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옳다는 이분법 버리고 중도주의 따를 때 사회 발전”

강성만 기자 2024. 3. 17.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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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회고록 낸 동백림 사건 사형수 정하룡 선생
정하룡 선생이 인터뷰 뒤 사진을 찍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최근 ‘정하룡 회고록-나의 20세기’(학민사)를 낸 정하룡(91) 선생은 1967년 터진 ‘동백림(옛 동독 수도 동베를린) 거점 간첩단 사건’ 사형수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이던 당시 중앙정보부는 동베를린 북한 대사관을 찾거나 방북했다는 혐의로 200여 명의 옛 서독과 프랑스 체류 유학생과 문화예술인을 조사하고 이 중 30여명을 간첩죄나 간첩미수죄 등을 씌워 재판에 넘겼다. 프랑스 파리대에서 박사학위 논문(이승만 정권 하의 한국 정당·1966)을 준비하던 1962년과 65년 두 차례 남한 당국에 알리지 않고 북한을 찾았던 정 선생에게도 간첩죄가 적용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 사건 사형 확정자는 그와 고 정규명 선생 둘이다. 2006년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동백림 사건을 두고 “중앙정보부가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 사건의 범위와 범죄사실을 확대·과장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는 수감 중 두 차례 감형을 받아 투옥 4년째인 1970년 말 성탄절 특사로 풀려났다. 1973년부터는 대한항공 창업주 조중훈 회장 요청으로 프랑스 원전 기술 도입 협상에 참여했고 1991년에는 프랑스 고속철 테제베 도입 교섭 공로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2002년 퇴직하고 두 딸이 사는 미국에서 머물던 그는 2011년 아내와 사별한 뒤 한국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지난 13일 전북 고창에서 회고록 정리에 참여한 김학민 경기아트센터 이사장과 함께 그를 만났다.

해방을 맞은 소년 정하룡은 이데올로기로 찢기는 조국의 현실을 보며 일찍이 ‘중도주의’를 마음에 품었단다. 경기고 1학년 때인 1949년에는 백범 선생 서거 비보를 접하고 경교장을 찾아 울컥 눈물을 쏟으며 “한국 중도주의의 요절”을 예감했다고 회고록에 썼다. 1952년 서울대 사회학과 입학 뒤에는 “공산주의와 반공독재자 이승만을 다 싫어했던” 문리대 서클 낙산회에 가입해 서구의 정치사상과 이론을 탐구했다. 그는 1949년 제1회 국전에서 최연소 입선을 했을 정도로 그림에 재능이 있었고 한국전쟁 때인 1952년에는 극단 떼아뜨르 리브르(자유 극장)에 가입해 3년 뒤 프랑스 유학을 떠날 때까지 연극 수업을 받았다.

정하룡 선생이 최근 낸 회고록.

대학 시절 이승만의 폭력과 독재 아래서 무기력과 좌절을 겪던 그에게 장 폴 사르트르 등 프랑스 실존주의 학파가 내세운 ‘앙가주망’(참여)이라는 말이 구세주처럼 나타났다. “내가 처한 시대 상황에서 내가 갈 길을 능동적으로 결정하는 게 바로 자유이며 그렇게 행동할 때 내 주변의 집체적 상황에 능동적으로 관여한다는 게 사르트르의 앙가주망이었어요. 나에게 복음과도 같은 말이었죠. 그 뒤로 내 머릿속에는 늘 자각과 행동이란 어휘가 있었죠. 자각하면 행동해야 한다는 거죠. 유학 때 처벌을 각오하고 북한을 찾은 것도 통일

지향적인 의식에는 행동도 따라야 한다는 생각에서죠.”

그가 유학을 떠난 1955년 프랑스 파리는 ‘신세계’였다. “대학에서 마르크스주의와 실존주의가 동시에 유행하고 있더군요. 너무 충격적이었죠. 당시 유럽과 한반도는 전혀 다른 정치 공간이었어요. 역사의 격차였죠.”

