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3개월 계약직’ 페미 할 거 아니잖아요. 스스로를 보살피며 나아가요” [플랫]

플랫팀 기자 2024. 3. 11.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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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강남역 살인 계기 활발해진 페미니스트 선언
백래시·내부 균열 등 영향 공격·비난 대상으로 전락
“최근 3~4년간은 침체기그래도 연대하며 나아가야”

대학생 이정은씨(22)는 ‘숏컷(짧은 머리)’ 여성이다. 2019년 2월 머리카락을 처음 짧게 잘랐다. 고등학교 2학년 개학을 앞둔 때였다. 거울을 보며 느꼈던 ‘묘한 기분’을 생생히 기억한다. “이게 나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긴 머리에 가려진 내가 아니라 진짜 나를 마주한 느낌.” 이씨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스쿨 미투’ 사건을 접하고 페미니즘을 알게 됐다. 그는 “‘탈코르셋’을 표현한 웹툰을 본 것이 머리를 자르는 직접적 계기였다”라고 했다.

불꽃페미액션에서 진행한 ‘페미니즘 안부조사’(설문)에 참여한 이들이 4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에서 대담 전 설문 답변을 바탕으로 한 AI 이미지를 들고 있다. 권도현 기자

5년이 지난 지금 이씨는 전보다 움츠러든다고 했다. 대학에서 페미니즘 소모임을 운영하는 그는 지난해 11월 ‘혐오범죄에 맞서’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붙이며 계속 주변을 살폈다. 경남 진주의 한 편의점에서 20대 남성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여성의 숏컷 스타일을 문제 삼으며 무차별 폭행했던 사건이 벌어진 때였다. 어렵게 붙인 대자보가 무더기로 쓰레기통에서 나오고, 모르는 번호로 ‘협박 문자’가 오기도 했다. 그는 “페미니스트라고 밝히는 것을 조심하게 됐다”라고 했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이 계기가 된 ‘페미니즘 리부트(reboot·재시동)’를 기점으로 많은 여성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선언했다. 어떤 이는 삶의 태도가 바뀌었다 했고, 어떤 이는 전업 활동가로 뛰어들었다. 광장으로 나와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라고 선언했던 이들의 그 이후는 어떤 모습일까. 8일 경향신문은 불꽃페미액션이 실시한 126명 대상 ‘페미니스트 안부조사’ 설문에 참여한 8인을 개별·단체 방식으로 심층 인터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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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흠뻑 빠졌는데, 지금은 숨기고 살아”

이들은 2015년 전후가 페미니즘 ‘활황기’였다면 최근 3~4년간은 ‘침체기’로 느낀다고 했다. 불꽃페미액션이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단체 가입·후원이나 온라인 참여 등 크고 작은 페미니즘 활동 경험이 있다고 답한 101명 중 ‘지금도 활동을 이어간다’고 응답한 사람은 62명(61.4%), ‘활동을 그만뒀다’고 답한 사람은 39명(38.6%)이었다.

페미니즘 활동을 하며 힘들었던 순간(복수선택)으로는 “삶이 바빠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을 때(58명·57.4%)”, “활동을 향한 지지나 공감보다 비난이나 조롱이 많을 때(43명·42.6%)”,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할 때(43명·42.6%)” 등의 답변이 많았다.

이들이 페미니즘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2018년 전후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 운동, 학교·직장 내 성폭력 사건 등이었다.

불꽃페미액션이 지난달 1일부터 29일까지 실시한 ‘페미니스트 안부조사’ 설문 결과 | 김덕기 기자

초등교사 임모씨(36)는 지난 2018년 3월5일을 잊지 못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수행비서였던 김지은씨가 방송에서 성폭행·성추행 피해를 폭로한 날이다. “생중계 방송을 보면서 엉엉 울었어요. 너무 걱정되는 거예요. 저분은 어떡하나, 새 직장을 구해야 할 텐데, 취업은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끊이질 않았어요. 저랑 동료 교사들도 교장·교감에게 끊임없이 성희롱을 당했거든요.” 임씨는 이후 페미니즘에 흠뻑 빠져들었다. 여성 단체에 가입하고 그 활동을 후원했다. 교무실 책상에는 페미니즘 책을 쌓아두고 읽었다. 임씨의 책상을 거쳐간 책만 1000권이 넘는다.

📌[플랫]페미니스트 교사의 ‘은밀한’ 성평등 수업 이야기

임씨는 이제 페미니스트인 것을 “숨기듯” 산다고 했다. “제일 막막할 때가 언제인지 아세요? 어린아이마저도 ‘선생님, 페미에요?’라고 물을 때에요. 성 평등 교육을 하려고 하면 아이들마저도 사상검증을 하려 하는 거죠.” 임씨는 바뀌는 게 없다는 느낌이 자신을 가장 지치게 한다고 했다. “너 페미야? 이런 질문을 받으면…. 그냥 얼버무려요. 질문을 가장한 공격이니까요.”

