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 동료들의 "살려주세요" 외침에 차 돌렸던 기사, 선처 탄원이 쏟아진 이유는

정반석 기자 2024. 3. 14.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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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스피커] 민간단체가 외국인 불심검문 후 체포까지 하는 2024년 대한민국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아침 통근 버스를 몰고 도로를 달리던 기사 K 씨에게 들려온 외침이다. 출입국사무소 직원들이 차량으로 버스 앞을 가로막은 뒤 올라타자, 버스에 탄 36명의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공포에 질려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당황한 K 씨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K 씨에게 그들은 친구 같고, 또 동생 같은 동료들이다. 어릴 때부터 집을 나와 생활했기에, 만리타국에서 일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 것인지 잘 알았다. 어떻게 해서라도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K 씨는 급히 2m 후진했고, 버스 좌측을 가로막은 승용차 범퍼와 충돌한 뒤 내달렸다. 150m 남짓 달린 뒤 출입국사무소 차량들이 다시 가로막았다. 앞뒤 차량을 들이받았고, 버스 문을 열어 외국인 한 명을 보내줬다. K 씨는 현장에서 체포됐고, 나머지 이주노동자 대부분은 본국으로 추방됐다. 이 과정에서 이주여성 1명은 쇄골뼈에 금이 가 병원으로 후송됐다. 지난해 8월 대구에서 벌어진 일이다.

K 씨가 품은 측은지심의 대가는 징역 3년, 실형 선고였다. 공무집행을 거부하는 과정에서 단속 공무원 11명에게 전치 2~3주의 부상을 입히고, 출입국사무소 차량 3대를 파손시킨 혐의가 적용됐다. 단속에 놀라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점, 단속 공무원들의 부상이 중하지 않은 점, 피해 회복을 위해 노력한 점이 유리한 정상으로 참작됐다. 반면, 과격한 범행으로 불법체류 단속 업무에 장애가 발생한 점, 단속 공무원 11명이 다치고 단속 차량들의 파손이 상당한 점은 불리한 정상이었다.
 

"절망에 빠진 이를 도운 사마리아인"…7천 명 넘게 선처 탄원

강단에 선 고명숙 이주와가치 대표

K 씨를 접견한 뒤 발벗고 나선 고명숙 이주와가치 대표는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면서도 "무차별적인 강제 단속이 이뤄지면서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불안에 떠는 상황을 고려해 달라"고 2심을 맡은 대구고등법원에 탄원했다. 고 대표는 K 씨가 20년 동안 공장일을 하면서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당황한 데다, 평소 친숙한 동료들이 울부짖으며 도와달라고 하니 머릿속이 하얗게 되며 일단 후진한 것이라고 했다. 단속 차량들이 뒤따라온 것을 미처 알지 못했던 상황에서 차량을 박게 되니 그 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는 것이다. 어떠한 이득도 취한 것 없이, 그저 절망에 빠진 이들을 도우려 한 마음을 헤아려 달라고 했다.
전국의 이주단체들도 힘을 보탰다. 제출된 탄원서에는 7,400명 넘는 이들이 이름을 올렸다. 친한 동료의 울부짖음에 이성적 판단이 힘들었을 것이라며 선처를 호소하는 글이 많았다. 탄원서 중에 인상적인 구절은 다음과 같다.
 
경북북부이주노동자센터
"사마리아인이 가던 길을 멈추고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본 가장 큰 이유는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입니다. 일하는 노동력이 아닌 '사람'을 만났던 K 씨는 그동안 실정법에 의한 처벌을 충분히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차를 후진한 것은 아닙니다. 이주노동자에게 동료애를 갖고 있는 노동자로서 인권침해적 단속 때문에 두려워 울부짖는 동료를 외면할 수 없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런 행동을 한 것입니다."
 
경주이주노동자센터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은 창살 없는 감옥과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특히, 경주, 대구 지역은 출입국사무소의 집중적인 단속이 이루어지는 지역이었습니다. 출근해서 일하고 일을 마치면 숙소에 들어와 집 밖에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모든 생활을 해결하면서 지냈습니다. 어떤 민간인이 수시로 동네 골목과 시장, 사업장 인근을 다니며 이주노동자들에게 폭력적으로 등록증을 요구하고 경찰에 신고해 강제 출국당하는 일이 수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버스 안 노동자들의 상황은 말 그대로 공포였을 것입니다. 삶의 모든 것이 송두리째 날아갈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들의 비명과 오열이 버스 안에 울렸을 것입니다."
 

토끼몰이식 단속에…옥상서 떨어지고, 쓰러져 숨지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노동위원회는 무리한 단속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법무부 훈령인 인권보호 준칙과 판례에 따르면 단속 공무원은 단속 시 관리자의 동의를 받아야 하지만 그렇지 않아 애초 위법한 단속이었다는 것이다. 단속 장소로 기재했던 공장이 아닌 도로상에서 중앙선을 침범하는 추격전을 벌이면서까지 강제 단속을 할 정도로 긴급성이 요구되는 상황은 아니라고 봤다.

나아가 민변은 법무부가 지난해 역대 가장 많은 3만 8,000명의 불법체류자를 단속한 것을 큰 실적인 것처럼 홍보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권침해 문제에 대한 고려는 충분히 하고 있지 않다고 비판한다. 지난달 단속 공무원을 피해 도망가던 미등록 외국인이 건물 옥상에서 떨어졌고, 단속 차량을 보고 달아나다 쓰러진 미등록 외국인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숨진 일을 예시로 들었다. 적법한 체류자격을 갖추지 못했을 뿐 범죄행위를 하고 있지 않은데도 마치 중대한 범죄를 범한 채 도주 중인 사람을 긴급체포하듯이 단속하는 방식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K 씨와 변호인단이 무죄를 주장하진 않는다. 다만, 실정법과 양심의 목소리가 어긋나는 딜레마 상황을 감안해 달라는 주장이다.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아야 하지만, 윤리적 심판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1955년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의 경우가 그랬다. 그녀는 퇴근 후 버스에 올랐다가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말을 들었다. 그녀는 거절했고, 흑백 분리법인 '짐 크로법' 위반 혐의로 체포돼 감옥에 갇혔다. 범속한 그녀가 거대한 투쟁의 출발점이 되는 순간이다. 이후 인종 분리는 위헌이라는 판결이 나왔고, 인종 차별을 금지한 민권법이 제정됐다. 부당하다는 목소리가 실정법의 변화보다 앞설 수 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정반석 기자 jbs@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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