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유아 시체 밤중에 몰래 버렸다”...한양 거지들 굴 파고 살았던 조선시대 청계천 [서울지리지]

배한철 기자(hcbae@mk.co.kr) 2024. 3. 17.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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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구수에서 도심속 휴양지로
청계천의 과거부터 현재까지
한양대 인근 청계천변(1976년 1월 5일 촬영). 물가 바로 옆으로 무허가 판자촌이 빽빽하다. [서울역사박물관]
새로 개국한 조선은 1394(태조 3)년 한양천도를 단행하면서 신도(新都) 건설과 함께 치수사업에 공을 들였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인 서울의 지리적 특성상, 지대가 낮은 도심으로 물길이 집중돼 비만 오면 자연상태의 하천이 범람을 반복해서였다. 1411년(태종11) 음력 12월, 하천 정비를 위한 개천도감(開川都監)을 발족했다. 이듬해 1월 15일부터 한달간 총 5만2800명을 투입해 대대적인 공사를 실시했다. 공사 중 64명이 사망했다.

도성 하천은 고려시대에 한양천(漢陽川), 경도천(京都川)이라고 했다. ‘내를 파내다’는 뜻의 ‘개천(開川)’은 준설사업 명칭이었지만 이 공사를 계기로 지금의 청계천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됐다. ‘맑은 계곡 내’라는 청계천(淸溪川) 명칭이 등장한 것은 뜻밖에 일제강점기 이후다. 1916년쯤부터 신문에 개천 대신 청계천이 등장했다. 공식적으로는 1927년 조선하천령(朝鮮河川令)에서 처음 사용됐다.

청계천 명칭은 조선 600년동안 ‘개천’···일제강점기 신문에서 처음 사용
청계천변 무허가촌(1975년 8월 21일 촬영) [서울역사박물관]
청계천은 도성을 서에서 동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길이 10.92㎞의 도시하천이다. 북악산 남쪽(발원지 북악산 해발 290m 지점)과 인왕산 동쪽, 남산 북쪽 기슭에서 흘러내린 계곡물이 도성 중심부에서 만나 무교·서린동, 관철·장교동, 관수·수표동 등을 지나 방산동·평화시장을 거쳐 흘러간다. 청계천은 서울 도심부를 관통하다가 북쪽에서 내려오는 성북천, 정릉천과 차례로 만나고 마장동을 지나 중랑천 본류와 합류해 한강으로 빠진다.

조선시대 청계천 위에는 24개의 다리가 존재했다. 청계천 다리는 늘 북적거렸다. 조선후기 문신 강준흠(1768~1833)의 <한경잡영(漢京雜詠)>은 “한양 땅 반절은 개천에 접해 있고(漢陽一半開川直), 다리에는 행인들 빽빽하게 오고 가네(橋上行人往來織).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디를 향해 가는가(作何經營向何處), 물은 쉼 없이 흐르고 사람들도 끊임없이 지나가는구나(水流無停人不息)”라고 읊었다.

청계천 상류에서 첫번째로 만나는 모전교(毛廛橋)는 1412년(태종 12) 석교로 조성됐다. 다리 모퉁이에 과일전이 있다고 해서 모교 또는 모전교로 명칭됐다.

광통교(廣通橋)는 청계천 다리 중 제일 컸다. 경복궁, 육조거리, 종루, 숭례문으로 이어지는 남북대로의 연결다리였고, 주변에 시전(市廛)이 위치해 많은 사람들이 왕래했다. 정약용(1762~1836)의 <다산시문집> 제18권은 남인의 양대 거두인 채제공(1720~1799)과 이가환(1742~1801)이 광통교에서 병풍을 치고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고 했다. 영의정(채제공)과 형조판서(이가환)를 역임한 고관들도 술판을 벌일 만큼 광통교는 명소였던 것이다. 1958년 청계천 복개가 시작되면서 태종이 정동에서 옮겼다는 광통교 속 신덕왕후 강씨 능침석(陵寢石)이 드러났다. 2005년 10월 청계천복원사업으로 광통교는 다시 햇빛을 보게 됐지만 교통흐름을 고려해 광교에서 청계천 상류 쪽으로 155m 떨어진 장소로 옮겨졌다.

