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의 사진집 이야기 <73> 짐 골드버그(Jim Goldberg)의 '커밍 앤드 고잉(Coming and Going)'] 평생에 걸친 일상의 기쁨과 슬픔을 담은 스크랩북 같은 책

2024. 3. 18.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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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골드버그(Jim Goldberg)의 ‘커밍 앤드 고잉(Coming and Going)’ 표지. 사진 김진영

‘살아온 인생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라는 표현이 있다. 주마등은 달릴 주(走), 말 마(馬), 등불 등(燈), 무엇이 언뜻언뜻 빨리 지나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중국 고대 시절, 사람들은 등을 만들어 달았다. 이때 등의 바깥 틀에 종이나 천을 붙이고 중간 틀에는 말이 달리는 그림을 붙였다. 등 밑에서 촛불을 밝히면 등 내부의 공기가 순환하는데 이때 중간 틀이 돌아가면서 말 그림이 빠르게 지나가듯 보이게 된다. 여기에서 무언가가 언뜻언뜻 빠르게 지나간다는 뜻이 유래됐다.

주마등처럼 지나온 인생이 한 권의 책이 된다면 그 책은 어떤 모습일까. 짐 골드버그(Jim Goldberg)는 1980년부터 2023년까지의 자전적 삶의 이야기를 담아 ‘커밍 앤드 고잉(Coming and Going)’을 만들었다. 오랜 시간 일상의 순간들을 촬영하고 이를 자유롭게 콜라주하고 여기에 메모를 적고 편지를 모아 재구성한 작업을 담고 있다.

부모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 사랑과 결혼의 순간, 인생을 변화시킨 아이의 탄생과 성장, 이혼의 아픔, 새로운 사랑의 발견 등 삶이 담긴 개별 이미지와 개별 이미지를 결합한 이미지 콜라주, 수많은 메모가 담긴 이 책에서 골드버그는 자신의 인생을 한 권의 책으로 표현한다.

책은 크게 두 파트로 이루어져 있다. 전반부는 부모 허브 골드버그(Herb Goldberg)와 릴 골드버그(Lil Goldberg)에 초점을 두고 시작된다. 1980년 골드버그의 아버지는 플로리다에 오렌지 나무를 심었다. 시간이 흘러, 그 나무는 부러진 그루터기만이 남아 있고, 그 앞에는 나이 든 부모가 서 있다. 그리고 이들의 암 투병이 시작된다. 이 사이 골드버그는 사랑에 빠진다. 검은 수영복을 입은 젊은 여성의 폴라로이드 사진이 있고, 여기에 ‘내가 사랑에 빠진 순간’이라고 적혀 있다. 이들은 결혼하고 아이 루비(Ruby Goldberg)를 낳는다. 아버지는 암에 걸려 1993년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골드버그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배경으로 자신의 시계를 촬영해 죽음의 순간을 기록한다.

후반부의 초점은 부모로부터 아이로 점차 옮겨간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7년 후, 어머니 역시 79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골드버그는 이때도 임종한 어머니를 배경으로 사진의 시계를 촬영해, 죽음의 시간을 표시한다. 아내와는 이혼하게 되는데, 별거하면서 협상해야 할 내용을 적은 리스트 같은 이혼에 대한 내용이 등장한다. 골드버그는 딸이 태어나고 처음 학교에 가고 계속해서 성장해 가는 루비의 모습뿐 아니라, 무릎을 꿇고 루비의 장난감을 촬영하는 등 루비에 대한 사랑을 사진에 담는다.

김진영 사진책방 ‘이라선’ 대표 서울대 미학과 박사과정

다큐멘터리적 관찰을 통한 사진뿐 아니라, 가족의 흔적을 수집해 촬영한 사진들 역시 무척 인상적이다. 아버지가 생의 마지막 면도를 마치고 남겨진 흔적을 촬영한 사진, 2001년부터 2023년까지 매년 일부를 간직해 촬영한 딸의 머리카락 사진, 유아용 칫솔부터 성인용 칫솔에 이르는, 그간 딸이 사용한 칫솔 사진 등 골드버그는 사랑하는 이의 작은 흔적도 애정으로 담아낸다.

