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 일해도 서류엔 7일… 나는 유령 노동자

특별취재팀 2024. 3. 12.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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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대88의 사회를 넘자] [5] 사각지대의 마루 노동자
8일 오전 경기도의 한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이동수(가명)씨가 바닥에 무릎을 댄 채 엎드려 마루 공사를 하고 있다. 적갈색의 접착제가 발린 바닥에 나무판을 틈 없이, 고르게 이어 붙이는 게 핵심이다. 12시간 정도 꼬박 일해야 10~15평 정도에 마루를 설치할 수 있다고 한다. /박상훈 기자

이동수(가명·53)씨는 아파트 바닥에 나무 소재 마루를 까는 일만 10년 해온 노동자다. 연 3500만원 안팎을 벌며 생계를 유지한다. 그는 서류상으로 ‘한 달에 7일 이하’만 일하는 사람이다. 지난해 10월 그는 경기도 한 건설현장에서 하루 12시간씩 18일을 일했지만, 그가 계약을 맺은 마루 공사 업체는 나흘만 일한 것으로 월급 명세서를 발급해 4일 치 일당을 줬다. 나머지 14일 치 일당은 ‘성과급’이란 이름으로 따로 처리했다. 그 뒤로는 명세서를 주지 않았다고 한다.

11일 전태일재단에 따르면 이씨와 계약한 회사가 대형 건설사의 하청 업체에서 불법으로 하도급을 받으면서 이런 일이 생겼다. 월 8일 이상 일하는 일용직 노동자는 고용주가 국민연금과 건강보험 등 4대 보험을 들어주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이 회사가 이 비용을 아끼기 위해 ‘7일 이하짜리 노동자’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건설업계에서는 몇 년째 이어진 고물가와 경기 침체 여파로 4대 보험료 등 비용을 아끼기 위한 관행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대형 건설사에서 이런 마루 공사를 처음 하도급받은 기업이나 재하도급을 불법으로 받은 또 다른 기업 모두 영세하다 보니 일부가 불법과 편법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정갈한 아파트 마루는 실내에서 가장 눈에 띄고 사람 몸에 닿는 빈도도 높은, 집의 핵심 요소 중 하나다. 하지만 막상 이 공사를 맡는 마루 노동자는 불법 하도급과 편법, 불쾌한 작업 환경과 낮은 임금 등으로 12대88의 노동시장 이중구조에서도 하층에 있다. 이씨는 “바닥 공사 한다고 우리가 사회의 밑바닥 취급을 받는 건 부당하지 않으냐”고 했다.

2022년 기준 건설업 부가가치는 335조원으로 국내총생산(GDP)의 15.5%이고, 건설업 취업자는 전체 고용에서 7.4%(2023년)를 차지한다. 전태일재단은 각종 불법과 편법을 더 적극적으로 걷어내야 건설 산업도 더욱 발전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철저한 고용부 특별근로감독으로 현장 감독을 강화하고 대한건설협회가 발표하는 ‘시중 노임 단가’ 대상에 마루 공사를 추가해 처우를 개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8일 오전 경기도의 한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이동수(가명)씨가 바닥에 무릎을 댄 채 엎드려 마루 공사를 하고 있다. 적갈색의 접착제가 발린 바닥에 나무판을 틈 없이, 고르게 이어 붙이는 게 핵심이다. 12시간 정도 꼬박 일해야 10~15평 정도에 마루를 설치할 수 있다고 한다./박상훈 기자

아파트 마루 공사는 바닥에 흩어진 쓰레기를 치우는 일로 시작된다. 이른 아침 마루 공사 노동자 이동수(가명·53)씨가 아파트에 들어서면 석고보드나 벽지, 창틀 등을 설치한 사람들이 두고 간 쓰레기가 여기저기 놓여 있다. 나무 소재 바닥재를 접착제로 바닥에 붙이는 작업이라 쓰레기를 치우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다.