수표교를 지나가는 사람들 모습(19세기 말~20세기 초). 좌측에 보이는 다리가 수표교다. [국립민속박물관(헤르만 산더 기증사진)]
장통교(長通橋)는 중구 장교동 51과 종로 관철동 11 사이에 있었고 다리명은 부근의 장통방(長通坊)에서 따왔다. 마찬가지로 복원 때 원래 위치보다 상류에 놓여졌다. 수표교(水標橋)는 중구 수표동 43과 종로 관수동 152 사이의 다리로 1441년(세종 23) 가설됐다. 다리 서쪽에 청계천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 눈금 10척(尺)을 새긴 수표기둥을 세웠다. 수표는 청계천을 복개하면서 수표교와 함께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다가 1973년 세종대왕기념관(동대문 청량리동 산 1-157)으로 이전됐다. 마전교(馬廛橋)는 종로5가 416과 방산동 20 사이에 설치됐었고 부근에 말과 소를 팔고 사는 점포가 많았다.
광통교에서 채제공·이가환 밤새 술판, 오간수문으로는 도적들 들락날락
오간수문(五間水門)은 서울성곽을 쌓으면서 청계천 물이 빠져나갈 수 있게 설치한 다섯 개의 홍예(아치형 문)다. 1908년(광무 11) 물흐름에 방해된다고 철거했다. 오수간문을 통해 범죄인들이 들락거렸다. <명종실록> 1560년(명종 15) 11월 24일 기사에 의하면, 황해도 도적 임꺽정이 전옥서(종로 서린동 33) 옥문을 부수고 자신의 처를 꺼낸 다음 오간수문을 통해 탈출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청계천변은 조선왕조 도읍지로 정해진 이후 600년간 정치·사회·문화·경제의 중심권을 담당해 온 유서깊은 지역이다. 종로네거리를 중심으로 오늘날 종로와 을지로 1~4가 등 청계천 주변은 조선시대 상가와 시장, 환락가가 형성됐고, 상공업과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이 몰려살았다. 청계천 2, 3가, 광교, 수하동 일대의 한성부 중부(中部·중부관아터는 종로3가 45-4)는 도화서, 전옥서, 혜민서, 내의원, 훈련원, 도화서, 장악원, 사역원, 교서감 등 속아문(屬衙門·육조에 딸린 속사)이 모여 있었고, 역관·의원·화공·검율관 등 이들 관아에 근무하는 경아전이 집단으로 거주했다.

전옥서(典獄署)는 죄수들을 수감하는 교도소로 조선초부터 고종 때까지 종각역사거리 영풍빌딩 자리(종로 서린동 33)에 위치했다. 을지로2가 사거리 신한L타워 앞(중구 을지로2가 108-1)에는 환자치료·약재판매를 담당했던 혜민서(惠民署) 터 표지석이 서 있다. 을지로 입구·을지로 2가는 언덕이었다. 이곳의 흙이 구리색을 띠어 구리개(銅峴·동현)라 했다. 구리개의 혜민서 주위에 약방이 즐비했다.

화원(畵員)을 양성하고 국가행사·초상화 등을 그리는 도화서(圖畵署) 터는 을지로입구 교원내외빌딩 앞(중구 을지로2가 1-1)이다. 무과시험을 주관하고 무예를 익히던 훈련원(訓鍊院)은 국립중앙의료원(을지로6가 18-79) 자리다. 충무공 이순신이 이곳에서 별과시험을 볼 때 실수로 낙마해 다리에 골절상을 당했지만 다시 말을 타고 달려 합격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청춘남녀들 “노래부르고 소리치고”···연날리기 우승자, 소설 읽어주는 전기수 스타대접
번잡한 청계천은 볼거리가 많았다. 조선말 궁중에서 쓰는 그릇을 납품하는 공인 지규식의 <하재일기>는 “옷을 걸쳐 입고 대문 밖으로 나가서 수표교에 이르러 야경을 구경하였다. 돌아오다가 청계천시장 앞에 이르니 달빛과 등불빛이 서로 어우러져 비치는 속에서 북과 꽹과리를 치며 귀가 따갑도록 노래를 부르고 소리를 지르며 장안의 청춘 남녀들이 어지럽게 떠들어대는데 구경할 것이 못 되었다. 숙소로 돌아오니 대략 삼경(밤 11~새벽 1시)쯤 되었다”고 했다.

