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 더미 속 두 눈과 마주쳤다… 그게 사람이었나 길고양이였나[소설, 한국을 말하다2]

박동미 기자 2024. 3. 18.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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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천선란
새벽 배송 - 새벽 속
일러스트 = 의자 작가

“습관이 생겼어요. 시계를 자꾸 봐요. 해가 떠도 밤 같아요. 해가 없어야 마음이 편한 거 있죠.”

윤애는 내용물을 다 마신 종이컵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지은이 윤애가 쓴 문장을 읽고 있는 순간부터 윤애는 긴장감에 떠오르는 모든 말을 계속 내뱉는 중이었다. 윤애가 쓴 건 에세이도, 소설도 아닌 모호한 글이었다. 일기 같지만 화자가 자신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지만 소설처럼 주인공에게 사건이 일어나는 건 아니라는 점에서 그랬다. 그래도 운전대를 책상 삼아 틈틈이 쓴 문장들이었다.

“새벽이 지나면 밤이 온다.”

지은은 그 문장을 소리 내어 읊다가 픽,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지만 윤애는 그보다 지은이 자신의 글을 읽었다는 것에, 더 정확하게는 소리 내어 한 번 읊조리고 눈으로 다시 한 번 읽었다는 것에 들떴다. 지은은 예술대학교에서 시나리오를 쓰는 학생이었다. 윤애는 맹렬한 비난이어도 좋으니 지은의 평이 듣고 싶었다. 하지만 지은은 입술을 댈 수도 없이 짧아진 담배를 꾸역꾸역 입에 물고 쥐고 있던 목장갑을 꼈다. 그리고 시시하게 물었다.

“문학청년? 국문과?”

윤애는 불어불문학과였다. 한때 불어에도, 문학에도 관심이 없던 학창 시절이 있었다. 열아홉 살까지 교재 외의 다른 책은 쳐다보지도 않던 윤애였으나 어느 날 문제집을 사러 대형 서점에 들렀다가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홍보 띠지를 보았다. 평소에는 스쳐 가지도 않았을 문학 코너에 발을 들인 것도, 그 문장에 사로잡혀 책을 집어 든 것도 윤애는 운명이라 여겼다. 무심한 표정으로 카메라가 아닌 허공 어딘가를 바라보는 흑백 사진 속의 여자. 고독이라는 단어를 몸에서 지울 수 없을 것 같은 여자. 안개 속에 갇히고도 애써 길을 찾으려 할 것 같지 않은 여자. 숨 가쁘게 길을 찾으려 애를 쓰는 자신과 다르게 느껴져서일까. 한 번도 소설을 제 돈 주고 사본 적 없던 윤애는 교재 사이에 소설 한 권을 껴 넣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윤애는 문학과 사랑에 빠졌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 작가를 사랑하게 됐다.

“번역으로 어떻게 먹고살게?”

짧은 휴식을 마치고 물류 창고로 돌아가는 길에 지은이 물었다.

“못 벌죠. 그것만으로는.”

해마다 일이 줄었고 단가가 낮아졌다. 윤애는 그 작가의 한국어 담당 번역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으나 번역의 일은 좀처럼 기회가 닿지 않았다. 심지어 통번역을 할 수 있는 일조차 줄었다. AI로 돌린 번역을 검수하는 일만이, 아직 대학원을 졸업하지 못한 윤애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하는 거잖아요, 이거. 필요할 때마다 할 수 있고, 돈도 잘 벌리고. 좋은데요? 병행하기 이렇게 좋은 일 없어요.”

“오래 머물면 새벽에 갇힌다. 조심해.”

이것이야말로 시나리오를 전공하는 사람의 표현력인가. 윤애는 감탄했다. 그뿐이었다. 지은의 말은 윤애에게 그 정도로만 닿았다. 지은은 그날을 끝으로 더는 배송 일을 나오지 않았다. 들리는 말에 따르면 일 처리가 엉성해서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는데 자세한 건 아무도 모르는 듯했다. 윤애에게도 지은의 번호 따위 없었기에 물을 수 없었다. 그래도 상관없지 않은가. 유명 예술대학교에서 시나리오를 전공한 지은이 이 일을 1년 3개월째 하고 있었고 이제 슬슬 제 전공을 찾아갈 때라 생각해, 오히려 잘된 일 같았다.

