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 석유개발업체를 향한 귀신고래의 양심선언

한겨레 2024. 3. 11.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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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종영의 엉망진창 행성 조사반 ⑨ 한국계 귀신고래 이민 사건 2
귀신고래 중 북태평양 동쪽의 동부개체군은 개체수가 증가해 1994년 미국 멸종위기종 목록에서 삭제됐다. 2009년 멕시코 바하칼리포르니아에서 고래 관광 중 포착된 귀신고래의 꼬리. REUTERS 연합뉴스
엉망진창행성조사반에 제보가 들어왔어요. 자신을 ‘가스’(GAS)라고 한 제보자는 한국계 귀신고래가 사라진 원인을 알고 있다고 했어요. 바로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죄다 안 보였다는 거예요. 이건 아주 중요한 제보예요. 한국계 귀신고래가 사라진 원인은 지금까지 최대 미스터리 중 하나였거든요. (☞8회에서 이어짐)

우리는 그해 겨울에 맞춰 멕시코의 바하칼리포르니아로 향했어요.

‘귀신고래가 행복한 사할린에너지’ 직원 말대로 동부개체군이 한국으로 오려고 줄을 서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죠. 원래 동부개체군은 여름에 베링해와 알래스카에서 실컷 먹으며 체지방을 축적한 뒤, 미국 연안을 따라 내려와 캘리포니아와 멕시코 바하칼리포르니아의 따뜻한 바다에서 새끼를 낳아 기르며 겨울을 보내요.

이때 사람들도 귀신고래를 구경하러 바하칼리포르니아로 가죠. 우리도 고래관광을 하는 보트에 탔어요.

멀리 나가지도 않았는데, 저쪽에 있던 귀신고래 한 마리가 와서 보트에 붙더니, 머리를 들이댔어요. 한 관광객이 다 안다는 듯이 손을 쭉 뻗어 귀신고래를 쓰다듬더군요.

“이건, 무슨 상황이죠?”

선장이 대답했어요.

“발레나스 미스테리오사스(ballenas misteriosas·‘신비로운 고래’라는 뜻)입니다. 호기심이 넘쳐서 자기를 만지는 걸 좋아하는 친구들이죠. 고래와 인간이 자연스럽게 교감하는 곳은 아마도 세계에서 여기가 유일할 겁니다.”

조사반장이 귀신고래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잽싸게 물었죠.

“혹시 사할린 섬 유전 지대로 가는 귀신고래 이민자를 모집한다는 소식 들으셨어요? 거기 가면 귀찮게 사냥 안 해도 먹을 거 다 준다던데.”

“무슨 소리요? 우리 정체성은 얕은 바다 모래밭에서 사냥하는 건데. 부끄럽게 말이야, 왜 인간이 주는 걸 받아먹어요?”

이런 말을 하면서도 귀신고래는 더 긁어달라고 머리를 내밀었습니다.

“어, 거기야, 거기. 조금 위쪽으로. 예전부터 베링해 남부를 횡단해서 사할린 섬으로 오가는 무리가 있다고 들었어요. 태평양횡단개체군(Trans-Pacific Population)이라고 한다오. 이민간 건 아니고, 옛날부터 여름에 그쪽에 간다고 들었오. 우리 동부개체군도 2만명이 넘을 정도로 많아져서, 사실, 나도 누가 누군지 잘 모르거든. 이야기만 들었지 본 적은 없다우. 아이고, 시원하다! 응. 거기, 거기.”

“사할린 섬 유전 지대에서 고래쇼를 준비하던 귀신고래를 봤어요.”

“아, 그 불쌍한 친구! 그 석유·가스 개발업체가 뽑아서 데려간 거요. 2018~2019년은 우리 동부개체군에게 고난의 시기였지. 먹을 게 부족해서 기아를 겪었어요. 바닷물 온도가 이례적으로 높았기 때문이지. 바다얼음이 너무 빨리 녹아서, 얼음 밑에 붙어 사는 미세조류가 줄었고, 덩달아 그걸 먹고 사는 옆새우까지 사라져버린 거요. 결국 2019년에 우리 동부개체군 122마리가 좌초되거나 죽었지. 그 친구도 그때 엄마를 잃었어. 주변에 보살펴주겠다던 고래들이 몇몇 나섰는데도, 혼자 살겠다며 그 더러운 유전 지대로 간 거요. 요즈음 수온이 하도 제멋대로여서, 사냥터를 잡아도 허탕을 치기 일쑤라오. 그런데, 작년 2023년 기후변화협약당사국총회는 어떻게 됐소? 석탄발전소는 다 없애기로 한 거요?”

