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와 농민 인권] 농촌 노후주택 ‘재해’ 취약…농민 삶이 위태롭다

이재효 기자 2024. 3. 1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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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와 농민 인권] (상) 농촌 주거권 실태
농산어촌 집 평균나이 33.4세
냉난방 어렵고 연료비 부담 커
균열·붕괴 같은 구조적 위험도
에너지바우처 등 지원책 ‘한계’
대상 확대·집 수리 적극 개입을

지구온난화가 본격화되며 기후위기는 위협이 아닌 현실이 됐다. 기후변화는 지구의 식생과 자연환경을 바꿔 인류의 안녕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특히 농민은 자연재해에 취약한 주거·생활 환경에 살면서 기상조건에 좌우될 수밖에 없는 농사로 생업을 영위하는 만큼 기후위기 시대에 심각하게 인권을 침해받고 있다. 기후위기에 따른 농민 인권의 실상을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한다.

“폭염이 두렵다. 하지만 폭염보다 더 무서운 건 전기계량기다.”

“기록적인 폭우와 산사태로 집이 무너지고 마을 전체가 고립됐다.”

“난방비가 무서워 보일러를 틀지 못한다. 전기장판을 틀고 두꺼운 외투를 입어야 잘 수 있다.”

폭염과 폭우 등 ‘100년 빈도’로 일어나는 이상기상이 일상화하면서 주거권을 위협받는 사례가 흔해졌다. 주거권은 세계인권선언 제25조에 따라 인간의 존엄성에 적합한 주택을 향유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본지는 기후위기로 인한 농촌 주거권 실태를 살피기 위해 전북 남원을 찾았다. 남원시 향교동 용정마을은 행정구역상 도시로 분류되지만 실제론 작은 논과 밭이 대부분인 농촌지역이다. 이곳 주민들은 최근 기후위기를 몸으로 느낀다고 입을 모았다. 통장 양경숙씨(70)는 “과거엔 된장·고추장을 독에 담아 장독대에 뒀지만, 요즘은 폭염이 심해진 탓에 야외에 장류를 보관했다간 상해버리기 십상”이라며 “전부 냉장고에 넣어놓는다”고 한탄했다.

기후위기가 심각해질수록 집은 안전한 곳이 아닌 재난지역이 됐다. 특히 농촌엔 노후주택이 많아 주거권 보장이 쉽지 않다. 용정마을 부녀회장인 오성례씨(73)는 “이 동네 주택 대부분이 지어진 지 수십년은 됐다”며 “노후주택은 단열 기능이 떨어져 냉난방에 취약하지만 새 집을 지을 여력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말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최근 발표한 ‘기후위기와 주거권에 관한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조사한 지역 내 농산어촌 주택 157채의 평균 나이는 33.4년이었다. 40년이 지난 곳도 39%에 달했다. 농촌지역에 노후주택이 많은 현실은 인구주택총조사 통계에서도 확인된다. 2022년 기준 지은 지 30년이 넘은 주택 비율이 높은 지역은 전남(39%)·경북(33%)·전북(32%)이었다. 도시 비율이 높은 특·광역시 평균은 24%였다. 기자가 둘러본 양씨의 집도 73년 된 주택이었다. 집 안에 들어가니 3월 한낮에 보일러가 돌아가고 있었지만 따뜻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농촌에서 주로 쓰는 기름보일러도 주거권 침해에 한몫한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농촌주민의 난방 실태와 정책적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기준 농촌 면(面)지역 개별난방가구 중 도시가스를 사용하는 비율은 21.4%지만 도시지역은 92.5%에 달했다. 반면 면지역 개별난방 가구 중 기름보일러를 사용하는 비율은 48.7%로 도시(4%)에 견줘 눈에 띄게 높았다.

이 때문에 농촌주민들은 연료비 부담을 상대적으로 크게 진다. 한달 기준 농촌가구의 평균 연료 구입비는 16만5000원, 도시가구는 12만3000원이었다. 1월에는 남원시 산동면에 거주하던 노부부가 난방비를 아끼기 위해 온수매트와 전기장판을 겹쳐 사용하다 화재로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양씨는 “혼자 사는데 겨울에 한달만 보일러를 틀어도 기름값이 50만원은 든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노후주택은 내구성도 문제다. 인권위의 설문 조사 결과 농산어촌 주민이 거주 주택에서 균열이나 붕괴 같은 구조적 위험을 겪는다고 응답한 비율은 15.8%였다. 용정마을에도 담장이나 벽에 균열이 간 집이 적지 않았다. 오씨는 “2020년 여름 엄청난 폭우로 건물이 무너지면서 몇몇 주민이 급히 대피하는 소동도 있었다”고 전했다.

주거권을 보장하는 정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에너지바우처’와 ‘주거급여’가 대표적이다. 에너지바우처는 기초생활수급가구에게 에너지 사용료를 지원하는 정책이다. 주거급여는 소득인정액이 기준중위소득의 48% 이하인 가구에 주택 수리비를 지급하는 제도다. 환산하면 에너지바우처는 소득인정액이 1인가구 기준 월 111만원, 주거급여는 107만원 이하인 가구가 지원 대상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같은 지원 대상은 재산과 소득을 합한 기준으로 선정돼 자가 비율이 높은 농민들의 주거권 보호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장은 “현재 관련 정책이 (저소득층만을 대상으로) 매우 제한적으로 실행된다”며 “농촌 자가 비율 등을 고려하면 기준을 기준중위소득의 100%까지는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특히 농촌 어르신은 주택 개선 의지가 작아 정부 차원에서 수리를 진행하는 등 적극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기후대응 정책이 오히려 주거권을 침해하기도 한다. 정부가 탄소감축방안으로 권장한 태양광·풍력 등 신재생에너지 발전소가 주로 농촌에 자리 잡으면서 주거 환경을 악화시킨 사례가 대표적이다. 2022년 전남 영광에선 풍력발전운영업체에 인근 2곳 마을주민에게 1억3800만원을 배상하라는 결정이 나왔다. 마을주민들이 소음으로 인한 주거권 침해를 문제 삼아 업체를 환경부 산하 중앙환경분쟁조정위원회에 제소해 얻어낸 판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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