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유아 시체 밤중에 몰래 버렸다”...한양 거지들 굴 파고 살았던 조선시대 청계천 [서울지리지]
청계천의 과거부터 현재까지
도성 하천은 고려시대에 한양천(漢陽川), 경도천(京都川)이라고 했다. ‘내를 파내다’는 뜻의 ‘개천(開川)’은 준설사업 명칭이었지만 이 공사를 계기로 지금의 청계천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됐다. ‘맑은 계곡 내’라는 청계천(淸溪川) 명칭이 등장한 것은 뜻밖에 일제강점기 이후다. 1916년쯤부터 신문에 개천 대신 청계천이 등장했다. 공식적으로는 1927년 조선하천령(朝鮮河川令)에서 처음 사용됐다.
조선시대 청계천 위에는 24개의 다리가 존재했다. 청계천 다리는 늘 북적거렸다. 조선후기 문신 강준흠(1768~1833)의 <한경잡영(漢京雜詠)>은 “한양 땅 반절은 개천에 접해 있고(漢陽一半開川直), 다리에는 행인들 빽빽하게 오고 가네(橋上行人往來織).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디를 향해 가는가(作何經營向何處), 물은 쉼 없이 흐르고 사람들도 끊임없이 지나가는구나(水流無停人不息)”라고 읊었다.
청계천 상류에서 첫번째로 만나는 모전교(毛廛橋)는 1412년(태종 12) 석교로 조성됐다. 다리 모퉁이에 과일전이 있다고 해서 모교 또는 모전교로 명칭됐다.
광통교(廣通橋)는 청계천 다리 중 제일 컸다. 경복궁, 육조거리, 종루, 숭례문으로 이어지는 남북대로의 연결다리였고, 주변에 시전(市廛)이 위치해 많은 사람들이 왕래했다. 정약용(1762~1836)의 <다산시문집> 제18권은 남인의 양대 거두인 채제공(1720~1799)과 이가환(1742~1801)이 광통교에서 병풍을 치고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고 했다. 영의정(채제공)과 형조판서(이가환)를 역임한 고관들도 술판을 벌일 만큼 광통교는 명소였던 것이다. 1958년 청계천 복개가 시작되면서 태종이 정동에서 옮겼다는 광통교 속 신덕왕후 강씨 능침석(陵寢石)이 드러났다. 2005년 10월 청계천복원사업으로 광통교는 다시 햇빛을 보게 됐지만 교통흐름을 고려해 광교에서 청계천 상류 쪽으로 155m 떨어진 장소로 옮겨졌다.
청계천변은 조선왕조 도읍지로 정해진 이후 600년간 정치·사회·문화·경제의 중심권을 담당해 온 유서깊은 지역이다. 종로네거리를 중심으로 오늘날 종로와 을지로 1~4가 등 청계천 주변은 조선시대 상가와 시장, 환락가가 형성됐고, 상공업과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이 몰려살았다. 청계천 2, 3가, 광교, 수하동 일대의 한성부 중부(中部·중부관아터는 종로3가 45-4)는 도화서, 전옥서, 혜민서, 내의원, 훈련원, 도화서, 장악원, 사역원, 교서감 등 속아문(屬衙門·육조에 딸린 속사)이 모여 있었고, 역관·의원·화공·검율관 등 이들 관아에 근무하는 경아전이 집단으로 거주했다.
전옥서(典獄署)는 죄수들을 수감하는 교도소로 조선초부터 고종 때까지 종각역사거리 영풍빌딩 자리(종로 서린동 33)에 위치했다. 을지로2가 사거리 신한L타워 앞(중구 을지로2가 108-1)에는 환자치료·약재판매를 담당했던 혜민서(惠民署) 터 표지석이 서 있다. 을지로 입구·을지로 2가는 언덕이었다. 이곳의 흙이 구리색을 띠어 구리개(銅峴·동현)라 했다. 구리개의 혜민서 주위에 약방이 즐비했다.
화원(畵員)을 양성하고 국가행사·초상화 등을 그리는 도화서(圖畵署) 터는 을지로입구 교원내외빌딩 앞(중구 을지로2가 1-1)이다. 무과시험을 주관하고 무예를 익히던 훈련원(訓鍊院)은 국립중앙의료원(을지로6가 18-79) 자리다. 충무공 이순신이 이곳에서 별과시험을 볼 때 실수로 낙마해 다리에 골절상을 당했지만 다시 말을 타고 달려 합격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청계천변에서 연싸움이라도 하는 날이면 시전상인들도 가게 문을 닫고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연날리기는 단순히 놀이를 넘어 조선 후기 한양의 인기 스포츠였다. 유득공(1748~1807)은 <경도잡지>에서 “장안 소년 중에 연싸움을 잘하기로 소문이 나면 왕왕 지체 높은 부잣집에 불려갔다. 매년 정월 13일이나 14일 수표교 주변 위아래로 연싸움을 보러온 구경꾼들이 담을 쌓은 듯 모인다”고 했다.
