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환자 기약 없는 기다림…초라하고 괴롭다" 떠나는 '빅5' 흉부외과 교수

박정렬 기자 2024. 3. 19.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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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세훈 서울아산병원 심장혈관흉부외과 교수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아산병원을 방문한 다음 날 폐암 환자를 책임지던 이 병원 외과 교수는 메스를 내려놨다. 최세훈 서울아산병원 심장혈관흉부외과 교수는 19일 "이 상황을 도저히 못 견뎌 사직서를 낸다"며 "제가 수술하기로 약속했던 환자들까지는 어떻게든 해결하고 저는 이 자랑스러웠던 병원을 떠날 것"이라며 자신의 SNS를 통해 '사직의 변'을 남겼다.

"매일 악몽을 꾸는 것만 같다"고 시작되는 최 교수의 글에는 무력감이 짙게 배어났다. 그는 "불과 한 달 만에 이 땅의 의료가 회복 불능으로 망가져 버렸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며 "이제는 환자를 보는 것이 무섭고 괴롭다"고 했다. 인턴·전공의·전임의 없이 수술하고 병동을 지켜온 지 한 달째, 그는 몸보다 "여건이 안 되어 그 환자를 치료하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의사를 초라하게 만드는지 절감한다"며 정신적 괴로움을 경험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최 교수는 "제가 혼자서 수술할 수 있는 환자는 이전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며 "급한 환자들을 우선적으로 수술하다 보면 나머지 환자는 그저 쌓여만 가고, 다른 곳에 보내려고 해도 어디를 어떻게 찾아갈 수 있을까 걱정만 할 뿐"이라고 울분을 토했다. 이어 "작년만 해도 '폐암 진단 후 1달 이내 수술하는 비율'을 따졌는데 지금 환자들은 기약 없이 수술을 기다리고 있다"며 "당직이 아닌 날도 불면증에 시달리며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는 제 모습이 스스로도 낯설어 무섭다"고 썼다.

윤석열 대통령이 18일 오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어린이병원을 방문해 중증 어린이 환아를 격려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2023.3.18/뉴스1 Copyright (C)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사진=(서울=뉴스1) 오대일 기자


그는 자신을 가장 행복한 흉부외과 의사라고 떠올렸다. 외래를 보는 동안 환자로부터 감사 인사를 받다 보면 "내가 뭐라고 이렇게 쓰임을 받나"며 몸 둘 바 모르는 인생을 살아왔다고 고백했다. 최 교수는 "만나는 후배 의사에게 흉부외과는 정말 좋은 과라고, 나의 노력이 그대로 환자의 생명으로 연결되는 일을 하는 사람은 평생에 걸쳐 자부심과 감사함을 느끼는 인생을 산다고 적극적으로 권했다"고 회상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흉부외과 전공의·전임의가 있던 병원에서 같이 일하며,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기쁨이며 진심으로 감사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 세상에 흉부외과 의사가 한 명 남는다면 그게 나일 것이라고 장담한" 그는 이제 "이렇게 떠나게 될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고 되묻는 처지가 됐다. 최 교수는 "우리나라 흉부외과의 황금 시기, 외국 어디를 가서 무엇을 봐도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던 시기는 이제 끝이 났음을 안다"며 "너무 슬프고 황당하다"고 했다.

최 교수는 자신의 사직이 정부의 의대 증원 정책과 이로 인한 전공의 이탈 때문이란 점을 숨기지 않았다. 한 명의 환자를 진단·수술할 때도 신중히 판단하는데 온 나라의 의료 체계를 바꾸는 것은 더 신중했어야 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최 교수는 "정책의 의도가 아무리 좋아도, 그 정책으로 인하여 한 나라의 의료가 붕괴한다면 아마추어 정부, 돌팔이 정부일 뿐"이라고 날을 세웠다. 또 전공의의 희생으로 저렴한 의료비와 높은 의료 접근성을 유지하는 게 가능했다는 점을 들며 "이 정부의 무자비한 정책으로 그들(전공의) 모두가 미래에 절망한 채 자발적인 사직을 결정했다"고 비판했다.

최 교수는 "전공의들은 열악한 상황에서도 이 땅의 가장 어려운 환자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이고, 전문의가 되어 이 땅 의학의 맥을 이어갈 사람들"이라며 "그들 모두가 떠난 지금 우리나라 의료의 미래에는 절망밖에 남지 않았다. 이 상황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 원통하고 또 원통하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대구=뉴시스] 이무열 기자 = 정부의 전공의 처벌 방침 등에 반발해 의대 교수들이 집단 사직서 제출 움직임을 보이는 19일 대구의 한 대학병원 1층 로비에 "의사 선생님 환자 곁을 지켜주세요"라는 소원쪽지가 붙어 있다. 2024.03.19. lmy@newsis.com /사진=이무열


최 교수에 따르면 흉부외과 전공의는 전국적으로 100명 남짓에 불과하다. 그는 "매년 20명 남짓 나오는 한 줌의 전문의 한 명 한 명이 우리나라 국민 1만 명을 살린다"며 "평생 그 업에 자신을 바치기로 결심한 젊은 의사들이 다 떠난 이때, 정부는 해결을 위한 노력은 하지 않고 여전히 위협과 명령으로만 그들을 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 (전공의 집단 이탈로) 수천, 수만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아는 저로서는 도저히 이 상황을 견딜 수가 없다"며 "전공의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차피 우리나라 흉부외과의 미래는 없다. 겨우 버텨오던 흉부외과는 남은 자들이 온몸과 마음을 갈아 넣으며 얼마간 버티다가 결국 문드러져 버릴 것"이라고 덧붙였다.

최 교수는 "이 땅의 가장 어려운 환자들을 포기하게 되는 날이 오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느니, 차라리 저는 의업을 떠난다"며 "떠나간 젊은 의사들이 살릴 수 있었던 수많은 국민이 고통 속에 죽어갈 때, 그 책임이 이 일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인간들에게 있었다는 것만은 우리 국민들께서 오랫동안 기억하여 주시기를 부탁한다"고 글을 마무리했다.

박정렬 기자 parkjr@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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