의 자부심…제임슨 [김지호의 위스키디아]

김지호 기자 2024. 3. 21. 00:0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 주위에 위스키를 좋아한다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입맛은 제각각이고 위스키 종류는 수천 가지. 본인의 취향만 알아도 선택지는 반으로 줄어듭니다. 주정뱅이들과 떠들었던 위스키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려고 합니다. 당신의 취향은 무엇인가요?

위스키디아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275747

1608년, 세계 최초로 공식 증류를 시작한 아일랜드의 부시밀스 증류소. /bushmills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사이에 해묵은 ‘원조논란’이 있습니다. 누가 먼저 위스키를 만들었는지를 두고 수 세기 전부터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지요. 기록에는 없지만, 아일랜드의 수호성인 ‘성 패트릭(Saint Patrick)’이 5세기 무렵 아일랜드에 증류 기술을 전파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아이랜드에서는 매년 3월 17일 녹색 옷을 입고 술을 마시고 즐기며 성 패트릭 데이를 기념하죠. 하지만 딱히 당시 상황을 증명할 길은 없어서 스코틀랜드인들에게는 별 감흥 없는 이야기로 들릴 수 있습니다. 하나 확실한 것은 1608년, 세계 최초로 공식 증류를 시작한 증류소가 아일랜드의 부시밀스 증류소라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4세가 ‘존 코’ 수사에게 8볼(고대 측정 단위)의 맥아로 위스키를 만들라고 지시한 문건. /위키피디아

스코틀랜드에는 1494년 정부가 세금을 징수하던 장부에서 위스키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국왕이자 독주 애호가로 알려진 제임스 4세가 ‘존 코’ 수사에게 8볼(고대 측정 단위)의 맥아로 위스키를 만들라고 지시한 문건이 존재했던 것이지요. 이는 당시 약 500kg이 넘는 맥아에 해당하며 위스키 약 1500병을 만들 수 있는 양이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존 코가 실제로 증류를 집행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궁중에서 위스키가 대량으로 생산됐다.’ 정도는 사실로 보입니다.

양국의 가장 신빙성 있는 위의 두 자료를 통해 정리하자면, 최초로 곡물을 증류한 것은 스코틀랜드였지만 증류소를 짓고 먼저 수익을 창출한 곳은 아일랜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스카치와 아이리시 위스키의 차이점

아일랜드에서는 스카치와 차별화를 두기 위해 위스키의 영문 표기법을 다르게 합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Whisky’로 표기되지만 아일랜드에서는 알파벳 ‘e’가 하나 더 들어간 ‘Whiskey’로 작성됩니다. 한때 더 잘나가던 아일랜드가 19세기 무렵 위스키의 품질이 고르지 못했던 스카치와는 확실한 거리를 두고 싶었던 것이지요.

스카치와 아이리시 위스키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몇 가지 있습니다. 보통 스카치는 ‘맥아’를 원료로 사용하는 반면, 아일랜드 위스키는 맥아뿐만 아니라 발아되지 않은 보리와 호밀, 옥수수 같은 곡물을 추가로 사용합니다. 스카치로 치자면 블렌디드 위스키에 해당하는 셈입니다. 생보리의 사용은 18세기, 영국 정부가 아일랜드 위스키의 몰트 사용량, 즉 맥아에 세금을 부과한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세금을 덜 내기 위한 수단으로 생보리를 사용했지만, 이제는 아이리시 위스키만의 특징으로 고착된 것이지요. 이는 한때 식민 지배국이었던 영국에 대한 대항 의식으로 볼 수 있으며, 핍박 속에서 살아남은 아일랜드인들의 자부심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증류 방식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스카치는 단식 증류기로 2회의 증류를 통해 스피릿(Spirit: 증류액)을 얻지만, 아이리시 위스키는 3회에 걸쳐 스피릿을 뽑아냅니다. 여러 차례의 증류 과정은 스피릿의 풍미를 더 가볍고 부드럽게 합니다. 결정적으로 아일랜드에서는 맥아를 건조할 때 피트(peat: 이탄. ‘석탄화’가 되지 못한 습지에 축적된 풀이나 이끼 등의 퇴적물) 대신 석탄을 사용합니다.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독특한 훈연향보다는 달콤하고 고소한 곡물 향에 비중을 둔 것입니다.

◇아일랜드인의 소주 제임슨

아일랜드인의 소주로 불리는 제임슨(Jameson) 위스키. /김지호 기자

아이리시 위스키를 이야기할 때 아일랜드인의 소주로 불리는 제임슨(Jameson)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세계적인 위스키 평론가 짐 머레이가 아이리시 위스키 부문에서 95점을 준 제품이기도 합니다. 40%의 알코올 도수를 느낄 새도 없이 목 넘김이 부드럽고 편안해서 위스키 입문자들에게도 부담이 없습니다. 입에 대자마자 꿀과 바닐라 맛이 첨가된 순한 소주를 마시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제임슨은 40%의 알코올 도수를 느낄 새도 없이 목 넘김이 부드러워서 위스키 입문자들에게도 부담이 없습니다. /김지호 기자

힐러리 클린턴, 레이디 가가, 리한나 등 수많은 유명 셀럽들도 제임슨을 즐겨 마시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이어트 할때도 위스키를 끊지 못한 레이디 가가는 2012년 아일랜드 공연에서 동료들과 함께 제임슨으로 병나발을 불었고, 리한나는 ‘치얼스’라는 앨범에서 대놓고 제임슨을 노래하기도 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셀럽들과 평론가가 극찬한 제임슨 위스키. 대체 어떤 매력이 그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던 걸까요.