지은과 윤애처럼 대학을 졸업하고도 배송 일을 하는 또래는 달마다 늘어갔다. 번거로운 절차 없이 필요할 때마다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배달시키는 것만큼이나 손쉽게. 단기 일자리조차 구하기 힘든 요즘 시대에 얼마나 보석 같은 일자리인가? 윤애는 지은에게 말했듯이 학업과 일을 병행하기에 이보다 좋은 일은 없다고 느꼈다. 더욱이 요즘처럼 물가가 천정부지로 솟을 때는 한 달 기다려 받는 월급보다 그날 받는 일급이 더 실용적이었다.

대학원 진학을 꿈꾼다면 가장 먼저 면허를 따라던 선배의 말을 따라 딴 면허도 유용하게 쓰였다. 처음에는 배달 일도 고려했으나 오토바이로 도로와 인도를 넘나드는 험난한 일은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자전거나 걸어서 배달하는 것도 고민했지만 그걸로는 필요한 일당을 채울 수 없었다. 그때 우연히 배송 일을 시작한 또래 여자의 브이로그가 알고리즘에 뜬 것이다. 원하는 날,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 일할 수 있다. 왜 좋은 대학을 나와서 이런 일을 하는지 묻는 면접관도 없었다. 필요한 것은 체력과 운전면허. 급한 대출금을 갚을 목적으로 한두 번 하고 말려 했지만, 이곳에서 만난 이들 모두가 새벽 운동처럼 일을 하고 해가 떠 있는 시간 동안에는 학업과 본업에 매진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쉽게 그만둘 수 없게 되었다. 그만두면 자신이 뒤처지는 것만 같았다.

일을 다시 시작하려 했으나 윤애는 그제야 핸드폰을 휴게실에 두고 나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두가 물품을 가지고 하나둘 출발하는 시각이었다.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새벽 배송 마감 시간에 걸릴 거였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지만 딱 하나 피곤한 게 있었다면 이런 식으로 시간에 쫓긴다는 거였다. 해가 뜨기 전에 모든 걸 해야 한다. 해가 뜨기 전에…….

핸드폰을 챙겨 돌아왔을 때 사람들 대부분이 떠난 후였다. 윤애는 서둘러 배달 물품을 꾸렸다. 그러다 멀지 않은 곳에서 퍽! 하고 무언가를 내리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누군가 물건을 떨어트렸다고 생각했다. 물건이 망가진 게 아니어야 할 텐데, 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찰나 또 한 번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조금 더 강하고 둔탁한 소리였다. 떨어트렸다기보다 힘을 주고 내리친 듯한. 마치 불길함을 암시하는 소설의 구절을 마주한 듯한 섬뜩함이 윤애를 덮쳤다. 윤애가 소리 나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차고 있던 스마트 시계가 울렸다. 지금 출발해야 새벽 배송을 마칠 수 있다는 알람이었다.

감시카메라가 닿지 않는 사각지대, 윤애는 쓰러진 사람을 발견한다. 스마트 시계가 더 거세게 울린다. 해가 뜬다. 곧 있으면 해가 뜬다. 어물쩍거리다 해가 뜨면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말 거란다. 그렇게 말한다. 윤애의 걸음이 더뎌진다. 잘못 디뎌서 넘어지신 거겠지. 잠깐 기절한 거겠지. 곧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겠지. 그러니 돌아가야 한다. 윤애는 새벽이 지나기 전에 배달을 마쳐야 했다. 그렇게 몸을 돌리던 순간, 윤애는 상자 더미 속 두 눈과 마주쳤다. 정말 눈인가? 사람의 눈인가? 지난번처럼 길고양이가 들어온 건 아닌가? 그러니까 일하던 사람은 잠시 기절한 것이고 상자 더미에 있는 것은 길고양이인 것이다. 윤애는 그날 아슬아슬하게 배송을 마쳤다. 마지막 집에서는 출근하려고 나오던 수령인과 마주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수령인은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존재감을 드러내지 말아야 할 사람이 불쑥 모습을 나타냈을 때 보이는 불편함이었다. 윤애는 땀으로 흠뻑 젖은 모자를 더 푹 눌러쓰며 자리를 떴다. 해도 안 떴는데, 출근을 일찍 하시는구나, 생각하며.

