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최전선]아기 때 기억은 왜 몽땅 사라질까...뇌를 보는 새로운 시선

이정아 기자 2024. 3. 16.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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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기 기억상실증’대부분의 기억을 떠오르지 못하게 억제해 해마의 기억 능력을 발달시키는 작업
특정 시간·장소와 연관된 기억은 향후에도 떠올릴 수 있어
3살 이전의 기억은 대부분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아기 때 기억을 거의 대부분 잊어버리는 이유는 뇌가 성인의 뇌와는 다르게 기억을 처리하기 때문이며, 뇌 발달에 중요한 과정이라는 연구 결과들이 나오고 있다./픽사베이

아기 때 기억을 거의 대부분 잊어버리는 이유는 뇌가 성인의 뇌와는 다르게 기억을 처리하기 때문이며, 유아기의 기억상실이 뇌 발달에 중요한 과정이라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또 어린 시절의 기억이 뇌 한구석에 보관돼 있다가 특정 상황을 마주할 때 다시 떠오른다는 사실도 새롭게 규명됐다.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는 14일(현지 시각) 유아기 기억상실증에 대한 전 세계의 최신 연구 결과들을 소개했다.

◇ 특정 시간·장소와 연관된 기억은 비교적 오래 기억

생후 18개월 때 처음 놀이동산에 놀러갔던 설레는 기억이나, 2살 때 수두를 앓아 고생한 기억처럼 극한 감정은 단편적 기억으로 떠오른다. 하지만 3살 이전의 기억을 떠올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1930년대 저명한 심리학자이던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이와 관련해 “유아기 때도 기억을 만들지만 뇌가 그 기억을 저장하는 것을 억제해 잊어버린 결과”라고 설명했다. 학계에서는 아기의 뇌가 지속적으로 기억을 저장할 만큼 충분히 성장하지 못했거나 아기의 언어나 감각 인지 능력이 성인보다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최근 수 년 간 각국의 연구자들은 이들 가설의 일부가 맞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3살 이내 어린 아이들도 엄마가 감춘 장난감이 어디 있는지, 식판에 놓인 과자가 무엇인지 충분히 기억할 만큼 뇌가 발달한다. 이것은 인간뿐 아니라 쥐와 개, 고양이 등 다른 포유류들도 마찬가지로 가능하다.

하지만 유아기에 생성된 기억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그리고 과거의 기억과, 그보다 더 오래 전의 기억을 구분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새라 파워(Sarah Power) 독일 막스플랑크인간발달연구소 박사후 연구원은 이와 관련해 18~24개월 영유아 360명을 대상으로 실험을 해봤다.

연구진은 정글이나 사막, 바다처럼 방을 꾸미고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인형을 숨긴 다음 찾게 했다. 파워 연구원은 아이들이 처음에는 인형을 잘 찾았지만 인형을 여기저기 옮기면 점점 기억력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아이들은 기억에 날짜를 기록하는 능력이 발달하지 않아서 첫 번째와 두 번째 기억을 정확히 분간하지 못한다고 분석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각 방의 특징과 장난감을 숨긴 위치의 관련성을 배운 아이는 최장 6개월 간 그 위치를 기억했다는 점이다. 반면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길어야 약 1개월만 기억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유아기 기억은 사진으로 남아 있어서 계속 떠올릴 수 있거나 특정 종류의 기억, 특히 어떤 사건이 일어난 시기나 환경과 관련됐을 때 비교적 오래 남는다고 분석했다. 마치 놀이동산의 회전목마를 보면 인생 처음으로 놀이동산에 갔을 때를 기억하는 일처럼 말이다.

연구진은 이 아이들을 대상으로 향후 6개월간 추가 실험을 통해 유아기 동안 기억 능력이 어떻게 발달하는지 관찰하고 뇌파 검사(EEG)로 뇌 활동을 측정할 계획이다. 파워 연구원은 “추가 연구를 통해 뇌가 향후 다시 떠올릴 수 있는 장기 기억을 어떻게 활성화하는지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잊고 있었던 어릴 적 일도 특정 상황에서 떠오를 수 있어

폴 프랭클랜드(Paul Frankland) 캐나다 식키즈병원 신경과학및정신건강프로그램 선임연구원팀은 유전적으로 조작된 쥐를 이용해, 유아기의 모든 기억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뇌에 저장돼 있지만 단지 잊혀진 것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A. 마스틴/사이언스

