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생농사! 80살까지 코트에서 뛰고 싶습니다“

김종수 2024. 3. 19.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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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의 농구人터뷰(94)] ‘농구 늑대’ 윤진구


”거의 평생을 해온 농구인데 80세까지는 코트에서 뛰어봐야하지않겠어요. 농생농사(籠生籠死), 농구에 살고 농구에 죽는다는 것이 제 좌우명입니다“


윤진구(67‧192cm) KBL 패밀리 부회장은 53년째 농구공과 함께 하고 있다. 동대문 중학교 2학년때 키(179cm)가 크다는 이유로 농구를 시작한 이래 70살을 바라보는 지금까지도 코트를 떠나지않고 있는 것이다. 1980년대 실업리그 한국은행에서 주전 센터로 활약했던 그는 ‘날렵한 배불뚝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당시 기준으로 키는 컷지만 살짝 튀어나온 배에 마른 체형 등 왠지 비실해보이는 외모로 인해 첫인상에서 주는 카리스마는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경기가 시작되면 그러한 느낌은 삽시간에 사라졌다. 날카로운 눈빛에 꾹 다문 입술로 전후반 내내 그야말로 엄청나게 뛰어다녔다. 이에 당시 모 일간지의 농구담당 기자가 그러한 별명을 붙여주었고 윤진구 본인 역시 지금까지도 마음에 들어하고있다.


”누가 들어도 멋있는 별명이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날렵한 배불뚝이도 나쁘지는 않은 듯 싶어요. 얼마나 정겨워요. 농구인은 친근해야합니다. 그래야 농구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허물없이 지낼 수 있죠. 그리고 날렵하다잖아요. 열심히 요령안피우고 달리고 또 달렸더니 그렇게 불린 것 같아요. 만족하는 별명입니다“


요령을 안피우는 성향은 선수 은퇴 후에도 한결같다. 아킬레스 건이 끊어지고 갈비뼈가 수십번 골절되는 등 크고 작은 부상을 달고살았음에도 지금까지 코트에서 뛰고있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일반인들은 물론 선수 출신들도 이 정도 나이에 실제 경기를 뛴다는 것은 상상하기 쉽지않다.


오랜 경험만큼이나 윤진구의 농구에서는 관록이 넘쳐난다. 나이로 인해 신체능력, 체력 등은 예전같지않지만 포스트 중앙에서 골밑을 지켜주면서 리딩, 패싱 등으로 게임을 이끌어나가는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이른바 한국 시니어판 니콜라 요키치(?)라고 할 수 있다. 플레이스타일이 은근 닮았다고 말하는 이들도 많다.


생활체육 ‘파랑새농구단’ 멤버로 뛰기 시작한 그는 나이도 잊은채 대회가 있을 때면 누구보다도 부지런히 준비하고 뛰었다. 국내는 물론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다양한 국가에서 펼쳐진 생활체육농구대회에도 출전했다. MVP를 수상한 적도 여러번이다. 한때 국내 최장신 센터였던 기아농구단의 한기범과 한 팀을 이뤄 동남아 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다


'아버지 농구팀'에서 그와 함께하는 선수들의 직업군은 다양하다. 선수 출신은 물론 의사, 국제보험 전문가, 클럽 코치 등 제각각 캐릭터를 가지고있지만 농구를 사랑한다는 하나의 마음으로 서로 뭉쳤다. 경기 후 서로를 격려하며 인간적인 교류를 나눌때면 여전히 꿈을 향한 심장이 뛰고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인간 윤진구는 우직하다. 잘못됐다싶으면 눈치보지않고 바로 직언을 날릴 때가 많다. 그로인해 호불호도 많이 갈린다고 한다. 올곧은 선비같은 모습을 멋있게 보는 이도 있는 반면 불편하게 느끼는 이들도 적지않다. 이에 대해 본인은 “항상 옳았던 것은 아니겠지만 마음이 시키는데로 부끄럽지않게 살아왔다”며 소신을 밝히고 있다. 어설픈 타협이라는 것을 용납하지않은채 50년넘게 코트에서 뛰어온 이시대의 ‘농구 늑대’ 윤진구, 그의 농구인생과 철학에 대해 좀더 자세해 들여다보자. 

