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늦기 전에 공부의 한(恨) 풀고파”...60대 부부·자매가 손 맞잡고 나누는 새학기 소감

김보경 기자 2024. 3. 15.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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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영등포구청 별관 지하에서 작지만 특별한 개학식이 열렸다. 바로 일반적으로 학교에 다닐 나이인 청소년이 아닌 만학도들의 개학식이 열린 것이다. 초등반, 중등반에 진급한 ‘어르신 학생’들은 새 교과서를 나눠 받고, 출석 부르는 선생님 목소리에 맞춰 손을 들고, 공지사항을 전달받았다. 새내기들은 선배들 교실에 찾아가 “잘 부탁합니다!” 인사하기도 했고, 이미 서로가 낯익은 중3 교실에는 “방가방가”, “롱타임노씨!” 등을 외치며 들어오는 학생들도 있었다.

늘푸름학교는 영등포구가 운영하는 성인문해교육 기관으로 2013년 문을 연 ‘은빛생각교실’의 후신이다. 2016년 ‘늘푸름학교’로 이름을 바꾼 뒤 쭉 이 이름으로 운영 중이다. 정식 교육 과정과 달리 늘푸름학교에서는 초등학교 3년·중학교 3년 수업을 마치면 기초학력을 인정받을 수 있다. 이번 3월 늘푸름학교에서 새학기를 시작한 학생은 총 154명으로 초등학생은 69명, 중학생은 85명이다.

늘푸름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나이는 많지만 포부도 남다르다. 지난해 기준 이 학교에 다니는 초등학생 평균 나이는 72세, 중학생 평균 나이는 69세로 은퇴 연령을 한참 넘긴 만학도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 생계를 위해 일손을 돕다 공부 시기를 놓쳐 기초 학력을 취득하지 못했고, 공부에 대한 열망을 간직만 하다가 “더 늦기 전에 ‘한(恨)’을 풀겠다”는 다짐으로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지난 4일 찾은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구청 별관에 있는 성인문해학교 '늘푸름학교'.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한 신입생들이 개학식을 하러 교실에 모여, 선생님이 출석을 부르면 손을 들고 있다. / 김보경 기자

늘푸름학교에는 비슷한 삶의 굴곡을 거쳐오다 만난 형제나 부부가 손 맞잡고 찾아오기도 한다. 김풍임(62)·정우창(64) 부부는 올해 함께 중학교에 진학했다. 초등학교 졸업장이 필요한 남편 정씨가 초등 3학년 수업을 마칠 때까지 부인인 김씨가 1년을 기다렸고 이달부로 함께 중학생이 됐다고 한다.

이들을 늘푸름학교로 이끈 것은 김씨의 남다른 공부 열의였다. 김씨는 8남매 중 장녀로 크면서 초등학교는 간신히 졸업했으나 이후에는 집안일을 돕느라 바빠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고 한다. 10대 후반부터 공단에서 일을 시작하면서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은 떨쳐낼 수 없었다. 틈틈이 노트에 영어 필기체와 한자를 베껴 쓰며 공부에 대한 열의를 이어갔지만, 생계를 우선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공부에 집중할 순 없었다. 김씨는 “중학교를 못 나온 한을 풀고 싶었다”며 “이제는 하루라도 미루면 안 될 것 같아 공부할 수 있는 곳을 찾아보다가 늘푸름학교로 오게 됐다”고 했다.

입학을 다짐한 김씨는 남편 정씨에게 함께 공부하지 않겠냐고 조심스레 제안했다. 부인이 못다 이룬 공부의 꿈을 품고 있던 것을 알고 있던 정씨는 “이왕 하는 것 끝까지 같이 가보자”며 흔쾌히 제안 받아들였다고 한다. 끊임없이 “안사람 덕분에 따라왔다”고 말하지만, 정씨가 학교와 공부에 가진 애정도 대단하다고 한다. 지난해에는 초등반을 개근으로 졸업하기도 했다. 정씨는 “얼마 전에 해외여행 가자는 아내의 제안을 단박에 거절했다”며 “중학교도 개근을 해야 하기에 당분간 긴 여행은 갈 수 없다”고 전했다.

이번 학기 늘푸름학교에서 처음으로 수업을 듣기 시작하는 김씨는 얼른 중학교 3학년이 되어 영어 회화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교과서를 미리 받아 읽어봤다는 김씨는 “국어가 너무 어렵더라”며 “시를 읽고 떠오르는 느낌을 말로 간추리는 게 특히 어려운 것 같다”고 했다. 정씨는 “젊어서 일할 적에 일본어로 된 업계 은어를 자주 사용했다보니 정작 한글을 잘 몰랐더라”며 “중학반에서는 한글 맞춤법 공부에 더 공들일 예정”이라고 했다. 이어 “부족한 것을 채우면 더 이상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마음으로 공부하고 싶다”면서도 “모두 다 안사람 덕분”이라며 웃기도 했다. 정씨는 “앞으로도 아내가 그만하자고 할 때까지 같이 공부하면서 보내고 싶다”고 각오를 다졌다.

6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에 위치한 성인문해학교 늘푸름학교에서 학력인정수업을 듣고있는 최남순·최금순 자매와 정우창·김풍임 부부가 활짝웃으며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이태경 기자

자매인 최남순(67)·최금순(65)씨는 어린 시절 “동생 돌봐야지”, “여자니까 학교 갈 필요 없다”는 아버지 말에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했다고 한다. 8남매 장녀인 최남순씨는 동생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돕느라 초등학교에 입학조차 하지 못했다. 동생 최금순씨는 그나마 초등학교 입학은 했지만, 15리(약 6km) 정도 되는 거리를 걸어 다니기 힘들어 4개월 정도 다니다가 통학을 포기하면서 공부와 멀어졌다고 한다.

그 이후로는 일하느라 바빠 글을 배울 기회도 크게 없었다. 최남순씨는 “학교 다니는 또래 친구들을 보며 따라가고 싶어 발을 동동 굴렀다”면서 “혼자라도 공부하고 싶었지만, 시작할 방법을 몰라 답답한 마음만 안고 있었고 그 마음이 깊은 한이 됐다”고 했다. 두 사람은 언니 최남순씨가 동생 최금순씨에게 함께 학교에 다니자고 권유한 것을 계기로 지난해 함께 늘푸름학교에 입학했다고 한다. 최남순씨는 “병원에 가든, 동사무소에 가든 서류에 글씨를 써야 하는데 제대로 쓰지를 못하니, 그런 상황이 가장 답답하고 힘들었다”며 “동생도 같은 문제로 답답해하는 것을 아니까 같이 다니자고 했다”고 한다.

자매는 공부해보니 “자신감이 생겨 기분이 좋다”고 했다. 최남순씨는 “길 다니면서 눈에 들어오는 글자들이 저절로 읽히기 시작해서, 그냥 길 지나다닐 때도 재밌다”고 말하며 활짝 웃었다. 최금순씨는 얼마 전에는 각각 초등학교·중학교 입학한 두 손녀딸에게 “우리 손녀들 입학 축하해요”라고 쓴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최금순씨는 “이전에는 자식들에게 생일 축하한다고 한 마디 보내고 싶어도 굳이 전화를 해야 했는데, 이제는 편하게 문자를 보낼 수 있게 됐다”고 말하면서 손녀딸에게 보낸 메시지를 자랑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최금순씨는 “이전에는 (글을 몰라) 사람들 앞에서 자꾸만 작아지고, 뒤로 숨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며 “모르는 게 좀 있더라도 더 배워서 얼른 쓰고 읽어내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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