오랫동안 기억하지 못한 일이 어떤 상황에서 갑자기 떠오른다는 사실도 최근 연구에서 확인됐다. 노라 뉴콤브(Nora Newcombe) 미국 템플대 심리학과 교수는 “기억은 신경발달의 시간표에 따라 저장된다”며 “사람이 의식적으로 떠올리지는 못해도 아주 어릴 때 기억이 남아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뉴콤브 교수는 생후 2개월 아기와 3~6개월 아기에게 발로 모빌을 차서 흔드는 방법을 가르쳤다. 2개월된 아기들은 이 방법을 불과 며칠 동안만 기억했다. 하지만 3~6개월된 아기들은 잊어버렸다가도 모빌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만 봐도 발로 차는 것을 떠올렸다. 연구진은 발로 차면 모빌이 움직인다는 기억은 남아 있지만 자발적으로는 기억을 떠올리기가 어렵고 특정 상황이 주어졌을 때 자연스레 떠올리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행동은 인간 뿐 아니라 설치류에서도 확인된다. 크리스티나 알베리니(Cristina Alberini) 미국 뉴욕대 신경과학센터 교수는 어린 생쥐들을 흰색 상자에 넣고 어두운 칸에 들어갈 때마다 전기 충격을 가하는 실험을 했다. 생쥐들은 곧바로 위험한 칸에 들어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했지만, 이 기억은 이틀을 가지 못했다. 몇 주 뒤 연구진은 다 자란 쥐들에게 다시 흰색 상자를 보여주고 어두운 칸이 보일 때마다 전기 충격을 줬다. 생쥐들을 상자에 넣자 쥐들은 다시 기억을 되살리고 어두운 칸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 연구 결과는 2016년 9월 국제학술지 ‘네이처 뉴로사이언스’에 실렸다.

이 연구들을 토대로 전문가들은 유아기의 모든 기억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뇌에 저장돼 있지만 단지 잊혀진 것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폴 프랭클랜드(Paul Frankland) 캐나다 식키즈병원 신경과학및정신건강프로그램 선임연구원팀은 유전자를 조작한 쥐를 이용해 같은 방식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이 쥐는 기억을 담당하는 뇌 영역인 해마의 신경세포에서 빛에 민감한 단백질이 만들어지도록 유전자를 조작했다. 이 쥐가 흰 상자에서 어두운 칸으로 들어가 전기충격을 받자 해마에서 새로운 신경세포(엔그램)가 연결됐다. 연구진은 그로부터 한 달 뒤 쥐가 기억을 잊어버렸을 때 쥐의 뇌에 빛을 쪼였다. 그러자 쥐는 상자 안에 들어가지 않고 전기충격을 기억하며 긴장했다.

파워 연구원은 상자 속 미로를 빠져나가도록 훈련받은 쥐가 지속적인 엔그램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지난해 11월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 소개했다. 연구진은 현재 어린이도 쥐와 비슷한 패턴으로 엔그램을 생성하며 기억을 저장하는지 뇌전도(EEG)를 활용해 알아보고 있다.

◇ ‘유아기 기억상실증’ 해마 발달에 여유 주는 작업

어릴 때의 기억은 대부분 사라지지만 무의식에 남아 있다. 사진으로 여러 번 보았거나, 특정 시간이나 장소와 연관돼 있으면 성인이 된 후에도 기억이 떠오를 수 있다./픽사베이

하지만 아직까지 유아기 때 형성된 기억이 왜 대부분 사라지는지 명확한 답을 얻지는 못했다. 트레이시 리긴스(Tracy Riggins) 미국 메릴랜드대 심리학과 교수는 “뇌가 아주 오래 전 기억을 억제해서 해마가 발달할 여유를 주는 것”이라고 추정했다. 뇌가 효율적으로 발달하려면 지금 당장 중요하지 않은 정보는 굳이 떠오르지 않도록 뇌가 깊은 곳에 보관한다는 뜻이다.

플라비오 도나토(Flavio Donato) 스위스 바젤대 신경회로및인지기능발달연구실 교수는 “아기의 뇌를 단지 성인 뇌의 작은 버전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다른 규칙으로 작동하는 별도의 뇌로 봐야 한다”며 “유아기 기억상실증에 대한 연구가 발전하면 인간의 기억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사실을 밝혀낼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참고 자료

Science(2024), DOI: 10.1126/science.z4qq4r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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