청계천변에서 연싸움이라도 하는 날이면 시전상인들도 가게 문을 닫고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연날리기는 단순히 놀이를 넘어 조선 후기 한양의 인기 스포츠였다. 유득공(1748~1807)은 <경도잡지>에서 “장안 소년 중에 연싸움을 잘하기로 소문이 나면 왕왕 지체 높은 부잣집에 불려갔다. 매년 정월 13일이나 14일 수표교 주변 위아래로 연싸움을 보러온 구경꾼들이 담을 쌓은 듯 모인다”고 했다.

전기수(傳奇叟·소설낭독가)도 인기연예인 못지않은 스타였다. 조선후기 전기수는 청계천 물길을 오르내리며 청중에 둘러싸여 매일 소설을 구연했다. 여항시인(중인시인) 조수삼(1762~1849)의 <추재집>은 “전기수는 동대문 밖에 살았다. 언과패설(諺課稗說·민담)인 숙향전, 소대성전, 심청전, 설인귀전 등과 같은 전기(傳記)를 읽었다. … 읽어가다가 아주 긴요하여 꼭 들어야 할 대목에 이르러 문득 읽기를 그치면 사람들은 그 다음 대목을 듣고 싶어서 다투어 돈을 던져주었다”고 했다.

채소시장(1904년 촬영). 청계천은 삶의 터전이기도 했다. 동대문 밖에 큰 채소시장이 서 상인들이 청계천 오간수문에서 야채를 씻어 팔았다. [미국헌팅턴도서관(잭 런던 기증사진)]
청계천 빨래터(1904년 촬영). 비가 내려 청계천이 깨끗해지면 여인들이 빨래를 들고 나왔다. [미국 헌팅턴도서관(잭 런던 기증 사진)]
청계천은 여가공간이기 앞서 한양 백성들의 삶의 현장이었다. 청계천 상류는 인근 주민들의 식수로 사용돼 북악산·인왕산·남산·낙산 계곡에는 새벽이면 물장수들이 모여들었다.

마장동 동쪽의 하류 지역은 청계천을 물을 끌어다 채소를 재배했고, 동대문 밖에는 큰 채소시장이 형성돼 상인들이 오간수문에서 야채를 씻어 내다팔았다. 큰비가 와서 청계천 주변의 더러운 쓰레기들이 씻겨 내려가고 맑은 물이 흐르면 인근의 여인들은 일제히 빨래를 들고 몰려와 세탁을 했다.

조선후기 토사와 쓰레기 투기로 골머리, 영조때 20만명 동원해 준설
조선후기 이후 청계천은 내사산(內四山)에서 쓸려내려온 토사로 하천이 막혀 장마가 지면 침수되는 가옥이 부지기수였고, 또한 민가에서 투기하는 생활하수와 쓰레기, 분뇨 등 각종 오물로 몸살을 앓는다.

제중원 원장과 세브란스 의학교 교장을 역임한 올리버 R. 에비슨(1860~1956)은 <한국에서의 기억(Memoires of Life in Korea)>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집은 청계천변을 따라 세워졌다. 이들의 오두막이나 창고의 작은 창은 개천으로 향해져 있고 밤에 창을 통해 오물이나 쓰레기를 하수구로 던졌다”고 했다.

종로구청 옆 이마빌딩은 궁중에 필요한 말을 기르는 사복시가, 청계천 마전교에는 말과 소를 빌려 주거나 매매하는 세마장(貰馬場)이 위치해 말의 배설물이 그대로 하천으로 유입됐다. 나라에서도 굳이 단속하지 않았다. 세종 때 “도읍은 인가가 번성하고 그곳의 개천도 더러워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어효첨의 주장을 받아들여 오물투기를 방관했다.

