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들’ ‘영웅시대’....이문열, 소설 67권 직접 손봤다 “마지막 개정판”

이영관 기자 2024. 3. 18.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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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문열 개정판 완간
‘영웅시대’에만 2년 매달려
소설가 이문열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포함해 ‘영웅’이 들어간 소설이 많다는 이야기에 “제가 영웅주의가 있나 보다”라며 웃었다. 그는 “영웅, 히어로 같은 개념들은 원래 구체적인 명사가 아니라 각자 고유의 뜻을 가진 말에서 기인한 거다. 그러나 지금 시대엔 자칭 영웅, 다른 말로 바꾸면 돋보이고 싶은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고 했다. /오종찬 기자

소설가 이문열(76)은 지난했던 세월에 밑줄을 긋던 빨간 펜을 4년 만에 내려 놓았다. 2020년 ‘삼국지’(전 10권)를 시작으로 교정을 봤고, 최근 ‘영웅시대’(전 2권)를 끝으로 개정판 총 67권을 완간했다. 40년간 대부분 책을 내 온 민음사와 2019년 결별하고 RHK와 새롭게 계약을 맺으며 시작한 작업. 이번이 마지막 교정이 될 거란 예감에 쉽게 끝낼 수 없었다. 곡절도 겹쳤다. 귀향의 꿈을 안고 경북 영양에 지은 집이 2022년 불에 탔고, 작년엔 건강이 크게 악화됐다. 작업실 겸 주거 공간인 경기도 이천시 부악문원에서 17일 만난 이문열은 “지금 생각해 보면 짧은 시간에 이뤄진 교정 작업처럼 느껴져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며 “개인적 감정으론 특이한 경험이었다”고 했다.

-1979년 출간한 첫 소설 ‘사람의 아들’부터 지난 소설들을 고치며 어떤 생각이 들었나.

“쓴 것을 다시 모으는 작업이기에 그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 다분히 회고적이면서 새로운 느낌은 든다. 당대 독자를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1980년대 독자들을 상대로 쓴 소설을 40년 뒤 독자들에게 다시 내놓으니 기분이 예전 같지 않다. 과거에는 사상적 문제에 대해 엄격했고, 사회주의·공산주의에 대해 말하는 게 금기 내지는 모험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자유롭고 개방적이지 않은가. 지금 그 얘기를 쓴다면 ‘영웅시대’처럼 쓰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월북한 아버지로 인한 가족의 수난이 투영된 소설이 ‘영웅시대’다. 지금 독자는 그 시절을 어떻게 읽을까.

“어느 시대나 자기 무게와 엄중함을 가진다. 지금도 각자 시대의 변곡점에 와 있다고 느낀다면 ‘영웅시대’일 수 있다. 저는 각자의 행동에 영웅적 요소가 요구됐던 어린 때가 생각났었다. 해방, 건국, 6·25라는 중요한 사건을 앞두고 시대가 영웅적 특출함을 필요로 했고, 동시에 많은 사람이 태어나고 쓰러지는 비극성이 있었다.”

그래픽=정인성

-소설 ‘영웅시대’ 교정에만 2년이 걸렸다. “성한 집이라고는 열 채도 못 남게 시리” 같은 대사를 추가해 6·25 때 평양의 모습을 보완했다.

“1950년대를 경험한 독자들은 과장된 게 있었단 걸 안다. 박완서 작가도 가끔씩 ‘이문열씨 이거 아니다’라고 말했다. 1982년 소설을 연재할 때만 해도 북한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많은 부분이 상상과 사변으로 채워진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다. 시간과 건강 때문에 부정확한 정보를 제대로 손보지는 못했다.”

작가는 ‘영웅시대’에 대해선 아쉬움을 표했지만, 대규모 개정판 출간을 통해 새로 정립된 작품의 의미가 크다. 안중근 의사의 평전에 가까운 소설 ‘불멸’은 ‘죽어 천년을 살리라’(전 2권)로 제목을 바꿨다. “불멸은 얼핏 웅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딘가 공허하게 들리는 제목”이라며 “안중근 의사의 불꽃 같은 삶과 죽음을 담기에는 마땅찮아 보였다”는 이유에서다. 새 제목은 안중근 의사의 죽음을 애도한 중국 문필가들의 칠언절구 ‘生無百歲死千年(생무백세사천년)’에서 비롯됐다. 대하소설 ‘변경’(전 12권)은 이야기의 시간 순서를 명확히 하고, 사투리 등 현대 독자에게 어색한 말을 순화했다. 기존 1권 12장에 있던 ‘유년의 꽃그늘에서’를 같은 권의 9장으로 옮겼다. 정신적·신체적 불편을 겪는 여인 당편이의 삶을 그린 소설 ‘아가’는 부제를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에서 ‘노래 중의 노래’로 바꿨다. 히브리어로 ‘노래 중의 노래’를 가리키는 ‘아가(雅歌)’의 본래 의미를 살린 결정이다.

사람의 아들 아하스 페르츠와 예수의 대립을 통해 신(神)과 구원의 문제를 다룬 소설 ‘사람의 아들’의 주인공에 얽힌 비화도 흥미롭다. 1979년 중편소설로 출간해 8년 뒤 장편으로 개작했고, 이번이 다섯 번째 개정판. 그간 독일식 발음인 아하스 페르츠를 유대식 발음으로 고치려고 했지만, 오독을 우려해 주변에서 만류했다가 이제야 단념했다고 한다. “아하스 페르츠는 열아홉 살 때 날림 번역의 니체 책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하였다’에서 처음 알게 된 이름이다. 번역 성서 속 유대 사람들의 이름과 함께 나오면 어색하게 느껴졌다. 이제야 한국 문학에서는 그 이름이 독일식 발음 아하스 페르츠로 수용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액자소설 구조임을 감안해, 바깥 소설과 안쪽 소설의 서체를 달리하고 미주를 각주로 바꿔 가독성을 높였다.

-개정판을 4년째 내고 있는데, 예전만큼 독자의 호응은 크지 않다. 책을 멀리하는 시대에 문학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지금은 ‘삼국지’ 등 소설의 내용을 만화, 비디오 등 다른 매체를 통해 접한다. 머리 쓰며 상상력으로만 읽는 것이 문학이다. 화면이나 음향의 간섭을 받지 않고, 문장으로 읽을 때 참 선량하다가도 어떤 때는 흉악한 유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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