“우리는 왜 흩어졌을까”

젠더 폭력 사건은 지난해에도 끊이지 않았다. 여성들은 머리가 짧다는 이유로, 헤어지자 말했다는 이유로, 지나가는 길에 있었다는 이유로 폭행을 당하거나 살해됐다. 서울 금천구 교제 살인 사건,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서 발생한 ‘등산로 성폭행 살인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정부는 올해 예산안에서 여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 지원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여성가족부는 폐지 수순에 들어갔다. 특정 게임 이용자들이 여성 노동자들의 페미니즘 표현을 문제 삼고 마녀사냥을 벌였으나 회사는 이에 동조·방관했다.

폭력은 실재하는 위험으로 여성들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취업준비생 김혜빈씨(28)는 “생계와 일상의 안전을 위협받는 상황이 더 두드러졌다”며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무차별 폭행하면서도 자기를 정당화하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게 무섭다”라고 말했다. 유지은씨(가명)는 “(젠더 폭력이) 너무 많아 생각나는 것 딱 하나를 꼽기 어려울 정도”라고 했다.

569개 단체들로 구성된 여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 지원 예산 감축 철회 촉구 공동행동과 242개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2023년 10월 30일 서울 국회의사당 본관 앞에서 여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 지원 예산 감축 철회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조태형 기자

전업 활동가의 길을 택했던 이들도 다르지 않았다. 지선씨(34)는 몸담고 일하던 여성단체 퇴사를 앞두고 있다. 그는 “활동이 싫은 게 아니라 지쳐서 퇴사하는 것이라 (퇴사) 이야기를 하면서 울었다”면서 “단체 활동을 하다보면 소리를 지르거나 여성을 비하하는 ‘악성 전화’를 종종 받는다”고 말했다. 불법촬영·성착취물 근절 활동을 하는 단체에서 일했다는 이세희씨(32)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성이 사무실 문을 따고 들어와 위협적으로 쳐다보고 간 적도 있다”라고 했다.

류민희씨(48)는 ‘페미니즘 침체기’를 바라보는 심정이 조금 더 복잡하다. 사회운동단체 상근활동가인 그는 “백래시(사회·정치적 변화에 대해 나타나는 반발 심리 및 행동)도 백래시지만, 페미니즘 안에서 균열이 발생한 영향도 있다”고 지적했다. “2020년 트랜스젠더의 숙명여대 입학 포기, 2021년 변희수 하사 사망 사건이 기억나요.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으로 소수자를 욕하는 댓글이 정말 많았거든요. 그건 페미니즘으로 볼 수 없다고, 내부에서 적극적으로 얘기하지 못하면서 떠난 이들도 생긴 것 아닐까요.”

“잘 지내나요? 안부를 묻고 싶어요”

이들이 페미니즘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우리는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확신했다. 장아진씨(29)는 “백래시가 있다는 건 역설적으로 존재감의 증거”라며 “견제할 필요도 없는 존재였다면 정치인들이 너도나도 ‘여가부 폐지’를 들고나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씨는 “한 걸음 앞으로 나간 줄 알았는데 정치인들 말로 두세 걸음 뒤로 퇴보한다고 느낄 때 속상하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플랫]‘너 페미야?’ 질문에 현명하게 받아치는 법

인터뷰에 참여한 8명의 페미니스트들이 ‘페미니스트 이웃들에게’ 남긴 편지 일부

류씨는 “‘너 페미야?’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다들 ‘그럼 넌 아니야?’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라며 웃었다. 그는 “지난 30년 세월을 돌아보면 힘든 순간이 분명 많았지만 점차 나아진 것도 사실”이라며 “괴로워하는 이들이 연대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지선씨는 “우리는 ‘계약직 페미’가 아니라 꾸준히 살아갈 것이기 때문에 아기 고양이를 돌보듯 스스로 잘 보살피면서 나아가자”라고 했다.

김혜빈씨도 연결과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김씨의 말이다. “백래시의 강을 건너고 있는데, 다들 잘살고 있는지 궁금해요. 저 같은 여자들이 잘 버티고 있는지도요. 예전엔 집회·시위에서 자주 만나기라도 했었는데. 그분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서로의 안부를 묻고 싶어요.”

▼ 강은 기자 eeun@khan.kr · 이예슬 기자 brightpearl@khan.kr · 전지현 기자 jhyun@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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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팀 기자 fla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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