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제 탔나” 초긴장…‘파묘’ 속 스님, 이 음식 대접한 이유 [퇴근 후 부엌-잔치국수]

2024. 3. 16.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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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묘’에서 배우 이도현이 음식을 먹고 있다. [파묘 예고편 캡처]

퇴근 후 부엌


술에 절어 해장국을 시켜만 먹다가 어느 날 집에서 소고기뭇국을 직접 끓여봤습니다. 그 맛에 반해 요리에 눈을 떴습니다. 산더미 같은 설거지가 기다리고 있지만 나를 위해 한 끼 제대로 차려먹으면 마음이 충만해집니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한 끼에 만원이 훌쩍 넘는 식대에 이왕이면 집밥을 해먹어야겠다 결심이 섰습니다. 퇴근 후 ‘집밥러’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풀었습니다.


요리와 재료에 담긴 인문학 이야기도 한술 떠 드립니다.

[헤럴드경제=신주희 기자] 한국의 무속신앙을 다룬 영화 ‘파묘’의 인기가 뜨겁습니다. 1000만 관객 달성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요. 장재현 감독이 영화 제작 준비를 위해 4년 전부터 염장이를 따라다닐 만큼 치밀하고 꼼꼼하게 무속과 장례문화를 취재했다고 하지요. 영화 속 등장하는 음식과 식재료 하나하나에도 은유를 숨겨놓았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이번 퇴근 후 부엌에서는 영화 ‘파묘’ 속 음식의 메타포를 해석해보려 합니다. (※약한 스포일러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영화의 전반부에서 후반부 사이, 결정적 사건이 벌어지기 전 '미드포인트’. 극의 분위기가 급변합니다. 염장이 영근(유해진 씨) 풍수지사 상덕(최민식 씨), 무당 화림(김고은 씨), 애동제자 봉길(이도현 씨)은 파묘(무덤을 파냄)를 마치고 발걸음을 서두릅니다. 그러다 날이 어두워지자 근처 보국사라는 절에서 하룻밤을 청합니다. 기괴한 관을 들고 온 이방인들을 스님은 기꺼이 맞아줍니다. 보국사 스님은 이들에게 잔치국수를 말아주고 담금주를 내어줍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여러 관객들은 ‘스님이 잔치국수에 수면제를 탄 것은 아닌지’, ‘험한 것과 한 패는 아닌지’ 의심하게 되죠. 스님은 왜 하필 잔치국수를 대접 했을까요?

[음식 썰]
잔치국수 [뉴시스]

예전부터 국수는 스님들의 최애 메뉴였습니다. 매년 음력 정월 26일 법정(法頂) 스님의 추모 다례재에도 거의 빠지지 않고 상에 올라가는 음식이 ‘간장 국수’입니다. 으레 생각하는 간장 비빔 국수와는 다릅니다. 잔치국수지만 멸치 등 생선과 고기로 육수를 내지 않습니다. 절집 음식답게 버섯과 다시마로 채수를 내고 오로지 간장으로 간을 맞춰 간장 국수라 했다고 합니다.

법정 스님(왼쪽)과 도예가 김기철 씨(오른쪽). [길상사 홈페이지]

국수가 법정 스님만의 별미는 아닌듯합니다. 스님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누가 “스님, 죽 끓여 드릴까요?”하면 아무도 대답을 안 하지만, “스님, 국수 삶아 드릴까요?”하면 백이면 백 모두 대답을 한다는 것이죠. 사찰에서 국수의 또다른 이름은 '승소'입니다. 풀이 그대로 스님들을 미소 짓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조계사에서는 운영하는 사찰음식 전문점 이름도 승소입니다. 메뉴는 네가지로 단출합니다. 이곳에서도 비빔국수와 잔치국수가 인기 메뉴입니다.


일각에서는 스님들이 밀가루 면을 좋아하는 데에는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밀가루에는 잡곡밥과 달리 불용성 단백질인 '글루텐'이 함유되어 있는데요. 단백질이 부족한 스님들이 본능적으로 국수를 좋아할 수 밖에 없다는 설명이죠.

[파묘 예고편 캡처]

즉, 스님들에게 국수는 곧 귀한 손님을 대접한다는 성의의 표시라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를 보면 국수를 내어주는 스님은 ‘악당과 한패는 아닐 것’이라고 짐작해볼 수 있지요. 관객의 시각에서 수상해 보였던 잔치국수도 '맥거핀 효과'(관객들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극적 장치)를 위한 장치였던 셈입니다.


특히 사찰식 잔치 국수는 살생을 하지 않은 재료로만 만듭니다. 살생을 하지 않고 염원을 비는 데에 쓰이기도 했죠. 불교 국가였던 고려에서는 종묘에 제사드릴 때 소 대신 국수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를 ‘면생(麵牲)’이라 하는데요. 제물로 바치는 가장 귀한 공물이던 소, 돼지, 양을 ‘희생(犧牲)’이라 합니다. 이 희생을 대신한 국수라는 의미입니다.