부모가 아프고 결국 돌아가시지만 새로운 세대의 아이는 태어난다. 골드버그는 부모가 돌아가는 슬픔을 겪는 동시에 부모가 되는 기쁨을 경험한다. 책에는 이러한 시간의 흐름이 의도적으로 병치돼 있다. 루비의 첫걸음을 포착한 한 쌍의 폴라로이드 사진은 병든 아버지의 불안한 장면으로 이어진다. 웃는 할머니와 웃는 루비의 닮은 얼굴은 절반씩 결합돼 보인다. 책이 진행되는 동안 독자는 시간이 흘러가고 한 세대가 다른 한 세대에게 삶을 넘겨주는 장면을 보게 된다.

골드버그는 일반적으로 프린트한 사진부터 폴라로이드 사진, 밀착 인화지 등 다양한 형태의 사진을 사용하고, 손으로 마구 쓴 글씨부터 인쇄된 텍스트로 가득 찬 페이지까지 글자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일부 사진은 찢어지거나 의도적으로 필름 가장자리의 구멍을 함께 보이도록 수록해, 사진의 매체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수많은 이미지가 잘라내고 조합돼 정교한 콜라주로 만들어진다. 수많은 사진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페이지들을 통해 수많은 순간으로 수놓아진 인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다양한 색상의 배경이 사용돼 페이지마다 독특한 느낌을 주고, 이미지는 두 페이지에 걸쳐 펼쳐져 있기도 하고, 또 때로는 많은 여백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다채로운 레이아웃 전략은 예상치 못한 흐름으로 독자를 끌고 가며, 여러 가지 종류의 사건과 추억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이미지와 텍스트를 엮어내는 골드버그 특유의 다큐멘터리 스토리텔링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책은 여러 사진의 결합으로 이뤄진 페이지들을 통해 수많은 순간으로 수놓아진 인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다양한 색상의 배경이 사용돼 페이지마다 독특한 느낌을 준다. 이미지는 두 페이지에 걸쳐 펼쳐져 있기도 하고, 때로는 많은 여백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미지와 텍스트를 엮어내는 골드버그 특유의 다큐멘터리 스토리텔링 방식이다. 사진 김진영

“책에서는 정말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나는 정말 많은 이미지를 수집한 다음 의미를 찾기 위해 이미지를 선별했다. 나는 사진의 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사진이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을까에 대한 깊은 불안감도 가지고 있다. 나는 작품을 어떻게든 성장시키려면, 본질적으로 더 나은 예술이 되도록 거기에 뭔가를 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인생이 한 권의 책이 된다면, 그 책은 정갈한 가족 앨범 같은 형태는 아닐 것이다. 우리는 보통 가족 앨범에 소중한 순간, 행복한 순간 등 기념하고 간직하고 싶은 장면을 정갈하게 보관한다. 지우고 싶은 아픈 순간을 앨범 안에 정성스레 보관하는 사람은 보통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가족 앨범처럼 아름답고 행복하지만은 않다. 잠시 인연을 맺었지만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죽음 등을 인생에서 피할 수 없다.

골드버그는 성공이나 기쁨의 순간만이 아니라, 부모를 상실한 경험이나 한때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혼과 같은 고통스럽고 사적인 순간을 파고들고 공유하는 것을 결코 주저하지 않는다.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책은 삶의 경험적 현실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나의 시도다. 나는 평범한 삶에서 무언가 보편적인 것을 표현하고자 했다. 죽음, 출생, 이혼, 질병,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여기에 들어 있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이지만,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인생이 그러하듯, 이 책은 엄격한 순서가 아니라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순서로 사진을 전개시킨다. 우리의 삶은 전통적인 기승전결의 내러티브를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골드버그는 자신의 삶을 조각이 들어맞지 않는 퍼즐, 혹은 어딘가 엉성하게 결합한 태피스트리처럼 보여주는 방식을 택했다. 모든 단편이 모여 이루어진 장편, 인생은 단지 그런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많은 작가가 자신의 가족사진이나 일상을 담은 스냅 사진을 작업으로 선보인다. 그것이 작가 개인의 영역에서 머물지 않고 독자에게 울림으로 와닿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짐 골드버그의 ‘커밍 앤드 고잉’은 지극히 사적인 시각적 회고록이지만, 이 책의 울림은 사적인 영역을 넘어선다. 평생에 걸친 일상의 기쁨과 슬픔으로 가득한 삶의 스크랩북 같은 이 책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반추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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