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 22명인데 안전서류만 37개... “서류 만드느라 현장 안전 볼 틈 없다”

강다은 기자 2024. 3. 13.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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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 안전 담당자들
근로자·시설물 점검보다
서류 작성에 매달려
12일 오후 경기도 용인의 한 레미콘 공장에서 이 업체 공장장이자 안전·보건 관리 담당자가 중대재해법이 요구하는 안전·보건 관리 체계와 관련된 서류를 작성하고 있다. 책상에는 작성 중인 노란색 서류철이 쌓여 있다. 직원 22명인 이 업체는 지난 1월 27일부터 중대재해법 적용 대상이 되면서 서류 37종을 새로 만들었다. 혹시 모를 사고가 발생했을 때 ‘충분히 대비했다’는 증거를 만드는 것이다. 이런 서류 작업에 시간을 쏟느라 실질적인 사고 예방 조치에 소홀해진다는 불만도 나온다. /박상훈 기자

직원 22명인 경기 용인시의 한 레미콘 업체는 최근 중대재해처벌법 대비를 위해 서류 37종을 새로 만들었다. ‘안전·보건관리 목표’에는 “산업재해 발생 ‘제로(0)’ 실현을 위해 직원의 유해·위험 요인에 대한 교육 수료율을 100% 달성하겠다”라고 쓰고, 지방 노동청과 소방서 전화번호 등을 적은 ‘중대재해 비상연락망’을 서류로 만드는 식이다. 이 회사 공장장이면서 안전·보건 관리 담당자 직책을 새로 맡은 이종직씨는 “작업장에서 언제든 불의의 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데 중대재해법이 요구하는 서류를 잘 몰라서 방어 차원에서 최대한 많이 준비해 놓자는 방침”이라며 “이런 서류 작업조차 제대로 못 하는 사업장도 많을 텐데 중대재해법이 적용되니 준비할 서류 개수는 삼성전자와 별 차이도 없다”고 말했다.

지난 1월 27일부터 5인 이상 50인 미만 사업장에도 중대재해법이 확대 시행되면서 전국 중소기업이 혼란에 빠졌다. 큰 사고를 예방하자는 취지의 법이지만 실상 중소기업의 안전·보건 관리 담당자들은 컴퓨터 앞에 앉아 서류 수십종을 작성하는 게 주된 업무가 됐다. 중대재해가 발생했을 때 충분히 대비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작업 일지’, ‘위험성 평가 회의 결과’ 같은 서류를 만들어 놓는 것이다. 실제 사고가 발생해 고용노동부 등에서 현장 조사를 하면 가장 먼저 찾는 게 서류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가뜩이나 인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에서 직원들이 구색 맞추기식 서류 작업에 매달리다 보니 정작 시설물이나 근로자 관리에 소홀해지는 것이다. 300인 이상 대형 사업장이나 50인 미만 영세 사업장이나 똑같은 조건으로 대비해야 하는 것도 업체들로선 불만이다. 중대재해 예방 조치에 사업장 규모별, 업종별 특성이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소기업인 사이에서 “사고 예방보다 사후 면피를 준비시키는 법”이라고 푸념한다. 그나마 대비하는 곳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동네 찜질방, 식당 등을 하는 소상공인들은 중대재해법 대비에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그래픽=정인성

직원 10명인 한 전문 건설 업체 안전보건팀장 김모(56)씨는 최근 8시간 일과 중 3~4시간가량을 서류 작업에 매달리고 있다. 원래는 오전 7시에 출근해 2~3시간 동안 현장을 돌아보고 일을 한 뒤 점심 식사 후 다시 2~3시간쯤 공사 현장을 돌며 시설 안전 점검을 하고 근로자들을 챙겨왔다. 그런데 중대재해법 적용 대상이 되면서 순찰 시간을 절반으로 줄이고, 사무실에서 서류 작업을 하는 것이다. 일일 작업 계획서와 위험성 평가표 등을 작성하고, 추가 작업이 있을 시엔 야간 작업 계획서 등 서류를 구비해 미리 공사를 맡긴 회사에 내야 한다.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김씨 회사뿐만 아니라 일을 맡긴 업체에도 책임이 돌아갈 수 있어 서류를 만들어 제출하는 것이다.

공사 현장의 나이 많은 일꾼들에게 안전·보건 관리 관련 휴대폰 앱을 다운로드해주고, 설명하느라 시간을 빼앗기는 일도 다반사다. 김씨는 “서류 작업을 세세하게 요구받다 보니 정작 근로자들 챙기고, 작업장에 생기는 구멍 같은 위험 시설물을 점검하는 시간은 이전보다 훨씬 줄었다”며 “건설 현장에서 사고를 줄이려면 순찰을 늘리는 게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했다.

