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모노 입었다는 이유로 밤새 5시간을 ‘꼬박’…애국주의에 발목잡힌 ‘이 나라’의 딜레마 [한중일 톺아보기]
지난 1월 장쑤성 난징시에 있는 한 대형 쇼핑몰에서는 새해를 기념해 붉은 동그라미를 넣어 디자인 한 포스터가 문제가 됐습니다. 일부 중국인들이 일장기를 연상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항의를 한 것인데, 결국 공안들이 나서면서 포스터는 철거됐습니다.
이에 대해 “모든 일출 이미지들에 일일히 트집을 잡게되면 태양을 형상화한 화웨이 로고 등도 문제 삼아야 된다”며 지나치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앞서 2022년 역시 장쑤성내 한 번화가에서는 일본 애니메이션 주인공을 코스프레한 중국여성이 공안에 체포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 여성이 입은 의상이 기모노였던 점이 화근이었습니다. 공안은 “중국인답게 하라”며 고함을 질렀고 연행된 이 여성은 밤새 5시간 넘게 심문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에 따르면 중국시장에서 아이폰은 이례적 할인행사에도 판매량이 올들어 첫 6주 동안 지난해 동기 대비 24% 감소, 중국 시장 점유율은 15.7%로 내려앉았습니다. 반면 같은기간 화웨이 판매량은 64%나 뛰었고, 점유율도 9.4%에서 16.5%로 급등 했습니다.
이 같은 변화는 최근 중국 가계소비가 침체되면서 아무래도 가격이 싼 화웨이쪽으로 수요가 몰린 영향이 있겠지만, 정치적 배경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중국에서 아이폰 매출 감소 기미가 나타나기 시작한 건 지난해 9월 부터 였습니다. 중국 당국이 공무원들에게 아이폰 사용을 금지했다는 외신발 보도(중국 당국은 부인)가 나온 시점이었죠. 이때 이미 중국의 아이폰 유저들 주변에서는 “중국을 사랑한다면 화웨이다. 아이폰을 쓰면 매국노” 라는 분위기가 만연했습니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첨단 반도체를 확보하려는 중국과 이를 필사적으로 저지하려는 미국의 기술패권 경쟁은 중국인들에게 소위 그들만의 ‘대국 의식’과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즉, 최근 아이폰 점유율 하락은 중국 대중들의 민족주의와 동조 압력이 낳은 결과라고 할 수 있죠.
연초 난징의 쇼핑몰에서 일장기 소동을 유발하고 이를 웨이보 등에 생중계했던 왕훙(網紅·인플루언서)에 대해 중국 관영 CCTV는 조회수와 수익을 위해 “애국을 비즈니스 삼아 유해 활동을 했다”며 힐난했습니다.
같은시기 일본 노토반도에서 지진이 발생하자, 후쿠시마 오염수 방출을 단행한 데 따른 “인과 응보”라고 발언했던 아나운서의 경우는 방송 출연 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죠.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몽을 강조하며 민족주의를 전면에 내세워 온 중국 당국인데, 자국민들의 과도한 민족주의를 경계한다는 게 언뜻 모순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진핑 정부에게 애국과 민족주의는 미국 등 서방과의 대결을 연출함으로써 강권 통치를 정당화 하기 위한 일종의 도구일 뿐입니다.
지난해 6월 시진핑 주석은 공산주의 청년단 지도부와 만난 자리에서 “애국의 진수란 국가와 함께 공산당과 사회주의도 사랑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는 시주석이 어디까지나 ‘공산당 체제에 봉사하는 것’을 애국과 민족주의의 전제로 삼고 있다는 점을 시사해 줍니다.
즉, 무엇이 애국인지 판단하는 기준은 결국 그것이 공산당 체제를 이롭게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중국인들이 당의 이득과 상관없이 아무때나 애국이나 민족주의를 외칠때 당국이 제재를 가하려는 건 전혀 이상할게 없다는 결론에 이르기 됩니다. 한마디로 ‘당(黨)제 민족주의’라고 할 수 있죠.
실제로, 지난해 11월 미중 정상회담 뒤 양국간 해빙 기류가 나타나자 CCTV 등 관영 매체들이 먼저 반미 톤을 다운시켰고 민간과 SNS에서도 일제히 여기에 보조를 맞추는 움직임이 나타났습니다.
중국의 지난해 GDP 성장률은 목표치를 소폭 상회한 5.2%를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명목 GDP에서 채무가 차지하는 비중이 287.8%(전년 대비 13.5% 증가)에 달했습니다. 이는 민간 소비가 냉각된 상황에서 정부 지출로 GDP를 지탱하고 있는 형국이라는 점을 시사해주는 대목 입니다.
중국의 주택 가격은 24개월째 하락세 입니다. 주식시장은 2021년 9월 고점 대비 20% 가량 떨어지며 4년째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민간기업의 고정자산 투자는 0.4% 줄어들었는데, 이는 코로나 봉쇄가 삼엄했던 2022년 보다 더 위축된 수준 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여전히 최악인 청년 실업률 입니다. 중국의 청년 실업률은 2018년 공표 이래 지속적으로 올라, 지난해 6월 21.3%로 역대 최고치로 치솟은 바 있습니다. 그러자 당국은 한동안 청년실업률을 공개하지 않다가 지난 1월 “더 정확한 집계를 위해 새 기준을 적용했다” 며 집계대상에서 재학생수를 제외한채 14.9%라는 반쪽짜리 실업률을 내놨습니다.
그러나 베이징대 경제학과 장단단 교수 등 전문가들은 중국의 실제 청년 실업률이 40%를 훌쩍 넘을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실업률이 40%를 넘는다는 것은 만 16∼24세 중국인 2.5명 중 최소 1명 이상이 실업자라는 뜻입니다.
어느나라든 국민들이 겪는 고통이 지속되면 불만의 화살은 지도부를 향하기 마련입니다. 다만, 중국은 근래 무자비한 ‘제로 코로나’ 정책을 견디다 못한 일부 사람들이 ‘백지시위’ 에 나선 사례가 있긴 해도, 체제 특성상 당국에 대한 불만이 노골적으로 나타나긴 어렵습니다.
바로 그럴때 평소 국가적으로 대립해 국민감정이 좋지 않은 나라들(미국, 일본, 최근에는 한국까지)은 사회적 불만과 분노를 표출하기 좋은 대체 타겟이 됩니다. 불안과 불만이 커질수록, Z세대 등 젊은층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애국 민족주의는 더 과격한 모습을 띌 수 있습니다.
그동안 민족주의 감정을 통치 도구로 적극 활용해 온 중국 지도부는 만약 앞으로도 경제상황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예전과 달리 통제에 어려움을 겪을것으로 예상됩니다.
애국과 민족주의가 오히려 중국 지도부를 점점 옥죄면서 그들의 이익에 쉽게 부합하지 않는 ‘딜레마’ 가 되는 셈입니다. 이럴 경우 내부의 긴장을 외부로 돌리면서 동중국해와 남중국해 등 주변 지역의 중국발 긴장이 더 고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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