 

 

“나이를 먹을수록, 직책이 있을수록 모범을 보여야한다고 생각합니다”

​​​​​​Q.요즘 어떻게 지내나요?

뭐, 아시다시피 시니어 농구선수로 열심히 코트에서 뛰고있습니다. 그간 많은 국가를 다니면서 경기를 뛰었고 올해 6월 세계대회가 이탈리아에서 열리는데 거기에 참석해서 경기를 가질 예정입니다. 그간 아시아권대회에는 많이 출전했으나 유럽과 미주대회는 뛰어보질못했거든요. 그곳에서 뛰어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경험이 될 듯 싶어요.

​​​​​​Q.농구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신데 자녀들은 농구를 하고 있나요?
88년생 딸하나 83년생 아들이 하나있는데 지금은 안해요. 딸은 키가 179cm로 괜찮은데 너무 늦게 시작했어요. 하라고 할 때는 안하고 나중에 한다고해서 농구공을 잡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한창 기본기를 닦고 성장할 시기를 놓쳐서 잘 풀리지는 않았습니다. 하필 IMF 당시와 겹쳤던것도 악재였죠. 당시 각팀들이 경영난으로 인해 있는 선수도 내보내려고 했었잖아요. 수원대를 거쳐 프로선수를 하다 현재는 간호사 자격증을 취득해 간호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아들같은 경우는 본인이 안한다고 하더라고요. 안한다는데 안시켜야죠. 좋아서해도 될까말까한데 어떻게 억지로 시키겠어요. 그래도 반듯하게 잘커서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열심히 잘살고있으니 된거죠. 아들은 진작 결혼해서 손주낳고 살고있는데 딸이 아직 시집을 안가서 걱정이에요. 제가봐도 괜찮은 녀석인데 아직 인연을 못만났나봐요. 하긴, 농구든 결혼이든 다 큰 자식을 부모 마음대로 할 수는 없으니까요. 세상 모든 부모가 마찬가지일거에요. 그냥 자기들 인생 스스로 만족하고 건강하게 잘 살아가면 그걸로 기뻐해야겠죠.

​​​​​​Q.그래도 농구는 시키려고 하셨나봐요? 예전분들보면 자식은 절대 농구 안시키려고했다고 하던데.
그냥 의견을 물어본거에요. 딱히 적극적으로 시키고 그럴 생각은 없었어요. 한다면 응원해주는거고 안한다면 마는거죠. 운동한 사람들 특히 예전 사람들은 다 비슷해요. 자식이 운동한다고하면 호적에서 파버린다는 말이 유행어였거든요. 지금처럼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 훈련이 체계적인 것도 아니고요. 그냥 무식하게 스파르타식으로 하던 때라 자식에게 그런 과정을 시키고 싶었겠어요. 다만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부모들의 피를 받아서 다들 평균 이상의 키는 타고나잖아요. 신장이 중요한 만큼 어찌어찌해서 농구공을 잡게되고 농구인 2세, 3세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않죠. 예전에는 자녀들이 부모만큼 농구를 못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부모 못지않은 혹은 뛰어넘는 녀석들도 나오더라고요. 기분좋을거에요. 부모는 내가 잘되는 것 보다 자식이 잘되는게 최고잖아요.

