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돈선의 예술인 탐방지도 -비밀의 방] 71. 여묵락진의 즐거움 - 서예가 여현 황선희

김진형 2024. 3. 15.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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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바탕 검정 채우는 글놀이, 필묵에 빠지다
전시회 붓글씨 관람 ‘붓과 먹’ 관심
구당 선생 스승 모셔 글씨·학문 매진
중어중문학 전공·춘교대 교육학 석사
서예대전 우수상·춘천서 첫 개인전
글씨방 ‘석우 심경재’ 춘교대 내 마련
서예 전시·문화탐방·입춘첩 쓰기 봉사
2019년 원문 붓글씨·번역 ‘노자’ 출판
내달 26일 율곡관풍 개인전 300점 전시
▲ 여현 황선희 서예가가 춘천교육대학교 학생지원센터 서예실에서 글을 선보이고 있다. 유희태

문득
우리는 스티브 잡스를 기억한다. 지금도 세계 사람들은 스티브 잡스의 핸드폰을 손에 들고 다닌다. 스티브 잡스는 죽은 사람이 아니다. 그는 우리의 손아귀에, 우리의 눈과 귀에 있다. 심지어 잠잘 때 꿈속에서도, 먼 길을 떠날 때도 그는 우리와 동행한다. 그에 의해 우리는 서로 소통하고, 그에 의해 우리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곤 한다.

스티브 잡스가 매킨토시를 디자인하던 중 문득! 대학 때 청강했던 캘리그래피를 떠올렸다고 한다. 활자 폰트들이 그에게 선명하게 다가왔다. 당시 그는 인쇄업체에서 쓰는 폰트들을 모두 수집했다. 그는 그 글자들을 새롭게 디지털화하여 매킨토시에 탑재했다. 매킨토시는 다양한 서체가 담긴 최초의 컴퓨터였다. 그 후 그는 문자 디자인에 천착했다. 손으로 쓴 서체 디자인은 감성이 배어 있는 예술이라 했다. 아름다운 디자인 하나로도 그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다고 했다. 그랬다. 그 새로운 발견과 발상은 인류 문화의 혁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때가 1980년대였다.

1984년 여현 황선희는 스물다섯의 나이가 되었다. 황선희는 소녀 적부터 책을 좋아했다. 다양한 책을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다. 하지만 어딘가 한구석이 빈 느낌이 들었고, 갈증이 앙금처럼 남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니는 전시회의 붓글씨를 보게 되었다. 문득! 황선희의 하얀 뇌리에 먹물을 듬뿍 먹은 붓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날로 황선희는 즉시 시백 안종중의 서실을 찾아갔다. 그렇게 10년 동안 그니는 필묵에 젖어 살았다. 시백 선생에게 기초를 다진 황선희는 구당 여원구 선생을 스승으로 삼아 18년 동안 글씨와 학문에 매진했다. 그간 황선희는 한국방송통신대학 중어중문학과를 수학한 다음, 춘천교육대학 교육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2009년 대한민국 서예대전에 우수상을 차지하기까지 그니는 자신에게 늘 엄격했고, 몸가짐을 스스로 낮추었다.

▲ 황선희 서예가의 작업실 ‘석우 심경재’ 현판

여묵락진

마침내 2010년 춘천문화예술회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본격적으로 글씨를 시작한 지 어언 2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힘든 세월이었다. 서예강사 생활을 하며 생계를 꾸려 나갔다. 아이들은 어느덧 성장하여 청년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여묵락진’ 도록에 이렇게 글을 썼다.

“서예가인 우리 어머니는 분명 개인전이 끝난 후 후회하실 것이다. 더 잘 녹일 수 있었는데 하고. (하지만 어머니는) 더욱 그 놀이에 빠지실 것이다.”

조민환 교수에게 노자 2강을 들을 때, 황선희는 ‘여묵락진(與墨樂進)’이란 말을 떠올렸다. 묵과 더불어 즐거워하면서 인생을 살아간다는.

노자 2장엔 “아름다움이란 사람의 마음이 즐거워하면서 나아감이다”라는 글귀가 나온다. 그중에 황선희의 마음을 환하게 한 글자가 눈에 띄었다. 樂이었다. 즐겁게! 즐겁게!

