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칼럼] 정지용 시인과 육영수 女史 생가의 봄

경기일보 2024. 3. 19.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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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평섭 前 세종특별자치시 정무부시장

충북 옥천군 옥천읍에는 구읍이라고 불리는 전통마을이 있다. 마을 이름이 ‘향수길’로 바뀔 만큼 ‘향수’의 시인 정지용 생가가 있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의 생가가 있는 특별한 마을이다. ‘옛 이야기 지즐대는/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름 울음을 우는 곳/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우리 국민 모두의 사랑을 받는 ‘향수’가 탄생한 마을답게 시인의 마을은 그야말로 시골스럽다.

시인의 생가를 돌아보며 느끼는 것은 안타까운 그의 죽음이다. 그의 죽음에 대한 여러 설이 있으나 가장 신뢰성 있는 사실로는 1950년 6·25전쟁 시 북한군에 체포돼 동두천에서 평양으로 가던 중 미 공군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는 북으로 끌려가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고/예쁠 것도 없는/사철 발 벗은 아내가 이삭 줍는’ 이곳 고향을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그가 6·25전쟁으로 마흔 여덟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남으로써 ‘향수’ 같은 시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정지용 시인의 생가 가까이에는 마흔 아홉 나이에 세상을 떠난 육영수 여사의 생가도 자리잡고 있다. 육영수 여사는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으로 1974년 8월15일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했다가 북한의 지령을 받은 재일 조총련계 문세광이 쏜 총을 맞고 운명했다. 그런 면에서 한 마을에서 태어난 40대 후반의 두 인물이 아깝게 세상을 떠났는데 그 원인을 보면 6·25전쟁이라 하겠다.

육 여사 생가 역시 아픈 상처는 정지용 시인의 생가와 같지만 규모는 훨씬 크다. 99칸 대궐 같은 기와집으로 초가집의 정지용 생가와는 비교가 안 된다. 육 여사는 1925년 이곳에서 태어나 1950년 육군 소령 박정희와 결혼할 때까지 여기에서 살았다. 물론 서울에서 배화여고를 다닌 것을 빼고는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육 여사의 방은 큰 집에 비하면 너무 작은 골방 같다. 여기에는 육 여사 관련 유품들도 보관돼 있는데 박정희 소령이 군복을 입은 채 약혼 사진을 찍은 것이 이채롭다. 더 특이한 것은 결혼사진에 육 여사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육 여사의 아버지는 이들의 결혼을 끝까지 반대했고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무엇보다 육 여사 생가가 눈길을 끄는 것은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심지어 관광버스를 전세 내 오기도 한다. 그래서 방문 시간을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30분으로 제한하기까지 한다. 육 여사가 문세광의 총탄을 맞고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됐는데도 왜 사람들은 그를 잊지 못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은 ‘그분은 옛날 왕조시대 같으며 국모(國母)다운 처신을 했다’고 표현했고 또 다른 사람은 ‘그분은 언제나 한복만 입고 사치를 몰랐으며 검소했다’고 대답한다.

그런가 하면 육 여사가 가난한 사람들, 전방에 있는 군인들, 한센병 환자 같은 난치병 환자들을 잘 돌봐 준 것을 말하기도 한다. 사실 육 여사는 1971년 나주에 있는 한센인 집단촌을 방문해 그들을 따뜻이 보듬어 준 것을 비롯해 1972년에는 전북 익산에 있는 한센인촌을 방문하고 한센인은 대중목욕탕을 이용할 수 없음을 알고 그들을 위한 목욕시설을 해주는 등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정지용 시인과 육영수 여사의 생가가 있는 이곳 마을에도 지금 봄이 찾아오고 있다. 산수유, 목련, 졸졸대는 실개천.... 전국이 선거바람으로 뜨겁지만 이곳은 너무 조용하다. 핏대를 올리며 싸우는 사람도 없고, 바람은 부드러운 남풍이다.

평화란 이런 것이란 생각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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