 

 

​​​​​​Q.남자농구같은 경우 팀도 10개구단이나 되고 꾸준한 것 같은데 여자농구는 질은 둘째치고 숫자부터 확 줄었다고 걱정하는 목소리도 많더라고요.
그러게요. 말씀하신데로 리그 수준이나 선수들 실력은 상대적인 것이니까 뭐가 어떻다 평가하기가 쉽지않아요. 다만 여자농구는 숫자부터 확 줄어버린게 아쉽기는하네요. 저 뛸때만해도 굉장했어요. 남자는 한국은행, 한국산업은행, 기업은행 3개 금융팀에 삼성, 현대, 기아 순으로 실업팀이 창단되어 80년대 6개팀으로 경쟁했는데 여자팀은 무려 13개까지 있었단말이에요. 금융팀은 다 여자농구팀을 보유하고 있었어요. 국민은행, 외환은행, 신탁은행, 상업은행, 선경, 코오롱, 빠이롯트, 대웅제약, 태평양, 한국화장품, 코오롱, 동방생명(삼성생명), 현대…, 완전 전성기였습니다. 그만큼 여자농구가 인기가 높으니까 가능했겠죠. 그러한 흐름에서 선수가 되겠다는 여자아이들도 많았을 것이고요. 지금은 학생들 숫자도 적지만 프로선수가 되는 것부터 쉽지않으니까 키가 크고 운동신경좋은 아이들도 시작을 잘 안하려고 하는 듯 싶어요. 프로는 프로대로 유망주들이 적어서 고민이 크고요. 부익부 빈익빈, 순환의 문제죠. 여러 곳에 이유가 있는지라 어디부터 문제다고 말하기가 어렵죠. 선수를 늘리기위한 의견은 많지만 일단 말만하고 실천을 안하니.

“농구 인기의 부활, 모두의 간절함이 필요합니다”

​​​​​​Q.걱정의 목소리는 많은데 정말 어려운 난제같아요.

난제이기는한데 능력과 열정 부분에서도 반성을 해야해요. 농구인들은. 어렵죠. 상황이 이렇게까지 왔는데, 하지만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노력을 안하는 이유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조직이든 자금력이 빵빵해야 잘 돌아가는데 일단 그것부터 잘안되잖아요. 그렇다고 어디가서 스폰서를 잘 물어오는 것도 아니고. 무슨무슨 직함만 거창하게 단채 공금으로 밥이나 먹으러다닐줄 알지. 윗대가리들이 그러니 될턱이 있나요. 우리 때는 기업인들이 주로 운영을 했어요. 지원도 탄탄했죠. 지금은 농구인이나 정치인이 요직에 있다보니 돈이 안돌아요. 그냥 감투쓰고 헛기침 몇 번하면서 임기만 때우면서 시간다 보내는거죠. 그렇다고 이후에 깔끔하게 물러나는 것도 아니에요. 최대한 현장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싶어해요.

​​​​​​Q.말씀을 듣고보니 확실히 어느 한 방향이 잘안되면 다른 방향으로의 물갈이도 필요한 부분같기는 하네요.
맞아요. 그렇다고 그 양반들이 오랫동안 눌러앉아서 한게 뭐가 있냐고요. 이른바 고인물이 되어가는거죠. 협회같은데 보면 저렇게 많은 자리가 왜 필요하지 싶은 부분이 많아요. 그냥 할 것 없으니까 자리 만들어준 것 아니에요. 그 숫자가 매일 짜장면만 먹어도 얼마에요. 그렇다고 일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수시로 팬들한테 비난받을 짓을 하잖아요. 최대한 열심히 일할 인원만 남겨놓고 돈은 최대한 아껴가면서 초등학교나 그런 쪽에 풀어야죠. 아니면 농구인들 돕는데 쓰거나. 솔직히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부분아니에요? 본인들은 눈과 귀를 닫고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요. 현실이 이렇다고요. 그러면서 정치인들 욕은 왜 하는건데요. 판만 다르지 하는 짓은 별반 다르지않고만. 아니, 정치쪽은 그래도 젊은 피라도 계속 수혈하던데 농구 쪽은 별 성과없이도 80살까지 해먹고있으니 오히려 더 답답하고 꽉막힌 분야라고 해야할까요.

