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쪽짜리 『우스운 사람…』, 전쟁같은 세상 연민의 힘을 깨운다

2024. 3. 16.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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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문학으로 본 21세기
프란시스코 데 고야(Francisco de Goya)가 전쟁의 참상을 그린 ‘1808년 5월 3일’(1814년 그림). [사진 지식을만드는지식]
“올해는 대부분 학생이 사망하여 수업 기간이 공식적으로 종료되었습니다(This year’s class period has officially ended due to the deaths of most of the students).” 지난해 10월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상대로 대규모 침공을 감행했을 당시 가자 교육부가 낸 성명서다. 이보다 명징하게 전쟁의 참상을 알려주는 문구가 또 있을까.

“모든 사람의 마음속엔 짐승이 감춰져 있다. 분노의 짐승, 고문 받는 사람의 비명을 듣고자 하는 짐승, 마구 날뛰는 무법의 짐승이 마음속에 숨어있다(『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에서)”의 도스토옙스키의 말처럼, “괴물과 싸우는 자는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괴물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니체 『선악을 넘어서』 중에서)”라는 니체의 말처럼 인간의 심연 속에는 시기, 질투, 증오, 분노가 가득한 야수가 살고 있다. 인류의 역사가 곧 전쟁의 역사인 것을 보면 말이다.

아무것도 못 느끼는 ‘텅 빈 인간’ 탄생

우크라이나의 12세 소녀 예바 스칼레츠카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기록한 『당신은 전쟁을 몰라요』.
지금 이 순간에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하마스·이스라엘 전쟁 등으로 무고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 우리는 단지 ‘운이 좋아서’ 전쟁을 모를 뿐이다. 우크라이나 제2의 도시 하르키우에서 할머니와 함께 오순도순 살아가던 12세 예바 스칼레츠카도 그랬다. 2022년 2월 24일 새벽 5시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 역시 우리처럼 운 좋은 소녀였다. 하지만 예고 없이 들이 닥친 불행은 그녀와 이웃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전쟁의 공포로 몸과 마음이 마비될 때마다 그녀는 일기를 썼고, 인간의 존엄이 파괴되는 비극의 현장은 그렇게 12세 소녀의 시선으로 기록되어 『당신은 전쟁을 몰라요』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나왔다. 제2의 안네 프랑크이자 21세기 버전 『안네의 일기』라 할 수 있다.

언제나 그렇듯 전쟁의 가장 큰 희생자는 어린이, 여성, 노약자 등 무고한 시민이다. 별 탈 없이 농사짓고 출근하던 한 집안의 가장이 하루아침에 전쟁터로 끌려가고, 폐허가 된 도시 곳곳에는 부모를 잃고도 울음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아이들로 넘쳐난다.

정의로운 전쟁은 없다. 전쟁은 지나친 이성이 낳은 광기, 어설픈 계몽주의가 불러온 야만의 발현일 뿐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 것을 개의치 않는 인간의 이기심과 오만함이 불러온 참극일 뿐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속에서도 이성적이고 똑똑한 사람, 흔히 말하는 ‘먹물’은 모두 오만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오만한 인물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타인의 무시와 비웃음이다. 이들이 손가락질과 비웃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자의식에 상처가 나기 때문이다. 극도의 오만함은 사람을 무감각의 세계로 이끈다. 무감각은 타인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무신경하게 만든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아무렇지 않게 인간성을 말살한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텅 빈 인간’의 탄생이다.

『우스운 사람의 꿈』의 주인공도 그랬다. 『우스운 사람의 꿈』은 원서로 23페이지 정도의 짧은 분량이지만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죄와 벌』 『백치』 『악령』을 출간한 후 마지막 대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집필하기 전 발표한 단편으로, 시대와 역사를 반영하는 동시에 시공을 초월하는 철학과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모든 것이 죽어 있는 세계에서 이 작품은 시작한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고, 아무것도 그의 주의를 끌지 못하고,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다. 화자는 모든 것이 죽어 있는 이 세계를 스스로 떠나려 한다. 자살로 생을 마감하려 하는 것이다.

우스운 사람의 꿈’을 쓸 무렵의 도스토옙스키(1876).
11월 3일, ‘정말 최악으로 음산하고 컴컴한 밤’이었다. ‘차갑고 음산한 비’ ‘인간에 대한 분명한 적의를 품은 무시무시한 비’가 쏟아 붓던 날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던 중 우연히 밤하늘에서 반점처럼 빛나는 작은 별 하나를 발견한 화자는 이를 일종의 계시로 받아들인다. 그날 밤 반드시 결심을 실행에 옮기겠다고 다짐한다.

그런데 갑자기 추위에 떠는 작은 여자아이 하나가 나타나 죽어 가는 엄마를 도와 달라고 매달린다. 하지만 이제 곧 세상을 떠날 결심을 한 화자다. 그 무엇과도 연관되어서는 안 된다. 화자는 소녀를 매몰차게 외면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소녀에 대한 연민 때문에 차마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다.