전기수(傳奇叟·소설낭독가)도 인기연예인 못지않은 스타였다. 조선후기 전기수는 청계천 물길을 오르내리며 청중에 둘러싸여 매일 소설을 구연했다. 여항시인(중인시인) 조수삼(1762~1849)의 <추재집>은 “전기수는 동대문 밖에 살았다. 언과패설(諺課稗說·민담)인 숙향전, 소대성전, 심청전, 설인귀전 등과 같은 전기(傳記)를 읽었다. … 읽어가다가 아주 긴요하여 꼭 들어야 할 대목에 이르러 문득 읽기를 그치면 사람들은 그 다음 대목을 듣고 싶어서 다투어 돈을 던져주었다”고 했다.
마장동 동쪽의 하류 지역은 청계천을 물을 끌어다 채소를 재배했고, 동대문 밖에는 큰 채소시장이 형성돼 상인들이 오간수문에서 야채를 씻어 내다팔았다. 큰비가 와서 청계천 주변의 더러운 쓰레기들이 씻겨 내려가고 맑은 물이 흐르면 인근의 여인들은 일제히 빨래를 들고 몰려와 세탁을 했다.
제중원 원장과 세브란스 의학교 교장을 역임한 올리버 R. 에비슨(1860~1956)은 <한국에서의 기억(Memoires of Life in Korea)>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집은 청계천변을 따라 세워졌다. 이들의 오두막이나 창고의 작은 창은 개천으로 향해져 있고 밤에 창을 통해 오물이나 쓰레기를 하수구로 던졌다”고 했다.
종로구청 옆 이마빌딩은 궁중에 필요한 말을 기르는 사복시가, 청계천 마전교에는 말과 소를 빌려 주거나 매매하는 세마장(貰馬場)이 위치해 말의 배설물이 그대로 하천으로 유입됐다. 나라에서도 굳이 단속하지 않았다. 세종 때 “도읍은 인가가 번성하고 그곳의 개천도 더러워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어효첨의 주장을 받아들여 오물투기를 방관했다.
죽은 동물 사체, 죽은 유아의 시체까지도 밤중에 몰래 버렸다. 1866년 병인박해 때는 처형한 천주교인들의 시신을 투기해 청계천 4가 효경교(孝經橋)에서 오간수문까지 피로 물들였다. 종종 살인사건도 발생했다. <현종실록> 1668년(현종 9) 음력 2월 3일 기사에 따르면, 사헌부가 소에 땔감을 싣고 와 팔던 소년을 도적이 유인해 소를 빼앗은 뒤 살해한 사건을 보고했다. 도적은 시체를 항아리 속에 넣어 장통교 아래 버렸다고 했다.
심지어, 불륜 등으로 원치 않는 아이를 낳았을 때 청계천에 유기했다. 정약용의 <목민심서>는 “한양의 작은 개천에는 간혹 버려진 아이들이 있는데 그 중에는 간음으로 인해서 낳은 아이가 많다”고 했다.
1760년(영조 36) 2월, 최대 규모의 준천(濬川)사업이 벌어진다. 20만 명의 인원을 동원한 57일간의 대역사였다. 하천을 준설하는 동시에 수로를 직선으로 변경하고, 양안에 돌로 축대를 쌓았다. 준설과정에서 나온 모래흙을 오간수문 안쪽의 청계천변 양쪽에 쌓았다. 그 높이가 마치 산과 같아 가산(假山) 또는 조산(造山)이라고 했다. 가산은 한양의 거지들이 굴을 파고 거주했다. 가산은 일제강점기 종로를 돋우거나 건물을 지으면서 평지로 변했다.
내년이면 청계천 복원사업은 20년을 맞는다. 요즘 청계천을 가보면 방문객이 예전만 못하다. 서울시 자료를 보더라도, 복원초기 2800만명에 달했던 연간 방문객은 코로나19 기간 800~900만명까지 급감했다가 최근 몇년간은 1100만명 수준에 그치고 있다. 청계천 복원은 친환경을 지향했지만 콘크리트 일색의 회복이었다. 복원사업은 일회성에 그칠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진행돼야 한다. 20년전 기술적 한계로 시도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다면 이런 것부터 먼저 해결해 보면 어떨지.
# 도시는 멈춘 듯 보여도 생명체처럼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현대의 모습 속에 켜켜이 쌓인 역사를 감추고 있는 것입니다. ‘서울지리지’에서는 매력적인 도시, 서울의 모든 과거를 땅속의 유물을 건져내듯 들춰봅니다.
<참고문헌>
1. 청계천, 중구의 물길을 따라. 중구향토사자료 제13집. 중구문화원. 2012
2. 문학속에 피어난 서울 중구. 중구향토사자료 제22집. 중구문화원. 2021
3. 조선왕조실록. 한경잡영(강준흠). 목민심서·다산시문집(정약용). 하재일기(지규식). 경도잡지(유득공). 추재집(조수삼)
4. 다시 찾은 청계천. 서울역사박물관. 2005
5. 청계천. 서울역사박물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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