다음 날, 새벽 배송을 위해 모인 일꾼들이 수군거렸다.

“죽었다며.”

오늘 가야 할 지역을 확인하던 윤애가 그들을 쳐다보았다.

“또 심장마비? 아니면 뇌졸중?”

“말을 자세히 안 해서 모르겠는데, 뭐 그런 거 아니겠어? 근데 유족들이 평소에 앓던 지병이 없었다고 회사 고소한다던데.”

“그게 쉽나. 죽은 이가 몇 살이래?”

“서른셋.”

안타까운 탄식이 터지고, 그들은 시계를 보더니 서둘러 움직였다. 윤애는 지난밤 보았던 길고양이의 눈을 떠올렸다. 그게 사람이었나, 길고양이였나. 헷갈리기 시작했다. 새벽이었고 어쩐지 창고에는 안개가 가득했던 것 같다. 그래, 그건 길고양이였지. 윤애는 그렇게 곱씹었으나 일하는 내내 길고양이의 눈만 떠올랐다. 그렇게 길고양이가 창고에 있으면 위험한 거 아닌가. 그날, 윤애는 일이 끝나고 담당자를 찾아가 창고에 길고양이가 들어온다고, 어제 새벽에 상자 더미에 있던 두 눈을 봤다고 말했다. 담당자는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흘려듣다가 문득 윤애의 명찰을 흘겨보았다. 그게 끝이었다. 이제 길고양이가 창고에 들어오지 못할 테니 다 된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후 내내 심장이 뛰어, 자야 할 시간에도 잠들지 못했다. 오후 햇살이 유독 강렬했다. 햇살은 안개처럼 방에 들어찼다. 침대에 앉아 새벽에 보았던 쓰러진 사람과 길고양이의 두 눈을 번갈아 떠올렸다. 그렇게 몇 시간을 앉아 있었다는 걸, 출근해야 할 알람을 듣고 깨달았다. 윤애는 틈틈이 볼 책 한 권과 노트를 챙겨 앱에 접속해 출근을 희망했지만 접근할 수 없다는 알람이 떴다. 윤애는 그럴 리 없다며 몇 번이고 다시 접속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이제 새벽은 시작이었고, 윤애는 새벽 속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청년 몰려드는 배송, 그 새벽의 이면엔 함정·위험 너무 많아

■ 작가의 말

‘새벽 배송’ 서비스는 지금 한국인의 일상을 지배하는 풍경 중 하나다. 팬데믹을 겪으며 관련 산업은 더욱 커졌고, 종사자 수도 급증했다. 소설 ‘새벽 속’은 대학 졸업 후 배송 일을 하는 청년들을 통해 우리가 잘 보지 못하는 새벽의 이면을 그린다. 천선란 작가는 “최근 배송 일을 하는 지인이 느는 걸 보며, 문득 어떤 사람들이 그 안에 있을까 궁금해졌다”고 했다. “언제나 그랬듯 이렇게 ‘와글와글’한 곳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함정과 위험이 너무 많으니까요.”

소설은 배송 기사들의 열악한 근무 환경뿐만 아니라 청년 취업 문제와 고용 불안정까지 ‘새벽’ 속을 두루 살핀다. 그 안에서 ‘윤애’와 ‘지은’은 꿈과 현실의 간극을 좁히려 애쓰지만, 한 뼘도 메우지 못한다. 천 작가는 “많은 기사를 읽고 인물을 생각하다 보니 어느 것 하나에만 집중할 수 없었다”면서 “모든 것은 긴밀하게 연결돼 있었고, 결국 그 모든 걸 말하는 이야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우주를 소재로 한 과학소설(SF)을 선보여 온 천 작가는 이번 작품이 SF는 아니지만 작업 자체가 매우 ‘SF적’이었다고 했다. “새벽에 쥐도 새도 모르게 놓여 있는 배송 물품을 볼 때마다 이 물건이 건너왔을 새벽을 자주 생각했어요. 우주의 공허가 아닌 새벽의 공허를 느끼는 씁쓸한 작업이었습니다.”

■ 천 작가는

1993년생. 2019년 등단 후 ‘천 개의 파랑’ ‘어떤 물질의 사랑’ 등을 썼다.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수상.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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