죽은 동물 사체, 죽은 유아의 시체까지도 밤중에 몰래 버렸다. 1866년 병인박해 때는 처형한 천주교인들의 시신을 투기해 청계천 4가 효경교(孝經橋)에서 오간수문까지 피로 물들였다. 종종 살인사건도 발생했다. <현종실록> 1668년(현종 9) 음력 2월 3일 기사에 따르면, 사헌부가 소에 땔감을 싣고 와 팔던 소년을 도적이 유인해 소를 빼앗은 뒤 살해한 사건을 보고했다. 도적은 시체를 항아리 속에 넣어 장통교 아래 버렸다고 했다.

심지어, 불륜 등으로 원치 않는 아이를 낳았을 때 청계천에 유기했다. 정약용의 <목민심서>는 “한양의 작은 개천에는 간혹 버려진 아이들이 있는데 그 중에는 간음으로 인해서 낳은 아이가 많다”고 했다.

1760년(영조 36) 2월, 최대 규모의 준천(濬川)사업이 벌어진다. 20만 명의 인원을 동원한 57일간의 대역사였다. 하천을 준설하는 동시에 수로를 직선으로 변경하고, 양안에 돌로 축대를 쌓았다. 준설과정에서 나온 모래흙을 오간수문 안쪽의 청계천변 양쪽에 쌓았다. 그 높이가 마치 산과 같아 가산(假山) 또는 조산(造山)이라고 했다. 가산은 한양의 거지들이 굴을 파고 거주했다. 가산은 일제강점기 종로를 돋우거나 건물을 지으면서 평지로 변했다.

2005년 시멘트 걷어내고 겉모습만 복구···내년이면 20주면, 복원사업은 지속성이 더 중요
청계고가도로 개통전 모습(1969년 3월 19일 촬영) [서울역사박물관]
종로 창신1동 일대 청계천 복구공사(1967년 10월 3일 촬영). [서울역사박물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청계천에 빈민촌이 확산돼 도시문제화하자 경성부는 청계천 복개를 추진한다. 하지만 재정문제로 실제 복개가 된 곳은 태평로~무교동 구간에 그쳤다. 한국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청계천변에 정착하면서 청계천은 더욱 빠르게 오염돼 갔다. 결국, 신속하고 간편한 해결책은 전면 복개였다. 1955년부터 1977년까지 광통교~대광교~청계8가 신답철교 구간을 덮었다. 확장된 도로변을 따라 신평화 시장, 삼일아파트 등 현대 건물이 세워졌다. 1976년 8월 성동구 마장동~남산1호터널을 잇는 총연장 5.7㎞의 청계고가도로도 준공됐다.
복원후 청계천 모습. [중구문화원]
복원후 청계천 모습. [중구문화원]
청계천변(일제강점기). [국립중앙박물관]
2003년 7월, 이번에는 청계천을 다시 여는 ‘복개(復開)’사업을 시작해 2년만인 2005년 9월 마무리했다. 22개의 다리도 새로 놓였다. 하루 최대 12만t의 물이 방류되며 청계천은 도심 속 휴양지로 각광받았다.

내년이면 청계천 복원사업은 20년을 맞는다. 요즘 청계천을 가보면 방문객이 예전만 못하다. 서울시 자료를 보더라도, 복원초기 2800만명에 달했던 연간 방문객은 코로나19 기간 800~900만명까지 급감했다가 최근 몇년간은 1100만명 수준에 그치고 있다. 청계천 복원은 친환경을 지향했지만 콘크리트 일색의 회복이었다. 복원사업은 일회성에 그칠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진행돼야 한다. 20년전 기술적 한계로 시도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다면 이런 것부터 먼저 해결해 보면 어떨지.

# 도시는 멈춘 듯 보여도 생명체처럼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현대의 모습 속에 켜켜이 쌓인 역사를 감추고 있는 것입니다. ‘서울지리지’에서는 매력적인 도시, 서울의 모든 과거를 땅속의 유물을 건져내듯 들춰봅니다.

<참고문헌>

1. 청계천, 중구의 물길을 따라. 중구향토사자료 제13집. 중구문화원. 2012

2. 문학속에 피어난 서울 중구. 중구향토사자료 제22집. 중구문화원. 2021

3. 조선왕조실록. 한경잡영(강준흠). 목민심서·다산시문집(정약용). 하재일기(지규식). 경도잡지(유득공). 추재집(조수삼)

4. 다시 찾은 청계천. 서울역사박물관. 2005

5. 청계천. 서울역사박물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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