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내내 주거비와 싸웠다, 상경 노동자 앞엔 ‘끝모를 집값 계단’

특별취재팀 2024. 3. 14. 0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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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재단-조선일보 창간 104주년 공동 기획]
[12대88의 사회를 넘자] [6] 청년 노동자의 주거비 고통
2019년부터 서울에서 물리치료사로 일하고 있는 유정인(가명·28)씨가 지난 3일 서울역 인근의 한 높은 계단을 오르고 있다. 그는 “월급은 적은데 매달 주거비로 돈이 몇 십만원씩 빠져나가는 걸 보고 있자니, 서울에서 일하며 돈을 모은다는 건 끝없는 계단을 오르는 느낌”이라고 했다. /이덕훈 기자

서울에서 일하는 물리치료사 유정인(가명·28)씨는 충남에서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모두 나왔다. 2019년 3월 한 사립대 물리치료학과를 졸업하고 상경(上京)했다. 그는 “수도권이 일거리가 훨씬 많고 물리치료와 관련한 교육·연수·인맥 등이 몰려 있어서 장기적으로 경력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5년의 서울살이는 기대보다 낮은 월급, 생각보다 높은 주거비와 싸운 나날이었다. 첫 직장 월급은 당시 최저임금 수준인 180만원. 그중 4분의 1이 넘는 50만원이 7평짜리 서울 관악구 원룸 월세로 매달 빠져나갔다. 그는 “한 달에 30만~40만원을 겨우 모으니, 집값을 생각하면 높은 계단을 한 발씩 간신히 올라가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2022년 기준 국내 매출 상위 1000대 기업 중 75%가 서울·경기·인천에 있었다. 12대88의 노동시장 이중구조에서 상위 12%의 일자리 상당수가 수도권에 있다는 뜻이다. 또 수도권 지역내총생산(GRDP)은 1137조원으로 전국의 52.5%에 이른다. 이런 점 때문에 10년간 비수도권에서 수도권으로 유입된 20대는 약 60만명에 이른다. 청년들이 상경하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더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수도권에 집중된 경제 구조가 청년들이 수도권에서 기회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하고 있는 셈이다.

상경한 일부는 자기 길을 개척하지만, 유정인씨 등 다수는 노동시장 88%의 하부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과 열악한 복지, 주거비 부담까지 3중 악재를 만난다. 당장 자기 앞가림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결혼이나 출산은 엄두를 내기 어렵다. 이중구조 안에서도 부모가 집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지에 따라 ‘청년 간 격차’가 생기는 셈이다.

이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묘안은 없다. 이런 청년들을 지원하기 위해 정부·지자체도 여러 주거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아직은 역부족이다. 임대주택은 청년 수에 비해 크게 적고, 전·월세 대출이나 지원은 도움이 되지만 조건이 까다롭다. 전태일재단은 저소득 청년이 초기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1인 가구 소형 주택을 더욱 적극적으로 공급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장기적으로는 지역 중소기업 청년 일자리 지원 정책을 지금보다 더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지난 3일 서울의 한 부동산 앞에서 물리치료사 유씨가 매물 공고를 보고 있다. /이덕훈 기자

물리치료사 유정인(가명·28)씨는 2019년 봄 상경한 직후 서울 금천구의 한 병원에 취업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적은 월급과 높은 주거비와의 계속된 전쟁이었다. 첫 직장의 월급은 180만원. 하루 8시간 일하는데, 유씨와 동료 1명이 하루 평균 환자 100명 안팎을 받아야 했다. 성과급을 주는 도수 치료 등을 많이 하면 돈을 더 모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한 달에 나오는 성과급은 10만~20만원 정도였다. 그 와중에도 월세는 따박따박 50만원씩 나갔다.

그는 처우가 조금이라도 나은 병원을 계속 찾아봤고, 월세를 20만원이라도 덜 내려고 반년쯤 친척집에서 월 30만원을 내고 얹혀살기도 했다. 겨울에 난방을 덜 때본 적도 있다. 그렇게 지난 5년간 이사만 3번을 했다.

