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사는 영업 압박, 고객은 밤에도 AS 요구… 숨쉴 틈 없는 방문점검원

특별취재팀 2024. 3. 18. 03:26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전태일 재단-조선일보 창간 104주년 공동 기획]
[12대88의 사회를 넘자] [8] 차별의 벽에 갇힌 노동자들
필터 가득 싣고 ‘고단한 식사’ - 지난 13일 서울에서 방문 점검원으로 일하는 이영자(가명)씨가 차 안에서 점심으로 빵과 우유를 먹고 있다. 특수형태근로종사자(특고) 신분인 그는 렌털 기기를 쓰는 고객들을 관리하며 막간을 이용해 이렇게 차에서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차에는 늘 정수기 필터 등 고객들에게 필요한 각종 부품들이 가득 실려 있다. /장련성 기자

두 딸과 함께 수도권의 15평(약 50㎡) 크기 공공 주택에 사는 김연희(가명·52)씨 집에는 렌털 가전 기업 A사의 제품 10개가 빼곡하다. 방 2개, 거실 하나짜리 집에 정수기, 공기청정기 2대, 비데, 연수기, 스타일러 등이 곳곳에 있다. 렌털료만 한 달 24만원이다.

김씨는 A사 방문 점검원이다. 고객 집이나 가게 등을 찾아다니며 렌털 기기를 정기 점검하고, 새 제품 렌털을 권하는 게 그의 일이자 수입원이다. 영업 실적이 나쁘면 회사가 담당하는 기기 개수를 줄여버려 수입이 줄어드는데, 이런 일을 막으려고 자기가 ‘셀프 계약’을 했다고 한다.

김씨는 이 회사 정직원이 아니라 특수형태근로종사자(특고), 일종의 개인 사업자다. 하루 7~8곳의 가정이나 상가 등을 돌며 제품 10여 개를 점검한다. 이동, 점검 시간 등을 합해 하루 10~12시간 일한다. 기본급 없이 가전제품 1개당 5000~1만원 안팎 점검 수수료를 받는 게 주수입이다. 새 렌털 고객을 구해오면 수당도 나온다.

문제는 반대 경우다. 영업을 못 해오면 점검 수수료가 줄고, 점검할 수 있는 기기 개수도 회사가 줄인다는 것이다. 영업을 잘했을 때는 월 300만~400만원도 벌지만 그러지 못한 달은 200만원도 못 벌 때가 많다. 작년에는 약 3000만원을 벌었다. 새 고객을 만들 때 필요한 고객 선물 등을 자비로 부담하는 경우가 있어 실제 수입은 더 적다고 한다.

김씨는 요즘 영업 압박이 갈수록 커져서 더욱 조마조마하다. 현재 정수기, 공기청정기 등 렌털 가전제품 분야에서 코웨이, SK매직, 쿠쿠홈시스, LG전자 등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발전을 위해 경쟁은 불가피하고, 경쟁에서 성과를 내면 보상을 받는 건 시장경제에서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방문 점검원들은 “밤낮이나 휴일을 가리지 않고 현장에서 고객들의 수리·교체 문의나 불만 제기 등을 처리하며 회사의 핵심 업무를 한다고 자부한다”면서도 “날이 갈수록 더 무한 경쟁에 내몰리는 게 힘들다”고 주장했다. 방문 점검원 노조 관계자는 “A사는 작년 영업이익률이 10%가 넘었지만 성과는 정직원들이 주로 누렸다”며 “모두가 경쟁하며 함께 일하는데 좀 더 상생하면 좋겠다”고 했다. A사는 “과도한 영업을 요구하지 않고 있고, 영업하지 않고 정기 점검만 담당하는 사람도 많다”면서 “처우 개선을 위해 늘 노력하는 중”이라고 했다.

하지만 김씨가 점검을 맡은 제품 수는 지난달 230개에서 이달 200여 개로 줄었다. 영업 실적이 나빴기 때문이다. 다음달 또 숫자가 줄지도 모른다. 그는 “지난달 수입이 280만원 안팎이었는데 이달엔 20만원 이상 줄어들 것 같다”고 했다.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지만 한참 더 지원해 줘야 할 딸들이 눈에 밟힌다. 김씨는 지난 2019년까지 서울의 한 고급 빌라에 살던 가정주부였다. 남편의 사업 실패 등으로 가장이 됐다. 노조 등에 따르면, 방문 점검원들은 대부분 40~60대인데 열 명 중 여덟 명이 여성이다. 아이나 어르신 돌봄과 일을 병행하거나 생활비를 보태기 위해 이 직업을 택한 사람이 많아 전직(轉職)도 쉽지 않다고 한다.

22년간 서울에서 방문 점검원으로 일한 이영자(가명·64)씨도 마찬가지다. 이씨는 “결혼 후 경력이 단절된 시기도 있었지만 이 일이 있었기에 생계를 꾸릴 수 있어서 회사에 고마운 마음도 크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주말 방문을 원하는 고객이 많고 밤에도 AS(애프터 서비스) 문의 등이 많아 갈수록 일과 일상 구분이 잘 안 된다”며 “우리도 함께 일하는 동료로 생각해서 식사 시간 등 최소 휴식 시간은 보장해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특수형태근로종사자(특고)

특수형태근로종사자는 보험설계사, 학습지 교사, 렌털 가전기기 방문 점검원, 배달기사 등 개인 사업자 성격도 있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기업의 지시나 지휘를 받는다는 점에서 임금 근로자의 특성도 지녔다. 일을 하고 보수를 받지만 근로기준법 적용 대상이 아니다. ‘특수고용직’ 또는 ‘특고’라고 불린다.

〈특별취재팀〉

▷팀장=정한국 산업부 차장대우

조유미·김윤주 사회정책부 기자

김민기 스포츠부 기자

한예나 경제부 기자

양승수 사회부 기자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