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만금 사업 관할권? 큰 틀로 보면 아무것도 아녀”

2024. 3. 19.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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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어은마을·김제 안하마을 이장이 말하는 새만금 사업
어민들에 3년 뒤 농지·양식장 약속 30년 지나도록 공수표
새만금 사업의 최대 피해자는 전북 김제·군산시의 어촌 마을이었다. 지난 3월 7일 김제시 진봉면 심포항에서 과거 어촌마을이었던 안하마을 이장 신익재씨가 만경강 너머의 군산 땅을 바라보고 있다(왼쪽). 같은날 군산시 옥서면에서 어은마을 이장 박만길씨가 만경강 너머의 김제 진봉면을 바라보고 있다. 박씨가 서 있는 땅은 과거에는 황금어장이라 불렸던 어은마을 앞바다였다. 이효상 기자


전북 군산시와 김제시의 새만금 영토전쟁에 소환된 이들이 있다. 새만금 사업으로 가장 큰 피해를 봤지만, 그 이후 오랫동안 잊혔던 어민들이다. 김제시는 새만금 신항만을 가져가야 하는 이유 중 하나로 “끊어진 바닷길”을 꼽는다. 해수를 막는 새만금 방조제가 들어서고 매립이 진행되면서, 만경강과 동진강의 담수와 서해의 해수가 만나던 김제 앞바다 황금어장은 급격히 망가졌다. 새만금 사업이 시작되기 전 7곳이던 어항(어선이 드나드는 항구)은 모두 문을 닫았고, 300척에 달하던 배는 이제 17척만 남아 방조제 밖에서 작업하고 있다. 군산시는 질세라 군산의 어업권 상실 피해가 김제보다 4~5배는 컸다고 주장한다. 군산은 바닷길이 모두 막히진 않았지만, 만경강을 끼고 김제 어민들과 어장을 공유하던 군산시 옥서면·옥구읍 일대의 어민들은 삶의 터전을 상실했다.

지난 3월 7일 군산과 김제에서 과거엔 어촌마을이었던 군산 어은마을과 김제 안하마을의 이장을 따로따로 만나 관할권 분쟁과 새만금 사업에 관해 물었다. 극한 갈등을 이어가는 군산·김제시의 입장과 달리 두 이장의 말에는 공통점이 더 많았다. 과거 황금어장에서 나던 조개를 군산은 ‘백합’이라고, 김제는 ‘생합’이라고 부르는 게 차이라면 차이였다.

1949년생 박만길씨는 1973년 베트남에서 고향 땅으로 돌아왔고 1975년부터 군산 어은마을의 어촌계장을 맡았다. 20대 후반의 청년 계장이었다. 당시만 해도 마을의 호시절이었다. 5t 배를 몰고 나가면 4시간 일하고 만선으로 돌아왔다. 앞바다만 가도 개량조개(노랑조개), 백합, 소라, 고동이 흐드러졌다. 배 탈 것도 없이 갈퀴 하나 들고 갯벌에 가서 2~3시간 일하면 하루 10만원 이상은 떨어졌다. 박씨는 말했다.

“그때는 이 동네 지나다니는 개도 만원짜리 물고 다닌다고 했다.”

“나라가 국민에게 사기 쳐 인생 파탄”


김제 최대 어항이던 심포항 인근 안하마을의 이장 신익재씨도 꼭 같은 말을 했다. 1949년생인 그는 40대에 접어드는 1980년대 후반 이 일대에서 양식업을 하며 배도 탔다. 그는 “그때쯤만 해도 부촌으로 손꼽는다고 해도 거시기(조금 모자라다)할 정도였는데, 지금은 아주 빈촌으로 전락했다”고 했다. 당시 바다를 생계 삼은 이들을 중심으로 110여 가구가 모여 살던 안하마을은 지금은 50여 가구만 남아 반 토막이 났다. 비극의 시작은 새만금 사업이었다.

박씨는 “솔직히 처음 사업한다고 할 때는 기대에 부풀었다. 뱃놈입네, 최하위 취급을 받느니, 나라가 농지라도 분양해 준다고 하니 농사꾼 돼보자 했는데 거꾸로 됐다. 인생이 산산조각, 파탄이 나버렸다”고 했다. 정부는 새만금 사업을 추진하면서 최대 피해자가 될 게 뻔한 어민들 설득에 공을 들였다. 당시에 군산시 옥구군을 대표하는 새만금 사업 피해어민 대책위원장이었던 박만길씨는 국가가 내걸었던 조건을 똑똑히 기억한다. 정부는 피해어민들에게 일단 3년치 순소득을 보상해주고, 3년 안에 바다에 농경지를 만들어서 피해어민들에게 분양해주겠다고 했다. 농업에 적응을 못 하는 어민에게는 새만금 방조제 안쪽에 각각 1000㏊ 규모의 민물 양식장, 해수 양식장을 조성해 분양하겠다고도 했다. 당시 5t 배를 가진 어민은 5000만~7000만원을 받았는데, 정부는 보상 대가로 배를 몰수해 폐선 처리했다. 맨손 어민은 그보다 못한 500만~900만원을 받았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 30년이 지나도 농지·양식장 분양은 이뤄지지 않았다. 박씨는 “정권이 바뀌어도 몇 번이 바뀌었으니 이제 물어보면 ‘언제 그랬냐’ 이거다. 양식장 부지 만들겠다던 곳은 수상 태양광 부지로 기업에만 분양해준다고 한다. 정말로··· 피가 끓는다”고 했다.

