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복지부동 [뉴스룸에서]
이정애 | 스페셜콘텐츠부장
지난 9일 새벽 2시, 긴 야근을 마치고 돌아온 집 앞에 커다란 택배 상자가 놓여 있었다. ‘가로 45×세로 25×높이 27㎝’. 상자 크기를 보고 허리에 단단히 힘을 줬는데, 머쓱하게도 택배 상자는 ‘반짝’ 가볍게 들렸다. 상자를 여니 ‘가로 100×세로 50㎝’짜리 긴 뽁뽁이(에어캡) 2장으로 돌돌 만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뽁뽁이를 북북 뜯어내니 다시 직사각형 모양의 기다란 상품 상자 하나가 더 나왔다. 금요일, 일요일 퐁당퐁당 긴 야근으로 마트 갈 짬이 없어 온라인 쇼핑몰에서 주문한 ‘150㎖짜리 타바스코 소스’가 이리 귀하게 내 집에 당도했다. 한 쇼핑몰에서 비슷한 품목의 상품 4개를 한꺼번에 주문했는데, 어째 제각각 다른 상자, 비닐봉투에 담겨 온 것인지. 이건 뭐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도 아니고, ‘배보다 배꼽이 더 크네’ 소리가 절로 나왔다.
사흘 뒤 재활용쓰레기를 버리는 수요일, 하늘에선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1015가구 아파트 주민들이 내다 놓은 택배 상자가 산더미를 이룬 채 폭삭 젖어 뭉개지고 있었다. ‘젖은 상자도 재활용이 되나.’ 인터넷 검색창을 뒤져보다 문득 죄책감이 밀려왔다. ‘온라인 쇼핑 좀 작작 하자’는 다짐 한편에 ‘아니, 구매할 수 있도록 해놓고 왜 소비자가 반성하게 만드냐’ 욱심이 일었다.
‘마트료시카 택배’를 받기 이틀 전 환경부는 ‘택배 과대포장 규제를 예정대로 시행하되 계도 기간을 2년간 운영하겠다’고 발표했다. ‘업계의 어려움을 고려해 당분간 시간을 줄 테니 자구책을 찾아보라’는 게 환경부 발표 요지다. 아니 택배 과대포장 규제 기준을 담은 법과 규칙을 개정(2022년)하고 2년간 ‘유예 기간’을 줬는데 이제 와 또 무슨 계도란 말인가. 지난 2년간 업계와 27차례 간담회 등을 하고도 찾지 못한 해결책이 2026년 4월30일이 되면 ‘짠’ 하고 솟아날까. 업계가 2년 뒤 택배 과대포장을 중단하고 재생원료를 이용한, 상대적으로 얇고 가벼운 포장재를 사용하고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당장 업계는 환경부 발표에서 ‘시행’보다는 ‘계도’, 그러니까 ‘단속 없다’는 말에만 귀를 기울이는 듯 보인다. 내가 받은 택배 상자는 그것을 입증하는 증거다.
정부 말에 도통 영이 안 선다. 정부 스스로 정책에 대한 ‘신뢰’를 뒤집어온 탓이 크다. 갈팡질팡, 오락가락한 게 한두번이 아니다. 국민들은 불과 6개월 전, 환경부가 전국적으로 확대하기로 했던 ‘일회용컵 보증금제 의무화’를 시행 직전 자율규제 검토 쪽으로 되돌린 것을 목격했다. 두달 뒤인 11월엔 매장 내 종이컵 사용 금지 규제가 없던 일이 되고, 일회용 빨대와 젓는 막대 사용 금지 계도 기간이 무기한 연장되는 것도 지켜봤다. 당장 일회용컵 보증금제 선도 지역으로 제도가 안착돼가던 제주도에선 이탈 매장이 늘어나며 1년 새 참여 매장이 반토막 났고, 정부 정책을 믿고 종이 빨대 제조에 들어갔던 업체들은 도산 위기에 내몰렸다.
‘일회용품 규제를 시대적 대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분위기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환경부가 앞장서 분위기를 흐리고 있는 셈이다. 오죽하면 국민 10명 중 4명(40.3%)이 ‘재활용이 어려운 플라스틱 제품이 많이 쓰이는 데 책임이 정부에 있다’고 지적하며, ‘카페 등에서 음료를 테이크아웃하거나 음식을 배달할 때 사용되는 일회용품을 줄여나가야 한다’고 사실상 만장일치 응답(94.2%, 이상 환경부 ‘환경보전에 관한 국민의식조사’ 결과)을 하겠는가.
이러다 ‘환경부를 둬서 뭐 하나. 산업통상자원부나 중소벤처기업부, 국토교통부와 통합하면 되지’란 말까지 나올까 걱정이다. 그런데도 ‘환경부는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다’고 매듭을 짓자니 찜찜하다. “모든 부처가 산업부처럼 뛰어달라”, “‘절대적인 보존만이 환경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인류가 발전할 수가 없다”던 ‘브이아이피’(VIP·대통령) 말씀이 귓가에 쟁쟁해서다. 환경부 공무원들에게 (대통령 보기에) 일 잘하는 공무원이 되지 말라고, 오락가락, 갈팡질팡할 바엔 차라리 복지부동하라고 권하고 싶어진다. 이 아이러니를 어찌해야 할까.
hongby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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