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이강의 다리'가 담았던 슬픔과 고통

박흥수 사회공공연구원 철도전문위원 2024. 3. 17. 0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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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야스쿠니에서 칸차나부리 죽음의 철도까지] ③톤부리발 칸차나부리행 257열차

<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상> 을 연재 하고 있는 자칭·타칭 '철도 덕후' 사회공공연구원 박흥수 철도 전문위원은 지난 1월 말에서 2월 초까지 태국 철도 답사를 다녀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죽음의 철도 노선으로 불렸던 시암 – 버마 철도 구간 중 현재 남아 있는 방콕 – 남톡 구간을 달리며 일본 제국주의의 대동아 공영이라는 미명 아래 벌어진 역사의 한 부분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대동아공영권의 울타리를 철도로 달린 그 이야기를 <도쿄 야스쿠니에서 칸차나부리 죽음의 철도까지>라는 부제로 몇 차례에 나누어 소개한다.

방콕에서 출발하는 칸차나부리행 열차는 방콕 중심에서 짜오프라야 강 건너 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 톤부리 역에서 출발한다. 기차를 타고 방콕에서 칸차나부리까지 가기 위해서는 오전과 오후 하루 두 편 있는 남톡행 열차를 타야 한다. 오전 열차는 7시 45분 출발이라 숙소를 역 인근에 잡아 아침 번잡한 시간을 절약했다. 톤부리 역은 시장을 끼고 있다. 시장 특유의 활기가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듯했다. 매표소에서 콰이강의 다리 역까지 가는 표를 끊었다. 열차 값은 100바트이다. 특이한 점은 현지인들은 거리별로 다른 요금을 내는데 외국인은 한 정거장을 가든 종착역까지 가든 100바트를 내야 한다. 한화로는 환율 변동에 따라 다르지만 약 3,800원 정도 한다. 여행자들은 역 앞 시장에서 아침 식사용 도시락을 사기도 한다. 볶음밥 위에 제법 큰 닭 튀김과 약간의 야채를 얹은 도시락이 20바트, 800원이 채 안 되는 가격이다. 내가 표를 사는 동안 일행들은 도시락 4개에 50바트를 더주고 과일 2팩을 샀다. 저렴한 시장 물가 덕분에 기분 좋게 조식을 챙겨 열차에 올랐다.

톤부리 역은 수도 방콕에 있는 출발역이지만 측선까지 포함해 4개의 선로를 가진 작은 역이다. 열차 출발에 사용되는 신호기는 한국에서는 사라진 완목식 신호기를 사용한다. 완목식 신호기는 기계식 신호기로 근대 철도 부설 시기부터 사용된 방식이다. 기둥 위에 선로 전환기로부터 이어진 와이어가 연결된 날개가 달리는데 이 날개는 보통 나무로 만들어진다. 그래서 어깨를 의미하는 완과 재료로 쓴 나무를 합성해 완목신호기라고 부른다. 날개가 수평을 유지하면 정지신호고 아래로 45% 꺾이면 열차가 출발하거나 도착해도 좋다는 신호다. 멀리서 완목신호기를 보면 거인이 한쪽 팔을 어깨높이로 들어 올린 것처럼 보인다. 기관사가 날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는 야간에는 날개의 움직임에 따라 적색이나 노색 등이 표시된다. 한국에서는 1899년 대한제국 시절 경인선이 처음 개통되었을 때부터 적용됐다. 완목식 신호기는 전기전자제어가 일반화된 현대의 철도 노선에서는 볼 수 없는 장치이다. 톤부리 역은 태평양 전쟁 시대의 철도 신호체계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남톡이 종착역인 칸차나부리로 가는 257열차가 톤부리역 승강장에서 출발을 기다리고 있다. ⓒ박흥수
▲톤부리역 앞 시장에서 산 아침식사용 도시락. 싸고 맛났다. ⓒ박흥수
▲톤부리역 선로 마다 설치되어 있는 완목식 출발신호기 중 3개가 보인다. ⓒ박흥수
▲강원도 고성군 송지호 공원 동해북부선 기념 조성물에 설치된 과거 한국철도에서 사용됐던 완목식 신호기 ⓒ박흥수