경기도 안산시 반월공단 내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기사 내용과 직접적인 관계 없는 사진./박성원 기자

◇中企 “중대재해 예방=서류 작업”

중대재해법이 확대 시행된 이후 많은 영세 업체는 실질적인 사고 예방에 나선 것이 아니라 사고가 일어났을 때 처벌을 피할 수 있는 서류 작업에 더 열중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안전 교육, 시설 관리와 이를 증빙할 서류 작업을 모두 하면 좋겠지만, 당장 현장에 투입할 직원도 부족한 영세 건설사나 제조 중소기업에선 중대재해법 관련 서류 챙기기에도 급급한 상황이다. 서류 작업에 지친 담당자들 사이에서 “이런 게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는 푸념이 나온다.

서류를 준비하려고 해도 막막한 경우가 많다. 어떻게, 얼마나 구체적으로 안전·보건 관리 체계를 갖춰야 하는지 일정한 기준이나 양식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중대재해법 시행령 제4조 제8호에는 ‘중대산업재해가 발생하거나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을 경우를 대비하여 매뉴얼을 마련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매뉴얼’이란 게 무엇인지 모호하다 보니 중소기업 입장에선 ‘중대재해 발생 시 조치 매뉴얼’ ‘중대재해 발생 보고서’ ‘중대재해 방지 대책 계획서’ ‘중대재해 방지대책 수립 절차’ ‘중대재해 비상연락망’ ‘중대재해 발생 시 대응 조치 흐름도’ 같은 비슷한 내용의 서류를 마련해 놓는 식이다. 선원 8인을 고용한 어선 선장 김모(34)씨는 “조합에서 서식을 공유해줬는데 100페이지가 넘었다”며 “나는 그나마 젊은 편이라 준비를 했지만, 고령 선장들은 엄두도 못 낸다”고 했다.

또 규모별, 업종별 차별화도 안 되고 있다. 얼마큼 준비해야 처벌을 면하는지 알 수 없다 보니 중소기업도 중대재해법에서 요구하는 대로 대기업처럼 ‘경영 방침’ 서류도 만들고, 비상 훈련을 한 뒤 보고서도 쓰는 실정이다. 한 건설 업체 대표는 “일거리 있으면 하루 일하고, 없으면 쉬는 작은 회사에서 안전 관리 목표를 세우고 세부 추진 계획까지 만들라고 하니 황당하고 막막하다”며 “중대재해 예방이 서류로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사무실에 앉아서 서류와 씨름 중”이라고 했다.

중대재해법 설명회에 몰린 소규모 업체 사장들 - 지난 6일 서울 중구 신당누리센터에서 50인 미만 소규모 사업장 사업주와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중대재해처벌법과 관련한 설명회가 열렸다. 중대재해법이 요구하는 서류가 많고 복잡하다 보니 많은 중소 상공인은 "준비할 방법을 몰라 막막하다"고 말한다. /뉴시스

◇중기인 메신저엔 매일 컨설팅 홍보 글만 수개

지난달 14일 경기 수원시에서 기업인 4000명이 모여 중대재해법 유예를 촉구하는 결의 대회를 열었는데, 행사장 밖에선 뜻밖의 호객 행위가 이어졌다. 중소기업을 상대로 중대재해법 대비 컨설팅을 해주겠다는 이들이었다. 당시 기업인들 사이에선 “컨설팅 업체만 돈을 버는데, 중대재해법이 일자리 창출 사업이냐”는 말이 나왔다.

전문 건설인 1만여 명이 속한 한 대화방엔 매일 수개의 중대재해 대비 관련 컨설팅 홍보 글이 올라온다고 한다. “안전·보건 관리 체계 구축 및 위험성 평가 컨설팅을 해주겠다” “컨설팅 비용은 최소 비용으로 협의 가능하다” “건설안전기술사 자격증 보유자에게 안전 컨설팅을 받으라”는 식이다. 건설 업계 관계자는 “사단법인이란 이름으로 이런 컨설팅이나 교육을 해주겠다는 곳도 많은데, 결국 교육 관련 얘기는 절반만 하고, 나머지는 대출 상품을 홍보하고 판매하는 곳도 많다”며 “절박하고 혼란스러운 기업인들의 마음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했다.

☞중대재해처벌법

산업 현장에서 사망 사고 등이 발생할 경우 사업주, 경영 책임자를 1년 이상 징역 또는 10억원 이하 벌금으로 처벌하는 법. 2022년 1월 상시근로자 50인 이상 사업장에서 먼저 시행됐고, 유예기간 2년을 거쳐 지난 1월 27일부터 5∼49인 사업장까지 확대 적용됐다. 법의 적용 범위가 모호한 데다가 여러 뜻으로 해석될 여지도 많아 중소기업계와 소상공인들은 “아무리 시간과 돈을 들여도 대비하기가 어렵다”고 호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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