아이러니하게도 제임슨의 창립자인 존 제임슨은 스코틀랜드인이었습니다. 그는 변호사로 일하다가 1768년 ‘딤플’ 위스키를 생산하던 헤이그 가문의 딸 마거릿 헤이그와 결혼을 합니다. 나름대로 뼈대 있는 스카치 집안과 결합을 한 것이지요. 결혼 후 아일랜드 더블린으로 이민을 간 존은 1780년, 장인으로부터 증류소를 하나 물려받게 되는데 이게 오늘날의 제임슨 증류소가 됩니다.

제임슨 증류소는 1880년대에는 더블린 도심 한복판에 7000평이 넘는 부지와 300여 명의 직원을 고용할 수 있을 정도로 세를 확장했습니다. /페르노리카코리아

1780년대 더블린은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더블린은 세계 최대의 위스키 생산지였고 100여 개의 맥주 양조장과 증류소가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누가 봐도 스카치보다 아일랜드 위스키의 위상이 더 높았고 증류소 간 경쟁도 치열했습니다. 그곳에서 제임슨은 꾸준히 긍정적인 평판을 쌓아갔고 자식들도 사업에 합류해 가업을 이어갔습니다. 1880년대에는 도심 한복판에 7000평이 넘는 부지와 300여 명의 직원을 고용할 수 있을 정도로 세를 확장했습니다.

◇아이시리 위스키의 몰락

하지만 1832년 운명의 장난처럼 다가온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이는 바로 ‘코페이 증류기’의 발명과 이를 도입하지 않았던 아일랜드인들의 고집입니다. 이니어스 코페이라는 아일랜드 세관원의 이름을 딴 이 증류기는, 스코틀랜드에서 일찍이 도입한 연속식 증류기입니다. 연속식 증류기는 단식 증류기에 비해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고도수의 스피릿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연속으로 증류하다 보니 단식 증류기에 비해 원료의 풍미는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에서 위스키를 제일 잘 만든다는 생각에 빠져 있던 아일랜드인들은, 질 떨어지는 위스키를 만들 수 없다며 연속식 증류기의 도입을 반대합니다. 때로는 이러한 뚝심이 걸작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때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의 입맛이 변하기 시작했고 전 세계적으로 블렌디드 위스키의 열풍이 불기 시작합니다. 즉, 연속식 증류기로 뽑아서 블렌딩한 가벼운 풍미의 술이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는 아이리시 위스키 몰락의 서막에 불과합니다.

잘나가던 아일랜드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미국의 금주법 등으로 인해 고배를 마셔야 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증류소가 문을 닫았고 위스키 시장은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1차 대전이 일어나고 있던 영국은 전쟁용 알코올만 제조할 수 있었고 음식을 만들 때 빼고는 보리의 사용조차 금지했습니다. 주원료가 보리인 위스키 업장들은 좌절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 결과 제임슨 증류소도 1917년~1918년까지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1918년 아일랜드와 영국 간의 독립전쟁이 일어났고 미국의 금주법이 시행된 지 6년이 되던 해, 2차 대전까지 발생합니다. 당시 가장 큰 손이었던 영국과 미국의 위스키 거래가 끊기다 보니 증류소들이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겠지요. 사실상 아이리시 위스키의 몰락이라고 봐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시점이었습니다. 그 결과 한때 100여 곳이 넘었던 아일랜드의 증류소가 1972년이 되는 해, 단 2곳으로 줄었습니다. 남은 곳은 세계 최초의 증류소인 부시밀스와 제임슨 증류소가 새로 합병해 만든 ‘뉴 미들턴 디스틸러리’였습니다.

서울 마포구 아이리시 위스키 '제임슨 마당 팝업스토어'에서 시음회가 열리고 있는 모습. 팝업 스토어는 다음 달 14일까지 진행된다. /페르노리카코리아

하지만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살아남았다는 것은 강하다는 것. 다 죽어간 불씨에 화력을 더한 것은 1988년 프랑스의 거대 주류회사인 페르노리카입니다. 아이리시 위스키 특유의 부드러움과 균형 잡힌 맛에서 희망을 본 것이지요. 페르노리카는 제임슨을 앞세운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2016년 이후 매년 20% 이상의 성장을 보이며 지난 2022년, 약 1110만 상자(한 상자 : 750mL*12병)의 판매량을 기록합니다. 1년간 약 1억 3천만 병의 위스키를 팔아 치운 셈입니다. 레버넌트(revanant: 죽음에서 돌아온 자)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 같습니다.

◇최고의 하이볼 기주 제임슨

하이볼과 궁합이 좋은 제임슨. /김지호 기자

작년 한 해 가장 뜨거웠던 키워드는 ‘하이볼(Highball)’이었습니다. 짜릿한 청량감과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으로 프리미엄 주류에 대한 진입 문턱을 낮춰줬기 때문이죠. 집에서도 취향대로 손쉽게 제조할 수 있어 다양한 소비자들을 매료시켰습니다.

하이볼은 기주가 어떤 맛이냐에 따라서 그 방향성이 바뀝니다. 위스키 좀 마신다고 하는 사람들은 제임슨을 최고의 기주로 뽑기도 합니다. 복잡하게 이것저것 생각할 것 없이 쉽게 타 마시기 좋기 때문입니다. 너무 비싼 위스키로 하이볼을 타면 생각만 많아집니다. 자신도 모르게 극대화된 맛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임슨은 눈대중으로 적당히 잔에 붓고 탄산수에 레몬 하나 넣고 휘휘 저어 마시면 입가에 미소가 번질 것입니다. 참, 니트보다는 하이볼이 낫습니다. 그럼 슬란체(Sláinte: 아일랜드어로 건배)

위스키디아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275747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