신씨도 그 달콤했던 말을 분명히 기억한다. 그는 “어민들이 좋아라 했지. 바닷일 힘들잖아요. 농사지으면 편하겠구나 하고 홀딱 동의해 준거여. 지금 요놈들이 5년마다 새만금 기본계획을 바꾼다. 하도 오래 끄니까 주무부서도 바뀌었어. 옛날에는 농림수산부였으면 지금은 수산이 빠지고 농림축산식품부가 됐다. 바다 얘기를 꺼낼라면 지들끼리 핑퐁 친다.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쉬운 말로 국가가 국민 사기 친 거야”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노태우 정부 때 최초로 나온 새만금 기본계획은 매립지 전체를 농지로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이내 쌀이 남아돌았고, 노무현 정부에서는 매립지의 72%를 농지로, 28%를 산업·관광 등 비농지로 조성하는 기본계획을 내놓는다. 이명박 정부 때 농지 비중은 다시 30%까지 줄어들었고, 윤석열 정부는 기업 활동에 초점을 맞춰 기본계획을 전면 재검토하고 있다. 큰 그림 없이 ‘낙후된 전북 살리기’라는 미명 아래 출발한 사업이 정권 입맛대로 요동치는 동안, 터전을 잃은 어민들의 입지는 급격히 쪼그라들었다. 그래서 전라북도는 살아났을까.

“세계적인 갯벌 없애 전북 전체 다 죽여”


박씨는 새만금 사업이 “인근 지역 어민들만 몰살시킨 게 아니라 전라북도를 죽였다”고 했다. 그는 “지금 그 세계적인 갯벌이 남아 있었으면 관광자원으로라도 활용해 적어도 인근 주민은 먹고살 수 있었을 것 아니냐. 새만금 사업이 지역주민들 배를 불렸냐. 이미 배부른 사람들, 건설업하는 사람들만 배불렀다”고 했다. 어은마을 앞바다가 매립되고 선착장이 없어지면서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절반은 죽거나 마을을 떠났다. 일부는 인근에 들어선 골프장 이용객들이 머물 민박집을 차렸지만, 이내 호텔이 들어서면서 집을 놀리고 있다. 극소수는 방조제 바깥으로 나가 어업을 하거나, 방조제 안으로 배를 몰고 나간다. 방조제 안에서는 숭어나 민물장어가 잡히기도 했지만, 물이 흐르지 않으니 나날이 수질이 악화하고 있다. 정부는 피해 어민들이 법인을 만들면 농지를 임대하고 있다. 우선 임대라고 하지만 무상 임대는 아니다. 식용작물을 못 짓게 해 사료작물만 재배한다. 용돈이나 건지는 수준이다.

신씨는 “새만금 사업이 내 목줄을 쥔 느낌”이라고 했다. 그는 여전히 방조제 안쪽에 배를 대두고 있지만 가끔 한 번씩만 물에 나간다. 한때는 섬진강에서 나오는 민물 재첩이 잡히기도 했지만, 수질이 나빠서인지 갑자기 폐사했다. 매립공사가 계속되다 보니 배를 몰기도 어렵다. 조금만 나가도 배 바닥이 긁히는 느낌이 난다. 그는 “결국은 건설업자를 살리기 위한 프로젝트였다. 우리한테 득이 뭐가 됐어. 가슴이 아파요. 말을 잘 못 해서 그렇지 속은 피눈물 나는 사람이 수없이 많아요”라고 했다.

신씨는 군산과 김제 간 관할권 분쟁에 대해 담담히 말했다. 그는 “큰 틀로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거여. 김제 진봉면, 군산 옥서면·옥도면 사람들이 다 갈 수 있는 바다로 해놓으면 고기 같이 잡고 그러면 되지. 소멸하기 전에 새만금시로 혀가지고 소멸 안 되게 하면 되지. 군산에 흡수되는 것이 뭐여? 흡수돼서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도 아니고”라며 웃었다.

이효상 기자 h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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