열차는 예정된 출발시간을 22분이나 넘겨 8시 7분에 출발했다. 한국에서 22분이나 출발역 열차 지연이 발생하면 시쳇말로 난리가 난다. 하지만 톤부리 역에서는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다. 철도 직원들도 승객들도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인 양 느긋하다. 가끔은 이런 여유가 부러울 때도 있다. 사용 기간이 30년은 족히 넘었을 디젤기관차가 출발을 알리는 기적을 몇 번 울리는가 싶더니 객차가 한 번 움찔하고 끌려갔다. 언제나 그렇듯이 열차 바퀴가 선로 위로 미끄러지며 속도를 올리자 가슴이 뛰었다.

열차가 역 구내를 빠져나가자 선로 변 늘어선 나뭇가지가 객차를 두드렸다. 나뭇 잎이 열린 창문 안으로 떨어지기도한다.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간 나뭇가지들로부터 빗자루 세례를 당할 수도 있다. 8량이 연결된 객차는 칸마다 다양한 내부 구조를 갖고 있어 묘한 재미를 선사했다. 객실 천장에는 선풍기가 달려 있지만 섭씨 30도가 되지 않는 선선한(?) 날씨 덕분인지 가동되지는 않았다. 객실 창은 옛날 한국의 비둘기호처럼 유리문 양쪽 끝의 걸쇠를 눌러 아래로 내려 열 수 있게 되어있다. 대부분의 창들은 활짝 열려 있어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승객들의 머리칼을 날렸다. 좌석은 수직 등받이에 쿠션이 달려 있는 철제의자로 구성된 칸이 있는가 하면 전체 객실과 의자가 목재로 되어 있는 칸도 있다. 레트로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나무 의자에 앉으면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착각에 빠질 수도 있다. 객실 의자는 서로 마주 보는 크로스 시트 형식을 이루고 있지만 일부 칸은 한국의 지하철처럼 롱 시트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열차가 출발하면 차장이 표를 검사하는데 표를 내밀면 차장은 펀칭 기계로 표에 구멍을 뚫어준다. 이 역시 현대 한국 철도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전통적인 차내 검표 방식이다. 흥미로운 점은 또 있다. 음식을 파는 사람이 수시로 객실 통로를 오간다. 한국 철도에서 사라진 매력 중의 하나는 바로 열차 내 식당이나 이동 음식 판매원일 것이다. 그만큼 기차 타는 재미가 반감됐다. 음식을 판매하는 사람들은 태국 철도청의 직원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판매원은 유니폼을 입고 있지도 않았고 역에 따라 판매원과 판매 물품이 바뀌었다. 한 판매원이 한쪽 팔뚝에 삶은 계란과 메추리알, 말린 망고와 스낵류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들고 객실을 돌았다. 한때 삶은 계란과 사이다가 로망이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쌀밥이 든 도시락이나 열대과일들을 파는 판매원도 있었다. 속도 측정 앱으로 열차의 속도를 재어보니 대략 시속 70킬로미터를 유지했다. 기차 여행을 즐기기에 딱 좋은 근대의 속도였다.

방콕 서쪽에서 북으로 난 철길을 달리던 열차는 어느덧 농 플라독 역에 도착했다. 농 플라독 역은 태국 서부 철도노선에서 남북으로 갈리는 분기점이다. 농 플라독 역 분기점에서 왼쪽 선로를 타면 말레이 반도를 따라 말레시아를 거쳐 싱가포르까지 남쪽으로 이어지는 철길이고 오른쪽 선로를 타면 북으로 달리는 길이다. 1942년 일본이 싱가포르를 점령한 후 포로가 된 연합군 병사들은 반퐁 역을 잊지 못한다. 농 플라독 역에서 싱가포르 방향 남쪽으로 이어진 철길에서 처음 만나는 역 그러니까 농 플라독 역의 다음 역이다. 포로들은 모두 반퐁 역에 내려 거대하게 조성된 농 플라독 포로수용소에 모였다가 일본군의 분류에 따라 북부노선 곳곳에 배치됐다. 싱가포르에서 방콕까지 오는 동안 포로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했고 죽어나가기도 했지만 지옥에는 아직 발을 들여놓지도 않은 상태였다.