​​​​​​Q.팬들 사이에서도 많이 나오던 말이라 공감되는 부분도 있지만 인터뷰에서 이렇게 센 발언을 하셔도 될까요?
안될게 뭐가 있겠습니까. 없는 소리 지어내고 모함하는 것 같으면 문제가 있겠지만 있는 사실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니까요. 사실 특별한 얘기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다들 아는 부분이에요. 다만 누구는 농구 쪽에 발을 담구고있어서, 누구는 그러고 싶어서, 누구는 선후배관계 의식해서, 공개적으로 얘기를 안하는 것 뿐이죠. 해봤자. 본인 자신에게 득될게 하나도 없으니까요. 일단 나부터 살아야지. 누가 총대를 메려고 하겠어요. 다들 학연, 지연으로 엮여있는 농구판에서. 그래서 제가 예전부터 은근히 미운 털이 박혀있습니다. 간혹 보다못한 집사람이 한번씩 그럽디다. 혼자만 입바른 얘기해서 바뀔 것도 없고 손해만보니까 안했으면 좋겠다고요. 하지만 평생 이렇게 살아왔는데 성격이 바뀌겠습니까. 선배들에게도 해야될 말이 있으면 해야죠. 다 농구에 대한 말들뿐이지 누구의 사적인 생활이나 개인적인 부분을 건드는게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문제가 있겠죠. 이게 잘못된 것일까요? 다행히 저를 좋게봐주시는 분들도 많으셔서 응원도 받고 또 제가 좋아하는 농구도 꾸준히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Q.감투쓰는 사람들을 실날하게 비판하셨는데 본인도 현재 KBL 패밀리 부회장을 하고 계시지않나요?
생전 어떤 것도 안하다가 선배들이 한번 일좀 해보라고해서 KBL 패밀리에 이사로 들어가기는했죠. 무슨무슨 협회 등과는 결이 다르기는 했지만 책임감있게 하려고는 했어요. 3년 이사하다가 부회장했고 이후 지원금이 부족해져서 운영이 어려워지는 상황이 오자 발품팔아서 기부금을 받아왔어요. 이 기부금이라는 것이 들어온 경우도 되게 이례적이라고 하더라고요. 어디어디 보니까 농구선수 출신 유투버도 좋은 행사에 스폰받고 그러던데 그 많은 인원이 지금까지 뭐했는지 모르겠어요. 내돈쓰기 싫고 아니 그럴 돈이 없다면 스폰이라도 받을 수 있게 노력하는 것이 맞지않을까요. 제가 부회장으로 있는 동안 패밀리에 2천만원정도 기부금을 끌어당겼고 올 가을에도 5~6백 정도 들어올 것 같습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큰 돈일지 작은 돈일지 모르겠지만 어디에 쓰는가에 따라서 가치가 달라지겠죠. 적어도 저는 10원 한 장이라도 필요한 곳에 쓰이게 노력할 것입니다. 뭐, 제가 이것 조금했다고 나 대단하지라는 말을 하려는게 아닙니다. 별것 아닌 것 저도 잘 알고있습니다. 다만 이게 정말 기본적인 것인데, 이것조차도 되지않았고 현재도 안되는 단체가 태반이라는 말씀을 드리고싶어서 말을 꺼낸겁니다.

​​​​​​Q.대부분이 선후배인 관계에서 이정도로 대놓고 직설적인 분은 처음이에요.
그냥 그렇게 살아왔어요. 직설적으로. 그렇다고 아무 잘못없는 사람 트집잡아서 까는 사람은 아닙니다. 잘한 것은 잘했다고하고 잘못한 것은 잘못했다고 하는거죠. 사람이라는게 그러지않습니까. 잘했다는 열마디보다 잘못했다는 한마디가 더 거슬리는. 그래서 저를 독설가처럼 여기는 이들도 있겠지만 정확히 말하면 독설가가 아니라 솔직한 성격이 맞는거죠. 저는 형제도 없어요. 어린시절 창문도 없는 단칸방에서 아버지, 어머니와 지냈어요. 그래도 기죽지않고 할말이 있으면 하고살았죠. 이순신 장군이 그랬잖아요. 살고자하면 죽고, 죽고자하면 산다고. 일의 크고 작음을 떠나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자리에 있으면 그런 마음과 정신자세로 일을 해야하지않나싶어요. 나를 믿고 의지하기에 그 직책을 준 것잖아요. 아무 하는것없이 대접만 받고 이익만 취하려고하면 진짜 안되는거죠. 아내도 그렇지만 친구들도 그래요. 나름다 사회에서 요직도 차지하고 잘나가는 친구들인데 항상 저에게 ‘너도 적당히 맞춰가면서 지내면 좀 더 좋은 일이 많을텐데 왜그렇게 팍팍하게 사냐’고요. 됐다고 대답합니다.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인데 떳떳하게 살자는 것을 택했어요. 어차피 아무리 돈많고 잘나가도 나이차면 가는게 인생입니다. 큰돈은 못벌었지만 마음이라도 떳떳해야 갈 때 후회가 없지않겠어요.

