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고 마음으로 오른 그 산 시로우마다케, 4년 만에 드디어 [ESC]

한겨레 2024. 3. 16.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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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여행 일본 북알프스 시로우마산 ①
소설 ‘여자들의 등산 일기’ 배경
일본 나가노현과 도야마현에 걸쳐 솟은 해발 2932m의 시로우마다케산.

일본 시로우마산(시로우마다케) 여정의 발단은 한권의 책이었다. 2019년 여름, 가볍게 들른 서점에서 제목에 꽂혀 구매한 ‘여자들의 등산 일기’를 읽는 동안 내 마음은 이미 일본의 눈 쌓인 북알프스를 오르고 있었다. 이 책은 ‘고백’, ‘속죄’, ‘모성’ 등의 작품으로 오랜 세월 일본 문학계에서 단단한 입지를 다져온 작가 미나토 가나에의 연작 장편소설이다. 8개의 산을 배경으로 쓰인 8개의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는데 각각의 이야기가 고유의 서사를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이야기와도 유기적으로 얽혀 있어 퍼즐 맞추듯 흥미진진하다.

책 내용 가물가물…나만의 등산 일기를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책 속 8개의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모두 여성들이다. 저마다 고민과 사연을 가진 여성들이 등장해 산을 오르고, 그 과정에서 마주치는 안팎의 풍경 앞에서 느리지만 성실하게 자기만의 길을 찾아 나간다. 학생 때부터 산을 좋아했고 등산이 취미였으나 결혼을 하고 일을 하면서 10년 가까이 산을 오르지 못한 시기가 있었다는 작가의 어느 인터뷰를 보면서 ‘이 책은 산을 향한 그리움으로 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해 겨울, ‘중국발 우한 폐렴’이라는 흉흉한 말이 세간을 맴돌았고 이듬해인 2020년 봄 무렵 본격적으로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전대미문의 시대가 열렸다. 막혀버린 하늘길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멈춰버린 시간 안에는 오랫동안 가슴 속에 품고 있었던 ‘일본 북알프스 여행’도 들어 있었다. 태어나 한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절절히 체감했다.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었고, 그 시절을 통과한 사람이라면 대체로 그랬다.

“밤 11시, 집합 장소인 신주쿠역 버스터미널. 여기서 야간 버스를 타고 나가노역으로 간다.” 이런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여자들의 등산 일기’를 기억에서 다시 소환한 것은 그로부터 4년 후인 2023년 여름이었다. 밤 11시가 아닌 오후 4시이긴 했지만 내가 서 있는 곳이 신주쿠역 4층 버스터미널이라는 점, 목적지가 나가노현 어딘가라는 점, 도쿄에서 나가노현까지 4~5시간 이동하는 야간 버스를 탄다는 점 등이 재미있게도 책 속 상황과 일치했다.

소설 속 배경의 산으로 떠나는 여행이라니. 언젠가 한번은 상상했던 여행이었던 만큼 꿈을 실현하는 자신에게 스스로 적잖이 감동했다. 그러나 4년이라는 시간은 안타깝게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던 책의 내용을 희미하게 지우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소설 속 에피소드는 가물가물했지만 분명한 것은 나도 다시 나만의 등산 일기를 써야 할 때가 다가왔다는 것이었다. 주어인 ‘여자들’의 자리에 이제 ‘나’의 이름을 적어야 했다. 그렇게 8개의 이야기 중 작가가 실제로 딸과 함께 오른 첫 산이라 가장 좋아한다는 시로우마산으로 향했다.

산으로 둘러싸인 평화로운 산악 마을인 하쿠바촌.

시로우마산은 일본 나가노현과 도야마현에 걸쳐 솟은 해발 2932m의 고산으로 북알프스 연봉의 북단에 위치한다. ‘백마(白馬)’라는 한자는 ‘시로우마’라고도 읽지만 ‘하쿠바’라고도 읽기에 하쿠바다케라고도 부른다. 일본에는 남알프스, 중앙알프스, 북알프스로 구분하는 세개의 거대한 산군이 있다. 이 중 북알프스는 나가노·도야마·기후현에 걸쳐 105㎞ 길이로 뻗어 있다. 후지산(3776m)과 기타다케산(3193m)에 이어 일본에서 세번째 높은 오쿠호타카산(오쿠호타카다케, 3190m)이 북알프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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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오르는 일본의 북알프스

북알프스의 산을 오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일전에 산악 잡지 기자로 일하면서 취재 차 일본의 산을 적지 않게 오르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 산들도대체로 2000m가 넘었기에 우리나라 산에서는 볼 수 없는 야생화라든가 산죽, 고원 습지, 고목과 산정호수 앞에서 마냥 신기해했다. 이러한 환경·생태적 이유로 일본의 산은 우리나라 등산객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다. 화산이 하사한 노천에서의 등산 후 온천욕 또한 일본의 산을 오르는 묘미 중 하나다.

신주쿠 중심부에서 출발한 쾌속 버스는 도쿄 시내를 통과해 외곽의 중앙자동차도로 들어섰다. 버스에 탄 승객은 나까지 모두 6명으로, 두사람은 중년의 남녀였고, 두사람은 어머니와 20대 딸인 듯했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또래의 30대 여성 한사람. 조합은 달라도 모두가 등산복을 갖춰 입고 자신의 키 만한 등산 배낭을 짊어지고 있었다. 마치 어디에서 왔는지는 몰라도 이제부터 같은 곳으로 갈 거라는 무언의 신호를 서로에게 보내는 것 같았다. 동행 없이 모처럼 혼자 떠나온 여행이었던 만큼 묘한 동질감과 안도감을 느꼈다.

하쿠바촌의 등산장비점.

버스는 한동안 같은 풍경의 길 위를 하염없이 달렸다. 그러는 사이 서서히 노을이 지고 구름 위 석양이 땅으로 길게 내려왔다. 문득 현재 위치가 궁금해서 휴대폰을 열고 구글 지도를 확인했다. 버스는 동북쪽과 남서쪽으로 길게 늘어진 일본 열도를 정확히 반으로 횡단하는 중이었다. 산으로 가는 길이었다. 혼슈 한가운데 위치한 나가노현은 일본에서도 특히 산이 많은 지역으로 통한다. 1998년 열린 18회 나가노 동계올림픽 경기장이었던 일본 최대 규모의 핫포네 스키장이 있어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

하쿠바촌에 도착한 시각은 밤 9시 무렵이었다. 6명의 승객은 일제히 하쿠바 하포 버스터미널에 내렸다. 사람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더니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들 어디로 갔을까? 돌연 시장기가 몰려왔다. 식당을 찾을 요량으로 거리 쪽으로 나섰다. 하지만 불이 켜진 곳은 한군데도 보이지 않았다. 터미널 앞 24시 편의점만이 비현실적으로 눈 부신 빛을 밝히고 있을 뿐이었다. 편의점에 서서 삼각김밥을 우걱우걱 씹으며 통창을 바라봤다. 산은 어디쯤 있을까? 모든 것을 감춘 어둠을 응시하며 보이지 않는 산의 형상을 상상했다.

글·사진 장보영 등산여행가
스물다섯 살에 우연히 오른 지리산에 매료된 이후 히말라야와 알프스, 아시아의 여러 산을 올랐다. 그러다 산을 달리기 시작했고 산악 잡지도 만들었다. 지은 책 ‘아무튼, 산’은 산과 함께한 청춘의 후일담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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