리차드 플래너건의 소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의 한 장면을 보자. "닷새 동안 먹을 것은 전혀 없었고, 기차는 여섯 번 멈췄으며, 세명이 죽었다. 닷세째 오후에 반퐁에서 그들은 기차에서 내렸다. 방콕에서 40마일(64km) 떨어진 곳이었다. 그들은 곧 높이 울타리가 쳐진 트럭에 실렸다. 가축처럼 한 대에 서른 명씩 빽빽하게 실려서 원숭이처럼 서로에게 달라붙은 채 고운 흙먼지가 6인치(15cm)나 쌓인 길을 따라 정글을 통과했다."

농 플라독 역은 시암-버마 철도 건설 시작점이었기에 엄청난 장비와 인력이 모여들었다. 높이 솟아 있는 증기기관차용 급수탑 아래로 화물차량들이 건설용 자재를 가득 싣고 있었고 일본 군의 지시 아래 연합군 포로들과 노무자들이 끊임없이 오갔던 역이었다. 농 플라독 역에는 1942년 버마-시암 철도 건설 시작점을 알리는 큰 표지석이 있는데 잠깐의 정차시간 동안 역사 쪽으로 접근할 수 없어 확인하지 못했다. 게다가 농 플라독 역은 새로 역을 신축하는 중이어서 공사 중인 새 건축물과 자재들에 가려 기존 역을 자세히 보기도 힘들었다. 새로 만들어지는 역은 현대식 고상홈으로 지어지고 있다. 가설 되고 있는 신호기 모양도 완목식이 아니라 중앙집중식 전기전자제어 방식이다. 조만간 방콕 인근 철도망은 현대식으로 개량될 것으로 보였다.

▲방콕 톤부리발 남톡행 257열차의 나무로 만들어진 객실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박흥수
▲판매원이 수시로 열차를 순회하며 먹을 것을 팔았다. ⓒ박흥수

농 플라독 역을 출발한 열차는 남북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에서 북쪽 선로로 들어섰다. 창밖으로 펼쳐진 지형을 보니 칸차나부리까지 이어지는 구간은 특별히 난 공사 구간이라 할 수 있는 높은 산이나 큰 강은 보이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편했던 공사구간이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비록 평지라도 철도 부설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1년 내내 뜨거운 여름이 이어지는 열대의 나라에서 강제동원된 중노동의 실상은 상상이 안됐다.

방콕 톤부리 역을 출발한지 3시간쯤 지나 열차는 칸차나부리 역에 정차했고 이곳에서 5분 정도 더 달린 후 목적지인 콰이강 다리 역에 도착했다. 칸차나부리 역과 콰이강 다리 역에서 대부분의 승객이 내렸다. 종착역인 남톡 까지는 1시간 반 이상을 더 가야 한다. 승객을 내려놓은 열차는 바로 출발했고 그 유명한 콰이강 철교를 넘기 시작했다. 관광객들은 다리 곳곳의 비상 대피 공간에 자리 잡은 채 철교를 넘는 열차를 향해 환호했다. 열차는 사람이 나란히 걸어도 따라갈 만한 느린 속도로 다리를 건넌 후 속도를 높여 북쪽으로 사라졌다.

태국 사람들이 쾌 강 또는 쾌야이 강이라고 부르는 콰이강 다리가 유명해진 데에는 포로수용소 이야기를 다룬 같은 이름의 영화가 한 몫을 했다. 한때 한국에서는 호국의 기운이 가득한 기념일에 방송국 특선 프로그램으로 몇 차례 방송됐다. 그런 이유로 영화에 대한 기억은 특정한 날에 우연히 본 몇 장면들이 수년에 걸쳐 쌓여있는 것이었다. 대신 영화 음악만큼은 뇌리에 강하게 박혀있다. 휘파람 행진곡은 아마도 이 영화를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낯익은 선율일 게 분명하다. 여행을 떠나기 전 어떤 의무감에서라도 영화를 제대로 봐야 했다. 더구나 에릭 로맥스는 자신의 수기에서 이 영화는 포로들의 삶을 왜곡했다고 한탄했다.

