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진의 웨이투고] 나를 나답게…정교한 취향의 이유

조민진 작가 2024. 3. 18.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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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먹는 샌드위치가 있다.

매장에서 주문할 때마다 똑 부러지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은근히 기분이 좋아진다.

하나하나 주문할 때면 은연중에 '샐리'가 떠오른다.

"피클 빼고 올리브 많이요"를 말하면서 흡사 샐리처럼 정교한 취향을 드러낼 수 있어 내심 흡족했던 나는 업체가 구성한 베스트 조합이 궁금해서 주관을 포기하고 새 메뉴를 주문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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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진 작가
종종 먹는 샌드위치가 있다. 매장에서 주문할 때마다 똑 부러지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은근히 기분이 좋아진다. 먹는 것에 대한 내 취향과 기호를 구체적으로 다지는 듯한 느낌이 만족스럽다. 빵과 치즈, 굽기 여부, 야채와 소스 등을 모두 직접 골라야 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소신이 필요하다. 빵은 대체로 납작한 '플랫 브레드', 치즈는 기분에 따라서 일반 슬라이스 치즈인 '아메리칸'이나 데우면 녹아서 끈적해지는 '모짜렐라', 빵은 꼭 굽고, 야채는 피클만 빼고 올리브를 많이 넣고, 소스는 주로 매운 '핫 칠리' 한 줄과 달콤한 '스윗 어니언' 두 줄. 내 소신껏 만들어진 샌드위치 맛의 우열(?)을 객관화하긴 어렵지만 직접 선택해선지 늘 맛있다. 입 안 가득 우걱우걱 씹어먹으면서 내가 나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하나하나 주문할 때면 은연중에 '샐리'가 떠오른다. 노라 에프런이 각본을 쓴 로맨틱 코미디의 고전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에서 맥 라이언이 연기한 샐리 말이다. 친구에서 연인이 되는 해리와 샐리의 우정과 사랑 여정을 다룬 영화다. 해리는 이제 막 만난 샐리가 음식을 주문하는 모습에 매력을 느낀다. 좀 길지만 과감히 옮겨보는 샐리의 대사. "샐러드 주세요. 드레싱은 따로 주시고요. 애플파이도 파이는 데워 주시고 아이스크림은 따로 주세요. 아이스크림은 바닐라 말고 딸기로요. 만약 아이스크림이 없으면 생크림으로 주시는데, 깡통에 든 거면 안돼요. (그럼 파이만 줘요?) 파이만 주시되 그땐 데우지 마세요." 샐러드와 애플파이 정도에 대한 취향과 기호가 이토록 구체적이고 분명하다니! 취향이나 기호는 반복적이다. 그래서 영화를 끝까지 보면 알 수 있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소스를 따로' 주문하는 사람. 탕수육을 먹는다면 '부먹'(탕수육에 소스를 부어 먹음) 말고 '찍먹'(탕수육을 소스에 찍어 먹음)파일 것이다. 취향과 기호는 사람을 그 사람답게 만든다.

샐리가 떠난 연인의 결혼 소식에 엉엉 울며 "나는 까다로워"(I am difficult)라고 자책하자 해리는 "도전적인 거야"(You're challenging)라고 달래준다. 까다로움에 대한 다정한 재정의. 정교하고 견고한 취향은 까다로움에서 비롯되고 명확한 취향을 가진 사람은 도전적인 만큼 매력적이라고 여기며 나는 봤던 영화를 보고 또 봐왔다. 까다롭다는 건 구체적으로 원한다는 것이고 구체적으로 원하는 게 있어야 도전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주문하면 구체적으로 얻는다. 샌드위치조차 그렇다. 나는 구체적으로 단호한 샐리가 좋다. 자신을 알고 어필할 줄 아는 사람은 매력적이다.

종종 먹는 샌드위치 매장에 최근 새 메뉴가 나왔다. 먹는 재료를 일일이 고를 필요 없이 아예 빵

부터 소스까지 '베스트 조합'으로 정해둔 것이다. '쉽고 빠른' 주문을 돕는다는 취지다. "피클 빼고 올리브 많이요"를 말하면서 흡사 샐리처럼 정교한 취향을 드러낼 수 있어 내심 흡족했던 나는 업체가 구성한 베스트 조합이 궁금해서 주관을 포기하고 새 메뉴를 주문해봤다. 역시 쉽고 빨랐고......뭐, 맛도 괜찮았다. 하지만 샌드위치의 매력이 반감됐음은 부인할 수 없다. 겉과 속을 일일이 직접 결정하면서 느꼈던 잔잔한 쾌감이 사라졌고 나의 선택보다 남의 선택을 더 신뢰한 것만 같아 일종의 무력감이 스쳤다고 할까. '쉽고 빠르게'는 때로 개인보다 단체를, 여유보다 쫓김을, 까다로움보다는 순함을 겨냥한 구호다. 일률적이어야 쉽고 빨라진다. 언제나 좋은 걸까? 매력을 잃는 일인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나도 너도 매력을 잃으면 사회 전체가 지루해질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더 쉽고 더 빠르기 위해 나를 나로 발견하게 해주는 취향과 기호를 포기한 적은 없었던가. 어쩌면 그 탓에 삶이 지루했을수도, 매력을 잃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조민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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