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책… 입는 책… 혈액·인피로 만든 책… 별의 별 책들의 이야기

송은아 2024. 3. 15.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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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작가겸 희귀서적상의 아들
현존하는 서적 1억2986만권 중
괴짜 책들로 채운 도서관 만들어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질 것들
풍부한 사진자료 첨부해 책으로

이상한 책들의 도서관/에드워드 브룩 히칭/최세희 옮김/갈라파고스/3만3000원

1925년 미국에서 나온 책 ‘남부 이야기’는 페이지를 넘기려면 모터가 필요했다. 높이 2.08m, 펼쳤을 때 폭이 2.79m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크기 때문이다.

미국 뉴욕 그랜드 센트럴 팰리스에서 열린 박람회에서 소개된 이 책은 거대한 기계식 이젤 위에 올리면 전체 높이가 3.7m에 달했다. 아프리카 어른 코끼리에 맞먹는 높이였다. 무게는 0.5t 이상이었다. 당시 12마력 엔진 두 대를 동원해 침대 시트 크기의 페이지를 19장 정도 넘길 수 있었다고 한다. 본문에는 미 남부의 여러 주가 힘을 모아 공화국 건설에 이바지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가장 애먹은 작업은 제본이었다. 표지를 감쌀 만큼 몸집이 큰 동물을 구하기 어려워 수소문 끝에 텍사스에서 3.66m 길이의 소가죽을 구했다.
인류가 기록을 시작하면서 책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규격을 벗어난 ‘별종’ 책들이 꾸준히 발간됐다. 갈라파고스 제공
그런가 하면 손바닥보다 작은 초소형 책도 있다. 초소형 책은 시대나 문화권을 타지 않고 꾸준히 인기였다.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750권이 넘는 초소형 책을 보유했었다. 이 분야에 특화된 세계 최대 박물관은 아제르바이잔의 바쿠 초소형 책 박물관으로, 세계 64개국에서 온 6500점을 보관 중이다.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작은 책은 2002년 나온 ‘세계에서 가장 작은 책’이다. 가로 2.4㎜, 세로 2.9㎜ 크기로 100파운드 가격에 300부가 팔렸다. 한 독일인 서적상은 이 책을 보다가 실수로 숨을 내쉬는 바람에 오후 내내 돋보기를 들고 바닥을 기어다니며 책을 찾았다.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이후에도 결정성 실리콘으로 만든 가로 0.07㎜, 세로 0.1㎜의 ‘나노 북’이 나오기도 했다. 이 책을 읽으려면 주사 전자 현미경이 있어야 한다.

신간 ‘이상한 책들의 도서관’은 이처럼 기상천외한 책의 역사를 다룬다. 저자는 영국의 작가 겸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자로, 희귀 서적상의 아들이다. 조상은 서지학 책을 쓴 인쇄업자다. 자연히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 손을 잡고 경매장을 돌아다니며 ‘책의 늪’에 빠져 살았다.

저자가 관심을 가진 책은 현존하는 1억2986만4880권(2010년 구글 계산) 중에서도 ‘별종’들이다. 투명한 책, 살상을 저지르는 책, 너무 길어서 우주를 파괴하고도 남을 책, 먹을 수 있는 책, 입을 수 있는 책, 깃털과 머리털로 만든 책, 천사와 소통하는 법을 알려주는 책, 악마가 제기한 소송 기록과 악마의 친필 서명이 담긴 계약서, 쥐 수학책 등등.
에드워드 브룩 히칭/최세희 옮김/갈라파고스/3만3000원
저자는 이 같은 “괴짜들, 기인들, 오래전에 자취를 감춘 사회 부적응자들, 다시 말해 잊힌 자들을 불러모아” 말 그대로 이상한 책들의 도서관을 만들었다. 이를 종류별로 분류해 오랜 역사를 짚고 풍부한 사진 자료를 넣었다. 저자에 따르면 이런 책들은 “그렇지 않았다면 사라져 버렸을 사유와 지식, 유머를 품고” 있다.

세상에는 ‘책 아닌 책’이 있다. 인쇄술과 종이가 보편화되기 전에 기록수단으로 쓰인 뼈, 점토판, 도자기, 매듭 등이 대표적이다. 극한 환경에서 주변 사물을 기록수단으로 활용한 경우도 이에 해당한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남부 연합군 병사 솔로몬 콘은 자신의 바이올린에 전투 일지를 새겼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노르웨이 저항군인 페테르 모엔은 교도소 독방에 수감되자 휴지조각에 단어 모양대로 구멍을 뚫어 일기를 썼다.

2012년 랜드 로버는 두바이 고객을 대상으로 사막에서 기계가 고장 날 경우 생존을 도와줄 지침서를 발간했다. 먹을 수 있는 종이와 잉크로 만들어졌는데, 영양가가 치즈버거에 버금간다고 한다. 제본의 금속 철을 빼서 요리용 꼬치로 사용할 수 있고, 반짝이는 포장지는 구조 요청에 쓸모 있게 제작됐다. 2018년 미 미시간대학교가 10부만 구매한 ‘미국 치즈 20장’은 헝겊 표지에 슬라이스 치즈 20장을 엮었다.

동식물이 아닌 인간의 살과 피로 만든 책도 있다. 인피 제본의 역사는 적어도 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확인된 인피 제본서는 대부분 1600년대 후반부터 1800년대 후반 사이 제작됐다. 18∼19세기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인피제본술은 살인 범죄, 의학 연구 문헌을 출판할 때 용인되는 장식이었다.

‘혈서’는 좀 더 보편적이다. 최근의 사례로 이라크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 있다. 그는 1997년 60세 생일에 자신의 피로 코란을 몽땅 필사할 것을 명했다. 2년간 후세인의 피 약 27ℓ와 화학물질을 혼합한 잉크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책은 이렇게 ‘이상한 책’을 10개 분야로 나눠 자세히 소개한다. 소개되는 책들의 방대함과 다양한 사진 자료 자체로 ‘희귀본 도서관’이라고 할 만하다. 저자는 이 책들의 의의에 대해 “저마다 고유한 방식으로 책이 구현할 수 있는 세계를 다시 정의한다”며 “우리가 책을 사랑하는 방식을 고유한 언어로 다시 쓰면서 감각을 확장한다”고 강조한다.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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