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 의존’ 빅5 결국 탈났다...서울대·아산병원 하루 10억 손해

조백건 기자 2024. 3. 14. 0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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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 2주 만에 수술·입원 반토막
의대정원 증원에 반대하는 전공의들의 집단행동이 이어지고 있는 13일 오전 대전의 한 병원에서 의료진이 입원환자를 태운 침상을 옮기고 있다./신현종 기자

서울대병원과 서울아산병원은 지난 4일부터 간호사와 직원에게 ‘무급 휴가’ 신청을 받고 있다. 전공의(인턴·레지던트) 파업으로 입원·수술 환자가 절반으로 줄어 하루 10억원 이상 손해가 나자 인건비 절감에 나선 것이다. 국내를 대표하는 서울의 ‘빅5′라는 대형 병원(서울대·서울아산·세브란스·삼성서울·서울성모) 중 두 곳이 전공의 이탈 2주 만에 ‘비상 경영’에 들어간 것이다. 다른 대형 병원들도 “경영난이 심각해 뭐든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13일 의료계에선 “이번 사태로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허약한 상급 종합병원의 민낯이 드러났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립대 병원들의 적자는 정부가 지원할 수 있다. 그러나 사립대 병원이나 민간 대형 병원은 채권을 발행해 운영비를 충당해야 한다.

우리나라 대형 병원의 ‘전공의 의존증’이 이번 적자의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의료 산업은 노동 집약적이다. 삼성서울병원 관계자는 “수술을 한 번 해도 집도의와 마취과 의사, 간호사 등 6~8명이 투입된다”고 했다. 100병상 이상인 종합병원은 의료 수익의 절반이 인건비로 들어간다. 사정이 나은 ‘빅5′ 병원도 의료 수익(매출)의 약 40%가 인건비로 들어간다. 세브란스병원 관계자는 “수가(건보공단이 병원에 주는 돈) 인상 속도가 인건비 인상 속도를 못 따라간다”고 했다.

그래서 국내 대형 병원들은 인건비 절감을 위해 월급은 적게 주고 장시간 근무를 시킬 수 있는 전공의들에게 의존해 왔다. 응급실 근무나 수술·입원 환자를 24시간 돌보는 일을 전공의들에게 전담시키다시피 했다. 실제 빅5 병원 의사 가운데 전공는 40% 정도다. 미국·일본 등의 10% 안팎에 비해 4배 이상이다.

그래픽=양인성

대한전공의협의회의 2020년 실태 조사에 따르면, 전공의 평균 월급은 398만원이었다. 전공의 대부분이 법정 근무시간(주 80시간)을 꽉 채워 일하는 현실을 감안할 때 이들의 시간당 임금은 1만2000원 수준이다. 올해 최저임금(시간당 9860원)과 큰 차이가 없다. 이런 전공의 1만3000명 중 1만1000여 명이 한꺼번에 이탈하자, 전공의의 ‘장시간·저임금 근무’에 의존해온 대형 병원들이 금방 휘청이게 됐다는 분석이다.

대형 병원 의사들은 ‘낮은 수가’를 경영 악화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는다. 상급 종합병원은 고난도 중환자 치료를 전담하는 대형 병원이다. 전국에 47곳 있다. 상급 종합병원은 정부 통제가 강해 비싼 진료비를 받을 수 있는 비급여 진료가 제한된다. 대부분 건강보험 수가에 의존하는 급여 진료다. 그런데 우리나라 수가는 외국 주요국에 비해 낮은 편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등에 따르면 혈액·영상 검사 등 수가는 원가의 110~140% 수준이라고 한다. 반면 국내 진료비 수가는 원가의 80% 수준이다. 외과 수술은 원가의 70~80% 선이다. 상당수 의료 행위가 원가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서울 상급 종합병원 관계자는 “수가가 낮기 때문에 대형 병원들은 1000개가 넘는 입원 병상을 모두 채우고, 수술과 외래 진료도 최대한 많이 하는 박리다매식 경영으로 버텨왔다”고 했다. 서울 빅5 병원은 수술만 하루 200~250건이다. 외래 환자도 하루 7200~1만3000명이다. 수술·진료 등 의료 분야에서 적자가 나면 병원 내 장례식장과 매점 운영 수익 등으로 손해를 메웠다. 의료계 인사들은 “전공의 집단 이탈로 수술·입원 환자 수가 반 토막 나고 외래 진료도 10~20%가량 줄면서 대형 병원의 취약한 박리다매식 경영 구조가 깨진 것”이라고 했다. 경기도의 한 상급 종합병원장은 “수도권 대형 병원이 지방 환자까지 다 빨아들인다는 비판이 많았지만, 구조적으로 어쩔 수 없는 면이 있다”고 했다.

대형 병원들이 ‘문어발식 확장’으로 위기를 자초했다는 비판도 있다. 서울에 몰린 대형 병원들은 앞다퉈 수도권에 대규모 분원(分院)을 짓고 있다. 서울아산·세브란스·서울대 병원을 포함해 가천대·경희대·고려대·아주대·인하대·한양대 병원 등 대형 병원 9곳은 2028년까지 수도권에 대형 분원을 총 11곳 짓는다. 이 분원들의 병상은 총 6600여 개다. 현재 서울·경기·인천에 있는 대형 병원의 병상은 약 3만개다. 예정대로 분원이 들어서면 불과 5년 사이에 기존 수도권 병상의 22%가 추가되는 것이다. 경남의 한 종합병원장은 “서울 대형 병원들은 이익이 나면 전문의 추가 채용 등 내실을 다지는 투자를 하지 않았다”며 “(분원 설립 등) 외형만 늘려 ‘저비용 전공의’에 의존하는 경영 방식만 고집했다”고 말했다.

서울 대형 병원들은 이익의 상당 부분을 ‘고유 목적 사업 준비금’ 명목으로 적립하고 있다. 적립 규모가 매년 수백억 원에 이른다고 한다. 이 준비금은 수익이 아닌 비용으로 처리되기 때문에 세금 절감 효과가 있다. 그런데 이 ‘고유 목적 사업 준비금’은 법인의 건물과 토지, 의료 기기 등 고정자산 취득에만 쓸 수 있고 인건비로는 쓸 수 없다. 대형 병원들이 이 적립금을 줄이고 대신 전문의 채용 등에 돈을 더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의료계 인사는 “수련 의사인 전공의들이 이탈했다고 국내 의료 시스템이 붕괴 위기를 맞는 상황을 개혁하려면 대형 병원들이 전문의를 늘려 전문의 중심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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