“한국은행 입단, 당시에는 충격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좋은 일이었구나 싶어요”

​​​​​​Q.지금도 직접 코트에서 뛰는 것 자체를 신기하게 보는 분들도 많을겁니다. 그정도로 농구가 좋으세요?

뭐, 아름답게 미화해서 농구는 내인생 그런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여전히 농구가 저를 이끌어주고있고 제 삶에 이익이 되고있다고 말하는게 더 정확할 듯 싶습니다. 일단 코트에서 뛰고있으니까 또래들보다는 체력이나 몸상태가 많이 좋죠. 크고 작은 부상을 많이 당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현재 기준으로 엄청 아픈 곳도 없어요. 무엇보다 각계 각층의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서 우정도 쌓을 수 있고요. 거기에 크지는 않아도 돈을 받으면서 선수로 뛸 수 있다는 점도 메리트입니다. 가끔 지금 농구가 아니었다면 뭐하고 있었을까 생각이 들기는해요. 집에서 텔레비전이나 보고 경로당 왔다갔다하면서 아는 사람들과 술만 진탕먹으면서 추억이나 회상하면서 살고있었겠죠. 입바른 소리 많이 한죄로 어디 어디 협회나 단체 등에서 저를 불러들일 가능성도 적고요. 뭐,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죠. 그렇게 사는 사람들도 많으니까요. 무슨 일을 했어도 대부분은 은퇴했을 나이잖아요. 하지만 과거보다는 현재도 이렇게 왕성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행복합니다.
 

 

​​​​​​Q.크고 작은 부상이 많으시다고 하셨는데 몸관리도 중요할 듯 해요.
중요하죠. 그런데 제 나이정도 되면 어디 삐기만해도 회복 속도가 느려요. 거기에 대회가 다가오면 훈련도 해야하고하니까 어지간한 것은 그러려니하고 뛰어버려요. 아킬레스건도 50대 후반, 60살 다되어서 끊어졌는데 제대로 재활도 안하고 그냥 뛰고있어요. 왜 그렇게 몸을 사리지않냐고 물을 수도 있겠는데 몸을 막 굴리는게 아니라 그냥 코트에서 뛰는 것을 너무 좋아해요. 잠깐만 쉬워도 코트에서 경기하는 것을 보면 저도 막 뛰고싶어요.(웃음) 다행히도 현재 제가 느끼기에 아구 나죽는다 수준으로 아픈 곳은 없습니다. 꾸준히 운동을 쉬지않아서 또래들보다는 건강상태가 좋기에 그렇지않나싶어요. 이대로 80살까지만 뛰면 좋겠습니다. 목표에요.