내가 만약 오늘 밤 자신을 끝장내기로 결심했다면, 다른 어느 때보다 지금이야말로 더욱더 세상의 모든 일이 나에게는 이러나저러나 마찬가지여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그래서 화가 났다. 어째서 이러나저러나 마찬가지라고 느끼지 않고, 어린 소녀에게 연민을 느낀단 말인가? 나는 그 아이가 너무 불쌍했다. 정말이지 이런 상황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또 견딜 수 없을 만큼 그 아이가 딱했던 것이 기억에 생생하다.

‘우스운 사람의 꿈’이 실린 『작가의 일기』 1877년 속표지. [사진 지식을만드는지식]
죽어 있던 화자의 심장에 동정과 연민이 생겨난 것이다. 동정, 연민을 뜻하는 러시아어 ‘소스트라다니에(сострадание)’는 고통 받는다는 동사 ‘스트라다티(страдать)’에 ‘함께’를 의미하는 접두어 ‘소(с=со)’가 붙어 만들어진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함께 고통 받는다’라는 의미다. 도스토옙스키는 가장 완벽하게 창조해낸 아름다운 인물 『백치』의 미시킨의 입을 통해 ‘연민은 전 인류의 가장 중요한, 아니 유일한 존재 법칙’이라고 말한다. 이 ‘유일한 존재의 법칙’이 화자의 심장을 부활하게 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알 리 없는 화자는 그저 소녀에 대한 연민으로 괴로워하다 안락의자에서 깜빡 잠이 들고 만다.

꿈속에서 미지의 존재에게 이끌려 지구와 똑같은 쌍둥이별에 도착한 화자. 그곳은 에덴동산과 같은 낙원으로 그곳의 사람들은 아담과 이브처럼 ‘죄’를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사악한 페테르부르크의 주민’이었던 화자가 이 낙원을 타락시키고 오염시킨다. 에덴동산과 같았던 낙원은 어느새 화자가 진저리를 치며 떠나려했던 지구별과 같은 사악한 사람들로 가득 차 버렸다.

타락한 사람들은 빠르게 분열하기 시작한다. 약자들은 자신들보다 더 약한 자들을 압박할 때 강자들의 도움을 얻기 위해 강자들에게 기꺼이 복종한다. 내 것이니 네 것이니 싸우더니 곧 연맹을 만들고 자신들만의 깃발을 높이 세운다. 이윽고 ‘정의’를 고안해 낸 그들은 이를 보존하기 위해 완벽한 문서로 된 법전을 작성한다. 법을 보장하기 위해 단두대도 세운다.

연민 뜻하는 러시아어 ‘함께 고통받다’

이 세계를 이끄는 ‘총명한 사람들’은 전쟁을 통해 자신들의 승리에 걸림돌이 되는 ‘총명하지 못한 사람들’을 박멸하기 위해 애를 쓴다. 이런 모습을 고통스럽게 지켜보던 주인공은 괴로움에 몸부림치다가 잠에서 깨어난다.

순간 화자는 ‘알을 깨고 나온다’.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39)”는 진리가 곧 타락한 지구를 구원할 해답임을 깨달은 것이다.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사람들만 있다면 ‘지구도 한 시간 내에 유토피아’가 될 수 있으리라. 화자는 이 단순하지만 놀라운 진리를 설파하는 전도사를 자처하지만, 타락한 지구인에게는 그 진리가 너무나도 우스꽝스럽다. 내 이웃은 완벽한 타인이자 경쟁자일 뿐인 지구인의 시선에는 화자가 그저 ‘우스운 사람’ ‘미친 사람’으로 보일 뿐이다.

오만함으로 똘똘 뭉친 야수가 나타나면 반대급부에는 언제나 연민의 힘으로 똘똘 뭉친 ‘우스운 사람들’이 생겨난다. 이 양떼는 야수 같은 강한 이빨, 날카로운 발톱이 없지만 김수영 시인의 표현처럼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그들은 비바람에 눕고 울지만 끝내 일어나며 끝내 웃을 것이다. ‘한 생명을 구한 자는 세계를 구한 것’이라던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대사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또 다른 안네와 예바라는 이름의 ‘한 우주’를 구하기 위해 최전방으로 뛰어들고 있는 우스운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올해는 ‘종전에 따라 ○월 ○일, 공식적으로 학교 수업을 시작합니다’라는 기적의 메시지가 울려 퍼지기를 기도하며.

김정아 번역작가·CEO. 노문학 박사. 낮에는 패션회사 스페이스 눌의 대표로, 새벽에는 도스토옙스키 번역가로 일한다.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 단일 번역가 번역이라는 세계 최초의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죄와 벌』 『백치』 『악령』 완역본이 출간됐고, 현재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번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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