1960년대 프랑스 유학 시절에
남·북 연결시키고자 두차례 방북
67년 간첩단 사건 연루, 사형 판결
방북 동행 아내도 임신 중 구속
감형 뒤 대한항공에서 29년 근무

그가 파리정치대학(시앙스포) 학부를 마친 1962년에 동베를린 북한 대사관을 찾은 데는 통일을 위해, 극한 대치 중이던 남과 북을 연결하고 싶다는 열망도 있었지만 박사 논문 지도교수 모리스 뒤베르제의 영향도 컸단다. 세계적인 정당론 연구자 뒤베르제는 제자 정하룡에게 박사 논문 주제로 ‘이승만 독재의 생태 분석’을 제시하고 또 ‘김일성 숭배 분석’ 자료도 구해볼 것을 지시했단다. “뒤베르제 교수는 스탈린처럼 마르크스주의 역사관에 역행해 ‘개인화’한 권력 구조를 연구했어요. 그 연구 주제는 ‘권력의 인격화’였고 저는 그 세미나 멤버였어요. 뒤베르제 교수는 제가 석방된 뒤 한국에서 구출해내려고 파리대 교수 위촉장도 보내왔죠. 중앙정보부가 불허해 파리대 교수 취직은 무산되었지만요.”

2차 방북 때는 파리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고 파리국립도서관 사서로 일하던 2년 연상의 아내(이순자)도 동행했다. 귀국 뒤 국회도서관 간부로 있던 아내는 1967년 임신 상태로 남편과 함께 구속되었고 직장에서도 쫓겨났다. 병보석으로 6개월 만에 풀려난 아내는 수감 중 ‘왜 북에 갔느냐’는 변호인 물음에 딱 한 마디로 ‘아방튀르’(모험)라고 답했단다.

“분단·전쟁으로 중도주의 필요 절감
무턱대고 한쪽 따르는 건 사대주의
여러 해법 중 좋고 옳은 것 취해야”

방북 때 그가 북에서 받은 요청은 “통일 전선에서 중도주의적 우군이 되어달라는 것”이었단다. 그는 책에 이렇게 썼다. ‘북은 우리 유학생들이 귀국해 볼셰비키(공산주의 혁명 세력) 세상이 될 때까지 멘셰비키(사회민주주의자) 역할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나의 구상 속 최종 목표도 멘셰비키였다. 볼셰비키의 자리는 없었다.’

1966년 경희대 조교수로 임용돼 귀국한 그는 바로 ‘시앙스포 출신 신예 정치학자’로 주목받았다. 동백림 사건이 터지기 직전 그는 삼성이 운영하던 중앙일보 고위층으로부터 삼성 계열 방송사의 책임 있는 자리를 약속받고 언론인으로 완전 전직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저의 꿈은 정치였어요. 앞서 언론인으로 통일의 꿈과 중도의 길을 펼치고 싶었어요. 유학 시절에는 동아일보 파리 특파원도 제안 받았는데 학업 부담 때문에 고사했죠.”

그는 책에서 사형수인 자신이 3년 만에 풀려난 데는 옛 서독과 프랑스 시민사회의 역할이 크다고 강조했다. 실제 동백림 사건 재판 과정에서 서독은 경제 원조 중단과 국교 단절까지 지렛대로 삼아 박정희 정권에 대해 구속자 석방을 강하게 압박했다. “서독 정부가 움직인 것은 반전체주의 슬로건을 내걸고 범세계적인 반독재 투쟁을 벌인 68혁명 주축 세력인 학생과 지식인들 역할이 큽니다. 그들은 개인의 생각하는 자유, 행동하는 자유가 철저히 무시된 동백림 사건에 분노했어요. 재항소심에서 나에 대한 사형 판결이 확정되자 서독 각지에서 500여 명의 학생과 국회의원들이 본 대학에 집결한 뒤 한국 대사관을 둘러싸고 석방을 요구했죠. 동백림 재판 기간 프랑스 신문 르몽드는 약 90건의 기사를 쏟아내며 재판 내용을 상세히 보도했어요. 그들이 제 목숨을 구했어요.”

해방 정국에서 여운형과 김구가 암살되는 것을 보면서 “이건 아니다”는 생각을 하며 중도주의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그는 지금도 중도주의에 대한 열망이 크다. 중도주의가 뭐냐고 하자 그는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옳다고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따라가는 실용주의”라고 받았다. “우리가 산 시대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체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반공행동론인 자유민주주의로 쫙 갈라졌어요. 나는 옳고 너는 그르고, 나는 선이고 너는 악이라는 이분법이었죠. 중간 지대가 없는 정신세계였어요. 덮어 놓고 한쪽만 가는 것은 사대주의입니다. 사르트르와 카뮈가 제일 분노한 것도 ‘왜 우리는 미국 아니면 소련을 택일해야 하느냐’는 것이었죠.”