작년 말 약 4년의 경력을 인정해주는 병원을 찾았다. 주 6일 기준 연봉이 3400만원이 됐다. 금리 2%의 정부 청년 정책 대출 1억2000만원을 받아 전세금 1억5750만원짜리 5.5평 원룸도 구했다. 안도한 것도 잠시, 지난달 공인중개사가 “집주인이 갭투자를 하다 파산했다”고 전했다. 그는 “전세 보증보험을 들어놨기에 망정이지만 집 문제가 끊임없이 나를 괴롭힌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월 100만원씩 꿋꿋하게 모아볼 것”이라고 말했다.

지역에는 주거비가 수도권보다 더 저렴하고 오히려 청년 구인난을 겪는 견실한 지역 중소기업 등도 적지 않다. 본지가 최근 만난 상경 청년들은 이런 곳은 대기업의 협력사인 경우가 많거나 상대적으로 영세해 “불안하다”고 했다. 수도권과 달리 지역 인구가 줄어드니 교육이나 연수, 강연 등의 여러 기회도 적다. 한창 호기심이 왕성한 나이에 수도권에 주로 있는 문화 경험에 대한 동경도 크다.

그래픽=양진경

서울 마포구에서 미용사로 일하는 최재희(가명·29)씨도 마찬가지다. 그는 경남의 한 3년제 대학 뷰티디자인과를 졸업하고 4년 전 서울에 왔다. 그가 미용실에서 하루 10시간 주 5일 일해 버는 돈은 월 280만원이다. 서울 마포구에 있는 방 3개 18평짜리 아파트에 3명이 살면서 보증금 2000만원 월세 100만원을 나눠 낸다. 상경 초기에 생활비 등으로 생긴 약간의 빚을 조금씩 갚으며 빠듯하게 산다. 하지만 그는 “서울에 오길 잘했다”고 말한다. 트렌드를 주도하는 유명한 미용실이 주로 서울에 있어 경력을 높게 평가받을 수 있고 미용 기술을 배울 기회도 많다고 했다. 재희씨는 “지금은 힘들지만 고객들의 마음을 알아주는 디자이너가 돼 내 가게를 차리는 게 꿈”이라고 했다.

노력한다면 최씨는 꿈을 이룰 것이다. 하지만 그가 결혼과 육아를 결심한다면 그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주거비의 벽이 높아서다. 부동산 정보 플랫폼 ‘다방’에 따르면, 작년 서울 지역 방 2~3개짜리 집의 전세금은 평균 2억3690만원이다. 현재 목돈이 없는 그가 홀로 월 200만원씩 모은다고 해도 온전히 전세금을 마련하는 데만 10년이 걸린다. 가정을 이루려면 자가가 있는 배우자를 만나는 것 같은 ‘운’에 기대야 한다는 뜻이다.

주거비와의 전쟁에서 결국 꿈을 접고 낙향하는 청년도 적지 않다. 지방의 한 국립대를 졸업한 한아름(가명·35)씨는 2015년 고향 근처에서 한 중소기업에 입사했지만 1년 반 만에 그만두고 2018년 상경해 서울의 한 특허사무소에 변리사 보조로 취업했다. 월급은 200만원 초반으로 이전 회사와 비슷했지만 경험을 쌓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회사 근처 원룸에서 월세 45만원에 관리비 10만원 안팎을 내며 살아보니 남는 게 없었다. 한씨는 “그달 벌어 그달 다 쓰는 ‘하루살이’ 생활이었다”고 했다. 결국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님 집에 살며 가까운 중소기업에 취업했다. 한씨는 “집값만 아니면 지금도 서울에서 일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12대88 사회

12대88은 국내 전체 임금 근로자의 12%인 대기업 정규직(260만명)과 나머지 88%인 중소기업, 비정규직 근로자(1936만명)로 나뉜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상징한다.

〈특별취재팀〉

▷팀장=정한국 산업부 차장대우

조유미·김윤주 사회정책부 기자

김민기 스포츠부 기자

한예나 경제부 기자

양승수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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