영화는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어이가 없었다. 역사적 사실과 전혀 동떨어졌을 뿐 아니라 콰이강 다리와 관련된 잘못된 인식을 고착시킬 여지가 너무나 컸다. 영화는 1957년 작품이다. 미국은 1945년 이후 첨예하게 부딪히는 체제대결 국면 속에 일본의 전쟁범죄를 추궁하기보다는 일본을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을 실행하는 창구로 삼았다.

▲콰이강의 다리를 건너는 257열차. ⓒ박흥수

보통 헐리우드 영화에서 정의로운 백인 또는 미국의 적을 표현하는 방식은 단순한 악마 그 자체다. 미국의 적은 언어구사도 미개하게 처리된다. 비 인간적이고 단말마적인 언어를 구사하며 삶에는 아무런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타잔 속 아프리카인부터 중동의 테러리스트까지 백인들에 맞선 사람들은 인간의 생명을 업신여기고 화만 낸다. 반면 백인 또는 미군 병사의 죽음 같은 내러티브가 전개될 때에는 좋은 아들 또는 남편이거나 아버지이며 선한 의지를 삶 속에 구현하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베트남 정글에서 미군의 기관총에 낙엽처럼 쓰러지는 베트콩은 그렇게 당해도 싸지만 전우애 넘치는 미군의 안타까운 죽음은 슬로우모션으로 클로즈업 된다.

이미 미국의 충실한 하위 동맹국이 된 일본을 1957년의 헐리우드가 굳이 악마로 삼을 필요는 없었던 듯하다. 영화에 등장하는 일본군 수용소장은 '우리말인 영어'를 구사하고 인간미가 있으며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영화는 일본군 수용소장과 영국군 포로를 대표하는 두 고위 장교의 자존심 싸움이 한 축을 구성하고 있다. 콰이강 다리가 있는 칸차나부리 수용소 캠프의 실제 모습과는 동떨어진 설정이다. 게다가 영화 속에는 동양인에 대한 비하는 물론 오리엔탈리즘과 젠더 왜곡까지 담고 있다. 영화 속 일본군은 기술 부족으로 도저히 다리를 건설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이에 영국군 포로 지휘관인 니콜슨 중령의 지휘 아래 미개한 일본 대신 고도의 기술력을 가진 연합군 포로들이 다리를 건설하게 된다. 영국이 부설을 시도했다가 포기했던 역사적 사실을 간단히 바꿔버린다. 더 황당한 일은 니콜슨이 다리 건설을 위해 환자 병동까지 가서 꾀병 환자를 가려내거나 노동이 가능한 병동 병사들을 공사 현장으로 동원한다. 일본군이 환자들까지 강제로 동원하기 위해 포로들을 압박했던 사실과는 반대의 상황이다.

콰이강의 다리를 폭파하기 위해 투입되는 영국군 특수부대 요원들은 현지 항일 게릴라들의 지원을 받는다. 이들 중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백인들에게 선망의 눈길을 보내는 아시아 미녀들이다. 특공대 안내를 맡은 미녀 게릴라들은 정의로운 영국 투수부대원에 의해 일본군의 강간위협으로부터 구원받는다. 다리가 등장하고 포로가 나오지만 실제 콰이강의 다리와는 무관한 영화가 아카데미상을 휩쓸고 명화로 칭송되는 것은 황당한 일이다. 더구나 시간이 흘러 영화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실제 포로수용소 생존자들에게는 매우 불편한 영화였다. 당연히 포로수용소를 겪은 참전 병사들은 원작소설과 영화를 비난했다. 다리 인근의 가게 스피커에서 종종 울려퍼지는 콰이강의 다리 영화 OST가 귀에 거슬렸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콰이강이 담았던 슬픔과 고통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다.

▲시암-버마 철도 개념도 ⓒ프레시안(정은영)

[박흥수 사회공공연구원 철도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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