그가 보기에 지금 한반도 현실도 70여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통일에 대해 토론하다 자기와 생각이 다르면 대뜸 ‘너는 이 나라를 북한에 바치려고 하느냐’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면 타협과 절충의 여지가 없어요. 이분법으로는 사회가 발전하지 못해요. 문제 해결 방법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닙니다. 여러 개가 있어요. 그 중 취사선택해야죠. 그게 바로 합리주의입니다. 민주주의 요체는 복수주의와 다원주의입니다. 답은 여러 개가 있어요. 어떤 때는 조금 불그스름한 걸, 어떤 때는 하얀 해결책을 취할 수도 있어요. 그게 바로 중도주의입니다.”

정하룡 선생과 김학민 경기아트센터 이사장.
정하룡 선생의 박사 학위 논문.

그는 책에 북한 체제에 대한 생각도 상세히 밝혔다. “지금 북한은 공산국가가 아닙니다. 세습왕조이죠. 1992년 개정 헌법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아예 빠졌잖아요.” 그는 1972년 북한 개정헌법에 등장한 주체사상을 두고는 이렇게 말했다. “주체사상을 보니 프롤레타리아(노동자 계급)가 빠지고 그 자리를 불특정 계층인 인민대중이 차지하고 있더군요. 인민대중은 스탈린이 1930년대에 권력을 절대화하면서 썼던 말입니다.” 그는 책에서 “주체사상은 샤머니즘과 종교 신앙논리의 혼합”이라면서 부연했다. ‘주체사상에는 그리스도교와 유교, 일본의 국체론까지 섞여 있다. 주체사상의 ‘사회적 정치적 생명체 이론’은 ‘부모로부터 받은 육체적 생명은 유한하지만 영에 의해 주어진 생명은 영원하다’고 말한 (기독교) 사도 바울 사상의 판박이이다. 주체사상은 역사는 ‘비인간적인 힘’에 만들어진다는 유물사관과도 정면 충돌한다.’

그는 “이미 없어진 공산주의를 적대시하는 것은 부질없다”며 “북한과 어떻게든 대화해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타협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1973년부터 2002년까지 대한항공과 계열사에서 근무하며 조중훈 회장의 최측근 실세로 통했다. 이 기간 세 차례나 사직서를 냈으나 그때마다 ‘경제적 보상’이 주어지면서 사표가 반려되었단다. “그만둘 때도 그룹 부회장에 내정되었으나 제가 하지 않겠다고 했죠.”

그가 대한항공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박정희 정부가 3차 경제개발을 추진하면서 프랑스 쪽과의 경제 협력을 조 회장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박정희 지시에 조 회장은 수소문 끝에 프랑스 행정 관료들의 산실이었던 시앙스포 출신 정하룡을 접촉해 자신이 이끄는 한불경제협력위원회에 참여시켰다. 두 사람의 ‘중매인’은 조병화 시인이었다. 그는 조 회장을 도와 한전과 프랑스 원전 회사인 프라마톰·알스톰과의 원전 도입 협상 타결에 실무 역할을 했다. 그는 조 회장의 두터운 신임을 두고 “원전 사업은 액수가 어마어마하다. 당시 협상이 어려워지면 내가 수습하는 역할을 했다. 그런 점을 인정한 것 아니겠느냐”고 답했다.

왜 그만두려고 했느냐는 질문에는 “나는 대기업은 자본과 경영이 분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둘이 완전히 하나인 대기업에서 사주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게 견디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고 답했다.

항공사 임원 시절에는 자유롭게 외국을 오갔지만 2002년 퇴임하자 바로 ‘요주의 인물’로 돌아가 출국 허가가 나오지 않았단다. “김대중 정부 시절이었죠. 당시 정권 실세 한화갑 의원에서 부탁해 풀었습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일생의 큰 보람을 묻자 그는 “채워지지 않은 욕구를 가지고 살았다. 앞으로 세상이 조금 편하게 살 수 있는 곳으로 바뀌면 좋겠다. 또 통일도 같이 오면 좋겠다”고 받았다.

요즈음 보수 진영에서 이승만 띄우기가 한창이라고 하자 그는 “김구 암살 때부터 이승만을 미워했다”며 말을 이었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 이승만은 대학생들의 공공의 적이었죠. 독재자이면서 통일을 가장 가로막는 사람이었어요. 그가 내세우는 북진통일이라는 구호가 통일을 방해하는 말이었어요. 대화를 안 하겠다는 거잖아요. 지금도 그 흐름이 이어지고 있어요. 우리가 지금 40배는 더 잘 사는데, 뭘 두려워해요. 통일은 잘 사는 쪽의 흡인력이 크잖아요.”

그는 6년 전부터 머무는 고창의 ‘실버타운’에서 현재 30여명이 참여하는 클래식 동호회와 5명이 멤버인 맛집 순례 동호회에 가입해 노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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