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세현의 재난백서] 재난문자에 대피 장소 넣었더니

강세현 2024. 3. 17.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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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 늘며 재난문자 발송도 증가
재난문자에 대피 장소 넣었더니 이동
재난문자 받으면 경각심 가져야
2023년 합천 산불을 끄기 위해 물을 뿌리는 헬기 (MBN)


긴 겨울이 끝나고 봄이 찾아왔습니다. 햇살 아래에선 살짝 땀이 날 정도로 기온이 올랐고, 나무에 맺힌 꽃망울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었습니다.

이렇게 설레는 봄에도 불청객은 있습니다. 바로 산불입니다. 지난해 전국에서 596건의 산불이 났고 4,992헥타르가 불에 탔습니다, 축구장으로 따지면 7천 1백여 개가 잿더미로 변한 겁니다. 그리고 이런 산불 피해의 대부분은 봄에 발생했습니다.

이렇게 산불이 늘면 휴대전화는 재난문자 때문에 바빠지는데요. 건조한 날씨에 산불이 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안내문자부터 근처 산에서 산불이 났으니 등산하지 말고 대피하라는 문자까지 많은 재난문자가 올 겁니다.

그럼 질문을 하나 던져보겠습니다.

"산불이 발생했습니다. 인근 주민은 산에서 멀리 떨어진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재난문자를 받았다면 집에서 나와 대피하실 건가요?

2022년 밀양 산불 (MBN)
“안전한 곳? 집이지”

2022년 5월 31일 경남 밀양시 부북면의 산에서 불이 났습니다. 불은 건조한 바람을 타고 번졌고 밀양시청은 재난문자를 발송했습니다.

[5월 31일 10:10]
금일 09:25경 밀양시 부북면 춘화리 산 13-31 산불 발생 입산을 (자제 또는) 금지하고 등산객 및 인근 주민은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5월 31일 13:38]
금일 09:25경 밀양시 부북면 춘화리 산 21 산불 발생, 산불 확산으로 인명, 재산피해가 예상됨. 인근 주민들은 마을회관 등 안전한 곳으로 대피 바랍니다.

국립재난안전연구원이 발표한 <긴급재난문자 송출 내용에 따른 유동인구 특성 분석>이란 보고서에서는 이동통신사 데이터를 기반으로 얼마나 많은 밀양시 주민들이 문자를 받고 대피했는지 분석했습니다.

우선 밀양시 부북면과 상동면의 주거 인구 이동량은 평상시와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주민들이 문자를 받고 난 뒤에도 움직이지 않은 거죠. 심지어 평소보다 주민이 늘어날 곳도 있었습니다. 교동의 경우 평상시 인구 증감률은 0.85%였지만 산불 기간엔 7.38%였습니다. 평상시보다 산불이 났을 때 집에 머무르는 인구가 더 늘어난 거죠. 왜 시민들은 문자를 받고도 대피하지 않고 집에 머무른 걸까요?

재난문자를 다시 살펴보면 '마을회관 등 안전한 곳으로 대피 바랍니다'라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즉 구체적인 대피 장소를 정하진 않은 거죠. 연구를 진행한 표경수 국립재난안전연구원 연구원은 "문자에 구체적인 대피 장소를 언급하지 않고 단순히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라'고 문자를 보내면 시민들은 안전한 장소를 자기 집으로 인식해 집에 머물게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2022년 옥계면에서 시작된 산불로 도로가 연기로 가득 찬 모습 (MBN)
대피 장소를 넣었더니

그렇다면 재난문자에 구체적인 대피 장소를 넣었을 땐 어떻게 됐을까요? 2022년 3월 5일 새벽 강릉 옥계면에서 발생한 산불을 확인해보겠습니다.

[3월 5일 3:34]
강릉시 옥계면 남양1길 152-16에 산불 발생. 괴란, 심곡, 만우 주민들께서는 망상 컨벤션센터로 신속히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3월 5일 11:22]
강릉 옥계 산불 발생 부곡 승지골, 묵호 창호초등학교 및 해맞이길 인근 주민께서는 동해체육관(덕골길10) 또는 망상컨벤션센터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동해시는 대피 장소를 구체적으로 '망상 컨벤션센터'라고 적어서 재난문자를 보냈습니다. 망상동의 주거 인구 이동을 분석해보면 평상시 증감률은 –1.23% 수준이었습니다. 약 1%의 인구가 떠났다는 말이죠. 하지만 대피 문자가 발송된 산불 기간의 평상시 대비 증감률은 –6.4%였습니다. 평상시 대비 5~6배의 인구가 감소한 겁니다. 구체적으로 대피 장소를 적었더니 주민들이 이동하기 시작한 겁니다.

외부에서 망상 컨벤션센터가 있는 망상동으로 이동한 인구를 분석해보니 문자를 보낸 이후 방문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다고 합니다. 재난문자를 받은 시민들이 망상동 컨벤션센터로 대피한 거죠. 한마디로 재난문자에 구체적인 대피 장소를 적으면 시민들이 움직이게 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대피 장소가 있는 재난문자와 없는 재난문자
모든 문자에 대피 장소를?

그럼 왜 모든 재난문자에 대피 장소를 적지 않는 걸까요?

산불 대피 명령 시
[사용기관명] 오늘 O시, OO시 OO동 OO산 산불 확산 중. 인근 주민과 등산객은 산에서 멀리 떨어진 안전한 곳(OO)으로 즉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위 문구가 산불이 났을 때 대피를 명령하는 재난문자 표준 문안입니다. 문안에는 안전한 곳이라고 표시하고 또 가로 안에 장소를 쓰게 해뒀죠. 하지만 이는 의무는 아닙니다. 각 발송기관에서 자체 판단하에 대피 장소를 써도 되고 안 써도 되는 거죠.

표경수 연구원은 무조건 대피 장소를 넣는 게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가령 대피 장소를 지정해서 문자를 보냈다가 산불의 방향이 바뀌며 대피 장소가 위험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대피 장소로 향하는 경로가 갑자기 산불로 위협을 받을 수도 있고요.

이런 문제 때문에 문자를 발송하는 담당자의 고민은 깊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어디로 대피 장소를 정해야 할지, 또 지정해도 안전할지 판단할 게 많을 테니까요. 그래서 지금보다 구체적인 재난문자 매뉴얼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어떤 경우에 대피 장소를 넣고 어떤 경우에는 넣지 않는지, 만약 넣는다면 어떤 형식으로 대피 장소를 안내해야 할지 등을 매뉴얼로 정해야 한다는 겁니다.

일본의 경우 지진 등 재난이 발생했을 때 1차 재난문자에서 재난의 발생 사실을 알려주고 2차 문자에서는 안전한 대피 경로를 포함한 대피 장소를 안내한다고 합니다. 우리도 이런 방식의 도입을 고민해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올봄에도 여러분의 휴대전화는 바쁘게 울릴 겁니다. 재난문자 시스템을 개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바로 나도 언제나 재난의 피해자가 수 있다는 경각심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재난문자가 왔을 때 대수롭지 않게 끄기보다는 정말로 대피가 필요한 상황인지 확인하고 필요하다면 바로 움직여야겠습니다.

[ 강세현 기자 / accent@mbn.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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