​​​​​​Q.금융팀들이 대세이던 시절에 한국은행에 입단하셨어요.
맞습니다. 1980년대 삼성, 현대, 기아자동차 등 대기업들이 판을 독식하면서 밀리기는했지만 이전에는 금융팀들이 대세였어요. 한국은행도 전통있는 명문이었고요. 보세요. 한국은행이잖아요. 예전 먹고살기 힘든 시절에 한국은행을 직장으로 할 수 있다는 점은 엄청난 메리트였죠. 평생 밥굶을 걱정은 사라지는거잖아요. 당시 금융팀들은 색깔이 조금씩 달랐어요. 한국은행은 주로 연세대 출신이, 한국산업은행은 고려대 출신이 그리고 기업은행은 짬뽕이었어요. 그렇게 따지지않고 고르게 받아주는 편이었죠. 그러다보니 한국 사회의 고질적 병폐인 라인형성이 실업무대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는 악재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이른바 티오 차이도 컸어요. 금융팀의 메리트는 은퇴 후에도 은행직원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면서 미래를 보장해주는 것이잖아요. 한국은행과 한국산업은행은 전국에 숫자가 그리 많지않았어요. 그만큼 은퇴한 선수를 꽂아줄 자리가 많지않다는 것이겠죠. 그러다보니 정말 잘했거나 가능성이 높아보이는 선수들 위주로 받아들였어요. 반면 기업은행은 상대적으로 지점이 많아서 티오에서 여유가 있죠. 때문에 선수를 받을 때도 잘하는 선수에 더해 다른 선수들까지 한꺼번에 데려오는 행보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기업은행만의 경쟁력이라고도 볼 수 있었겠고 그만큼 많은 선수들이 오갔겠죠. 현재 농구판에 기업은행 출신들이 유독 많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숫자에서 압도적이었으니까요.

​​​​​​Q.그러한 금융권만의 농구판에 대기업들이 합류하면서 큰 변화가 생기게 된거죠?
그렇죠. 이전까지는 모든 시스템이 한국은행, 한국산업은행, 기업은행 이렇게 돌아갔는데 1978년에 들어서 삼성, 현대가 차례가 생기게된겁니다. 1980년대 중반 기아자동차도 생기지만 이것은 나중의 일이고. 어쨌든 그렇게 새로운 팀이 생겨나니까 무엇보다도 선수수급 문제가 심각해졌어요. 잘하고 못하고는 둘째치고 팀내 로스터를 맞춰야되니까요. 어느 정도 숫자가 있어야 훈련도 하고 부상자가 생겼을 때 땜빵이라도 치를 것 아니에요. 그러다보니 경쟁에서 밀려 은퇴해야 될 선수 붙잡고 심지어는 은퇴한 선수들까지 다시 불러들이는 일까지 생겨났어요. 물론 어디까지나 숫자 채우기였던지라 곧 그 선수들은 다시 은퇴할 수밖에 없었지만요.

 

 

​​​​​​Q.한국은행은 어떻게 들어가게 된것인가요?
이게 우여곡절이 좀 있어요. 본래는 중앙대 3학년 시절 현대로 가기로 되어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정이 생겨서 불발이 됐고 4학년때 정봉섭 부장님이 부르셔서 삼성으로 가라고 하더라고요. 현대, 삼성은 금융팀들처럼 선수 이후의 삶을 책임져주는 것은 아니지만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팀들답게 나름대로 메리트가 많았거든요. 둘중 어디로 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참 뜻밖의 변수가 발생했어요. 부분드래프트라는게 생겼습니다. 제가 80년 2월에 졸업을 해요. 76학번이니까요. 거기에 딱 걸린거죠. 당시 삼성, 현대는 돈이 많으니까 공격적으로 선수들을 쓸어담았어요. 그냥 본인들이 원하는 선수만 데려가면 아무 문제가 없겠으나 거기서 그치지않고, 이른바 다른팀에 가면 눈깔 후빌 놈들 죄송합니다. 순화해서 다시 말할께요.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올 전력이라고 정정합니다.(웃음) 아무튼 그런 선수들까지 다 데려간거죠. 우리는 안쓸 것이지만 너희도 못쓰게 할 것이다는 심보였죠. 당연히 문제가 생기지않겠어요. 불만의 목소리도 커지고요. 그러다보니 실업연맹에서 안되겠다싶어 각팀에서 2명씩만 우선지명하고 나머지는 드래프트로 풀자고 규정을 정한거죠.