노자와 노닐다
여현의 노자 탐구가 시작되었다. 한 자 한 자 글자를 음미하며 새로운 깨달음에 여현은 순간순간 놀라워했다. 그저 무아였고, 그저 즐거웠고, 그저 스스로가 무심히 녹아 있었다. 무위의 자연이 새로운 모습으로 여현의 내면에 깃들었다.

▲ 소소서우회 휘호집 ‘노자-도덕경’

2019년 드디어 춘천문화예술회관에서 ‘노자’ 출판기념전이 열렸다. 원문을 붓으로 쓰고 여현 자신의 번역문을 수록했다. 게다가 영어 번역문도 첨가했다. 여현의 ‘한 줄로 읽는 노자’는 사람들의 관심을 크게 끌었다. 장마다 핵심어를 크게 쓰고, 한자 원문에 한글과 영어번역을 알기 쉽게 달았다. 그것은 읽는 이를 아주 편하게 해주었다. 가르침과 배움의 길을 터득한 저자의 배려심이 정성스레 배어 있었다.

소소서우회는 아름다워
2008년 발족한 소소서우회는 춘천 서단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불모의 서단에서 소소서우회는 즐겁게 쓰고 공부하는 터를 마련했다.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21명으로 시작한 소소서우회 회원이 어느덧 60여 명으로 늘었다. 사실 이 소소서우회가 이루어지게 된 건 춘천교육대학교 김선배 전 총장의 도움이 매우 컸다.

당시 김총장은 여현에게 글씨를 배우고 있었다. 김총장은 여현을 초빙해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서예공부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냈다. 마침내 여현 선생의 글씨방 ‘석우 심경재’가 교대 내에 차려졌다.

심경재는 학생들의 글씨방이 되었고, 교직원과 교수들도 심경재에서 글씨를 배웠다. 여현은 지도강사가 되어 성심껏 같이 공부했다. 더불어 심경재는 소소서우회의 마음밭이 되어 더욱 활발히 활동하기 시작했다. 서예 전시, 문화탐방, 입춘첩·가훈 쓰기 등의 봉사활동을 지속적으로 해나갔다. 격년으로 주제를 정하여 공부한 다음, 전시회를 열고 그 결과물을 책으로 펴냈다. 노자, 명심보감, 논어선, 채근담, 명심보감, 고문진보 등 12권의 책을 묶었다.

▲ 황선희 서예가가 지난 6일 춘천교육대학교 학생지원센터 서예실에서 최돈선 시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유희태

모두 다 즐거웠다. 쓰기와 공부하는 과정이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작품엔 자기반성과 채찍질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스승의 엄격한 지도, 그리고 동료들의 아낌없는 충고도 귀담아들었다. 어떤 무엇이 되기 위해선 성장통을 반드시 겪어야 했다.

서예는 쓰는 이의 인품이다
서예엔 천재란 말을 쓰지 않는다. 서예는 퍼뜩 떠오른 영감 하나로 다 이루어지는 예술이 아니다. 그래서 중국에선 서법이라 했고, 일본에선 서도라고 했다. 그것을 예술로 승화한 것이 우리의 서예다. 예술의 경지까지 도달하기 위해선 오랜 세월 절차탁마의 수련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인품이 글씨에 스며들어 향을 더하는 것이다. 여현 선생은 지금까지 자신이 어디까지 왔는지를 알기에 글마중이란 글을 썼다. 여기 일부를 옮긴다.

흰 종이 먹물을 담아 글놀이하고
빚어낸 감동에 푹 빠졌다 나와서는
어느새 붓 잡고서 글마중을 떠납니다

김선배 총장은 이렇게 여현 선생을 이야기한다. “여현 선생께선 인품이 아름다운 분이다. 그걸 우린 느낀다. 글씨의 모든 서체를 두루 섭렵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시를 창작하고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단 하루도 붓을 놓은 적이 없는 분이다. 그의 서체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아름다움이요 인품이다”라고 칭송하기를 아끼지 않았다.

율곡관풍
올봄, 4월 26일 춘천미술관에서 여현 선생의 개인전이 열린다. 율곡관풍이란 제호로 엽서 한 장 크기의 작품 300여 점이 선을 보인다. 율곡 선생에게 보내는 엽서를 우린 그곳에서 볼 수 있다. 400여 년 전의 율곡 선생에게 여현 선생은 무슨 글씨와 글을 써 보낸 것일까. 나는 그것이 몹시 궁금하다. 시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황선희 #최돈선 #탐방지 #즐거움 #스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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