본격적인 일은 나무 판을 바닥 크기에 맞춰 절단기로 자르고, 접착제를 바닥에 바르며 시작된다. 그다음 마루판 하나하나를 고무망치로 퉁퉁 두드리며 바닥에 붙인다. 정확하게 판을 자르고 틈 없이 붙여야 해 경험과 기술이 필요하다. 12시간 정도 꼬박 일해야 10~15평 정도에 마루를 깔 수 있다. 성실함도 필수다. 이렇게 일해 연 3500만원 안팎 번다. 공사가 많은 성수기에는 월 500만원 가까이 벌기도 하지만, 비수기에는 190만원만 벌기도 하는 등 수입이 불규칙적이다.마루 공사가 바닥에 쪼그려 앉아 하는 일이라 이씨의 무릎과 허리는 늘 욱신거린다. 몸에서는 늘 파스 냄새가 나고, 뿌연 먼지가 머리카락이나 옷 곳곳에 묻어 있다. 그는 그래도 “이 일이 자랑스럽다”고 한다. 그가 생계를 꾸리고 아들딸을 훌륭하게 키우게 해줬다.

이씨의 29세 아들은 안양의 한 IT 회사에서 컴퓨터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고, 27세 딸은 수도권 4년제 대학을 졸업해 지금은 서울에 있는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고 있다. 두 아이는 작년 어버이날에 이씨에게 4000만원 안팎 업무용 승합차를 새로 사줬다. “자랑스러운 아버지께 선물을 드린다”는 말과 함께였다.

8일 경기도의 한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마루노동자 이동수(가명)씨가 계란과 빵으로 간단한 점심 식사를 하고 있다. 빠르게 작업을 해야하는 마루노동자 특성상 이씨는 매일 간단한 음식을 싸와 이렇게 식사를 한다./박상훈 기자

이씨는 20대 초반 대기업 계열사인 당시 LG산전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2002년 회사가 합병돼 창원으로 가는 바람에 이씨는 퇴사하고 사업을 했다. 중국, 캄보디아 등에 의류를 팔았지만 모은 돈만 잃었다. 우울증도 겪다 생계를 위해 건설 현장에서 마루 공사 일을 시작했다. 이씨는 “이런 환경에서도 훌륭하게 자란 아이들, 지지해준 아내와 다른 가족에게 고맙지만 늘 미안하다”고 말했다.

이씨를 힘들게 하는 것은 건설 현장에서 ‘유령’ 취급을 받는 신세다. 대형 건설사가 마루 공사 A사에 하도급을 주고, 그 회사가 이씨와 계약한 B사에 재하도급을 하다 보니 이런 일이 생겼다. 건설 업계에서는 A사가 발주처나 대형 건설사의 동의를 받거나, A사가 없는 기술이나 전문 인력을 B사가 보유한 경우 등에만 제한적으로 재하도급이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전태일재단과 한국마루노조는 B사의 경우 종합 건설 면허 중 실내 건축 면허가 없는 회사라, 이 재하도급은 불법이 명확하다고 했다.

그래픽=박상훈

작업한 면적을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는 것도 문제다. 이씨는 “마루 공사는 공사 면적에 비례해 일당을 계산해주는데, 우리는 몇 집 공사를 했는지는 알지만 그 집 마루 면적이 실제 얼마인지 정확히 모른다”면서 “공사 시간에 쫓겨 실제 측정도 못 하고 업체가 돈을 주는 대로 받는 게 현실”이라고 했다.

현장 근로자들은 이런 현실이 건설 현장 전체의 이미지를 실추시켜 젊은 층이 오길 꺼리게 한다고 말한다. 최우영 마루노조 위원장은 “최소한 법이 정한 테두리에 맞게 일하게 해줘야 전문성을 갖춘 청년들이 생길 것이고, 현재 일하는 사람들의 노후 걱정 등도 덜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12대88 사회

12대88은 국내 전체 임금 근로자의 12%인 대기업 정규직(260만명)과 나머지 88%인 중소기업, 비정규직 근로자(1936만명)로 나뉜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상징한다.

<특별취재팀>

팀장=정한국 산업부 차장대우

조유미 사회정책부 기자, 김윤주 사회정책부 기자, 김민기 스포츠부 기자, 한예나 경제부 기자, 양승수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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