​​​​​​Q.그때 한국은행에서 뽑은 2명에 들어간 것이군요?
그렇죠. 저로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습니다. 한국은행이 싫어서가 아닙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부모님과 더불어 무척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뒷바라지해주신 부모님께 집이라도 하나 해드리고 싶었는데 그게 무산이 된거죠. 어느 팀에 가고싶다 그런생각보다는 무조건 돈많이 주는 팀이 최고였어요. 삼성으로가면 3천만원을 받게되고 이미 양복까지 입고 입단원서 사진까지 찍었는데 금융권팀에서 저를 찍어버린지라 꼼짝없이 발목을 잡힌거죠. 정부장님이 부르셔서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데 머리가 핑핑 돌더라고요. 저한테 선택권은 금융권 3팀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것 정도였죠. 제가 뭘 알겠어요. 그냥 중학교 사회시간에 본 한국은행 생각이 나서 그렇다면 한국은행에 가겠다고 답을 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 웃긴 것은 그렇게 제도를 만들었으면 최소 5년 이상은 이어가야 맞지않겠어요. 꼴랑 1년하고 그만두더라고요. 저로서는 하필 거기에 탁 걸려서 부모님께 효도할 기회를 막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한국은행으로 간 것이 꼭 나쁜 것만도 아니었더라고요.

​​​​​​Q.예? 무슨 특별한 메리트가 있었나요?
제 입장에서는 충분히 있었습니다. 제가 지금만 그런게 아니라 그 시절에도 입바른 소리를 잘하는 편이었어요. 대기업에서 그런 것 곱게 봐줄까요? 저도 비굴하게 빌면서 남아있는 스타일이 아니고요. 아무도 현대, 삼성 등에 들어갔으면 오래있지 못했을 수도 있어요. 그런 점에서는 한국은행이 딱이었죠. 한국은행은 국가에서 운영하는 곳이에요. 공무원들 쉽게 짤리는 것 봤어요. 어지간하면 자리보존을 해준다고요. 공금에 손을 대는 등 범죄에 가까운 일만 저지르지않으면. 그래도 한국은행에 있었기에 캐릭터 유지하면서도 선수생활을 쭉 이어갈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긍정적으로다가.(웃음)

​​​​​​Q.은퇴후 은행원으로서의 삶도 이어갈 수 있었고요?
맞아요. 금융권팀의 최대 메리트가 그거죠. 우리는 오전에는 은행에서 근무하고 오후에 운동하러 나오고 그랬어요. 좋은 선수도 부족했지만 밥먹고 운동만하던 실업팀들을 이기기 힘들었던 이유이기도하죠. 그래서인지 어쩌다 한번씩 삼성, 현대를 잡아내면 참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어쨌든 그렇게 한국은행에 들어간 덕택에 안정적인 삶을 유지해나갈 수 있었고 부모님 모시고 자식들 키워놨으니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Q.센터로서 어떤 플레이 스타일의 선수였는지 궁금합니다.
보통 센터하면 가장 강조되는 세가지가 있어요. 첫째 리바운드. 일단 골밑에서 가장 가까이 있고 팀내 가장 큰 선수일 확률이 높으니까 리바운드를 잡아주면서 높이를 책임져주는게 맞겠죠. 둘째 스크린. 큰 선수가 얼마나 스크린을 잘 걸어주느냐에 따라서 다른 선수들의 움직임이나 전술수행여부도 달라집니다. 그리고 피딩. 상대팀의 지역방어를 깨는데 있어서 센터의 역할도 무척 중요합니다. 횡으로만 공이돌면 수비하기가 편해요. 그러면 우리쪽 공격은 더욱 힘들어지겠죠. 센터가 있는 포스트 가운데로 공이 들어가고 그게 득점으로 연결되던가 아니면 다시 빈자리 동료에게 패스가 이어지면 수비수들이 힘들어지게 됩니다. 도움수비도 들어가야되고 그러다보면 커버해야 할 구역이 엄청 넓어지게 되죠. 지역방어를 깨트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3점슛이다는 말이 그래서 나오는거에요. 코너에서는 3점슛이 터지고 골밑에서는 센터가 연신 득점을 성공하게되면 해당 전술을 오래쓰기가 힘들어집니다. 저같은 경우 조금씩 다하기는했지만 피딩에 특히 자신이 있었습니다. 팀에서 주전으로 뛰는 시간이 많아지다보니 어느 순간 부터는 코너 구석구석까지 동료들의 움직임이 한눈에 들어오더라고요. 그런점에서 한국은행출신 센터였던 김영일 선배가 무척 아쉬워요.