불교에서뿐 아니라 우리나라 무속 신앙에서도 무속인 역시 살생하여 얻은 음식을 조심합니다. 특히 영험한 기도를 앞두고는 ‘비린 것과 누린 것’을 피한다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날생선인 회, 누린내가 강한 개고기 및 들짐승 고기가 부정한 음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파묘 예고편 캡처]

영화에 등장하는 최종 빌런 ‘험한 것’은 날 것을 끊임없이 탐합니다. 영화 예고편에서도 험한 것이 깨어나면서 날생선인 은어를 받아먹는 장면이 등장하죠. 주인공들이 먹는 음식은 살생을 하지 않고 복을 비는 ‘국수’인 반면에 빌런인 ‘험한 것’은 날생선을 먹는 장면이 무척이나 흥미로웠습니다.


예로부터 국수는 몹시 귀해 큰 경조사 즉, 관혼상제 때에만 먹는 음식이었습니다. 매해 돌아오는 생일에는 미역국을 먹고, 국수는 그보다 더 특별한 날에만 누릴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날에 국수를 먹고 장수를 기원하는 문화는 중국 당나라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남송의 학자 주익이 집필한 ‘의각료잡기’에 다르면 당나라 사람들은 생일에 다양한 국수를 먹는데 이를 보고 장수를 소원하는 음식 ‘장수면’이라고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부분 국수의 면발이 길어 장수를 상징한다고 했지만 이것 말고도 다른 역사적 이유가 있습니다. 국수의 면발이 길어진 것은 당나라 무렵으로 실크로드가 번창하면서 서역으로부터 수차를 이용한 제분 기술이 본격적으로 도입됩니다. 밀을 곱게 빻을 수 있게 되면서 반죽을 길게 뽑을 수 있게 됐죠. 평소 거친 잡곡만 먹고 살던 사람들이 고운 밀가루로 만든 국수를 먹으며 ‘좋은 음식을 먹으면 오래 살 수 있겠다’고 믿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국수는 왕실과 귀족들만 먹을 수 있었을 만큼 귀한 음식이었습니다. 서늘한 기후에서만 자라는 탓에 황해도와 평안남도, 경기도 일부 지역에서만 생산됐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에서 주관하는 행사에서 죽은 왕과 부처, 승려에게만 국수를 대접하라는 기록이 남아있기도 합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4년(1422년) 5월 17일(음력)에 따르면 "태상왕의 수륙재에 대언과 속고치 외에는 반상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반상에는 다섯 그릇에 불과할 것이요, 진전과 불전 및 승려 대접 이외에는 만두, 면, 병 등의 사치한 음식은 일체 금단하소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교식 의례인 수륙재에 대한 내용으로, 진전은 세종의 아버지 태종의 제단을 의미합니다. 즉 승하한 태종, 부처, 승려에게만 허락할 만큼 귀했음을 보여줍니다.

신주희 기자.

파묘를 관람하고 국수가 당겨 직접 만들어봤습니다. 멸치육수 대신 간장과 버섯으로만 맛을 낸 사찰식 잔치국수 레시피입니다. 진한 국물 맛을 원하시는 분들은 ‘코인 육수’를 활용하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재료 국간장 1T, 양파 반 개, 표고버섯 2개, 당근 1/5, 애호박 1/5, 소면, 맛소금 1t, 익은 김치 한 줌, 유부 또는 얼린 두부, 참기름

1. 소면을 끓는 물에 5분간 삶는다.

2. 삶은 면을 찬물에 씻어 전분기를 없앤다.

3. 끓는 물 500ml에 채소를 전부 넣고 국간장, 맛소금으로 간을 한다.

4. 소면에 국물을 붓고 참기름, 익은 김치, 얼린 두부를 올려낸다.

신주희 기자.

마트에서 유부가 없어 냉동실에 잠들어 있던 얼린 두부를 넣었습니다. 두부를 얼리면 수분이 빠져나가 구멍이 송송 생기게 되는데요, 식감은 단단한 유부에 가깝습니다.

얼린 두부 단면. 신주희 기자

이 구멍들이 국물을 잔뜩 머금고 있어서 잔치국수와 정말 잘 어울리는 고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잔치국수에 부족한 단백질을 보완해줍니다. 두부를 얼리면 영양소가 응축돼 단백질 함량은 더욱 높아지기 때문에 유부를 넣는 것보다 건강하게 잔치국수를 즐길 수 있습니다.

간단한 요리지만 소면 삶을 때만 주의하면 됩니다. 소면을 삶을 때는 찬물 한 컵을 준비해두는 게 좋습니다. 물이 끓어 넘치려고 하면 재빨리 찬물을 조금씩 부어주기 위함입니다. 김가루가 없어 아쉬웠지만 있는 재료로도 충분히 맛있는 국수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참고 자료〉

음식으로 읽는 한국 생활사(2015, 윤덕노)

우리나라 사찰의 국수 이용 현황에 관한 연구(2017, 동국대 전통사찰음식연구소)

joo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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