​​​​​​Q.한국은행 센터 김영일요? 저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네요.
그럴거에요. 워낙 오래전 선수니까요. 선수 생활을 길게 이어가지도 못했고요.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으니까요. 그 선배가 본래 수구 선수 출신이에요. 그밖에 고등학생 때까지 수영, 빙상, 아이스하키도 했고요. 농구는 연세대에 입학하고나서부터 본격적으로 한 케이스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몇 년 농구하지도 않았으면서 센터로서 발군의 기량을 발휘했어요. 피딩의 달인으로 불렸어요. 타고난 재능이란 그런 것이구나 싶어요. 인품도 워낙 좋아서 따르는 후배들도 많았고요. 아쉽게도 1975년 5월 23일 새벽 6시 경에 전라남도 광주시 동성동 극락강변 철길 옆 목초지 부근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어요. 광주에서 경기가 있던날 경기에서 패하고 난 뒤 선수들끼리 싸움이 난적이 있어요. 그걸보면서 당시 지도자 신분이었던 선배가 속이 상했나봐요. 경기에서도 지고, 끝나고는 싸우고, 다 내가 지도를 잘못해서 그런가보다하고 답답한 마음에 밖으로 바람을 쐬러나갔어요.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기차에 치인 것이 사망원인인데 그정도 운동신경을 가진 분이 기차 소리를 못듣고 치였다는 것이 많은 이들을 의아하게 했죠. 솔직히 어지간히 한눈 팔지않는 이상 일반인들도 기차에 치일 확률은 거의 없거든요. 지금도 미스테리 사건으로 남고있는 이유입니다.

​​​​​​Q.열혈남아로서 코칭스탭과의 마찰은 없으셨을까요?
하하핫…, 인터뷰 초반에 입바른 소리 많이하고 높은 직책에 있는 분들 두려워하지않는다고 강조하다보니 이런 질문이 나온 듯 싶군요. 저 그렇게 악동은 아니었습니다. 아닌 것을 아니다고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을 뿐이지 경기장에서는 최대한 코칭스탭의 지시에 따르도록 노력하는 편이었습니다. 제가 선수로 뛰는 동안 코칭스탭이 종종 바뀌기는 했지만 특별한 마찰은 없었어요. 작전타임시에 어 이게 아닌데 싶어도 경기를 지휘하는 것은 코칭스탭이기에 대부분 묵묵히 따랐죠. 일부 선수들 같은 경우 대놓고 이렇게하면 안되잖냐고 말대답도 하고는 그랬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일단은 감독님 말씀을 경청하고 거기에 따르고 이후 개인적인 시간 혹은 식사자리 등에서 의견을 내면 되잖아요. 물론 지금 시대는 또 다를 수도 있어요. 성향과 색깔이 바뀌었으니까요. 저는 당시 기준으로 제 성향을 말한 것 뿐입니다.

​​​​​​Q.오늘 너무 감사했습니다. 앞으로도 과거 농구이야기 할 때 이것저것 자문을 구하고 싶습니다.
그럼요.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당시 그 시절을 저는 거의 잊지않고있습니다. 환경도 안좋았고 고생도 무지하게 했지만 나름대로 낭만이 넘치던 때니까요. 인터넷이 없어서 기록으로 많이 남지못한게 아쉬워요. 잊혀진 좋은 선수들이나 지도자도 많고요. 한번씩이라도 그때 이야기들이 언급되면서 기록으로 조금씩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개인적으로는 몸관리 잘해서 아까 말씀드린데로 80살까지 코트에서 뛰어보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농구인은 농구공을 잡고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지않나싶어요.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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