제3의 귀신고래 집단?

조사반은 사무실로 돌아왔습니다. 반장이 말했습니다.

“원래부터 태평양 동서를 오가는 무리가 있었다는 얘기로군.”

“그간의 자료를 뒤져보니, 2011년 사할린 섬에 있던 ‘바바라’라는 서부개체군 귀신고래에 위성위치추적장치(GPS)를 붙여놓고 과학자들이 이동 경로를 봤는데, 이 고래가 베링해를 횡단해 이듬해 미국과 멕시코에서 발견돼, 과학계가 뒤집힌 적이 있었습니다. 동중국해로 내려갔어야 할 한국계 귀신고래가 미국으로 건너갔다며 언론에서도 화제가 됐고요. 그 뒤에 같은 회유 경로를 지닌 귀신고래가 여럿 발견됐고, 지금은 과학자들 사이에서 ‘태평양횡단개체군’으로 정리되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럼, 석유업체 사람이 거짓말을 한 거로군. 그렇담, 한국계 귀신고래가 미국으로 이민 갔다는 제보자의 말은 뭐지? 결국 그들도 이민 간 게 아니라 옛날부터 존재했던 태평양횡단개체군이란 건가?”

우리는 다시 사할린섬으로 찾아갔습니다. 고래쇼를 연습하다가 우리를 보고 줄행랑쳤던 그 귀신고래를 만나서 물어보고 싶었어요. 그 고래는 뭔가 알고 있을 거 같았습니다.

포구에 닻을 내린 포경선들. 울산만 안에 자리잡은 장생포는 일제시대 고래잡는 포경항구로 발달했다. 한겨레 자료

차이보만 근처의 마을에 도착했는데, 시청 앞에서 환경단체 활동가 수십명이 시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1990년대부터 이 지역에서 계속돼 온 유전·가스전 개발에 반대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기후위기 목전인데, 화석연료 개발이 웬말이냐”

“웬말이냐, 웬말이냐, 웬말이냐”

반장이 환경단체의 고참 격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조용히 다가가 물었습니다.

“혹시 석유업체에서 고용한, 그 고래쇼하는 귀신고래 아십니까?”

“쉬잇~ 이제 곧 연단에 나와 양심선언을 할 예정입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기다리는 동안 이 보고서를 읽어보세요. 업체에서 만든 환경평가 보고서를 우리가 입수했어요. 유전 개발로 고래들의 귀가 멀 지경이라오.”

조사반은 ‘외부 유출 금지’ 도장이 찍힌 두툼한 책자의 요약문을 읽었습니다.

“2015년 우리는 사할린 유전·가스전 후보지를 탐사하기 위해 시행한 탄성파 조사(지진파 조사·seismic test) 과정을 모니터링했다. 탄성파 조사로 인해 59~172dB 범위의 충격음이 수중에 퍼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로 인해 귀신고래의 수면 위 호흡 활동, 유영 속도, 수면 시간, 먹이 활동에 영향을 주었다. 현재 기준치가 163dB로 설정되어 있는데, 이를 하향 조정해야 한다고 본다.”

공황 상태의 고래들

드디어 고래쇼 하는 귀신고래가 연단에 올랐습니다. 머리에는 따개비가 가득 붙었고, 긴 수염 사이로 누런 모래알이 끼어 있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인간이 일으킨 기후변화 때문에 가족을 잃은 동부개체군 출신 귀신고래입니다. 너무 슬퍼서 혼자 바다를 떠돌았습니다. 그러던 중 한 무리의 귀신고래를 만났습니다. 과거에 겨울엔 동중국해로 내려가던 서부개체군 친구들이었는데, 1990년대부터 사할린 섬에서 이어진 환경 파괴로 미국으로 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외딴 곳에서 홀로 살고 싶어서, 내가 당신들이 버린 사할린섬으로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당신이 정 가고 싶으면, 옛날부터 미국과 사할린을 오가던 태평양횡단개체군이 소수 남아 있으니, 그들의 도움을 받으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이곳에 와보니 그들 또한 너무 큰 고통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귀가 멀 것 같은 소음과 시시때때로 돌진하는 선박, 걸리면 끝장인 정치망 때문에 상당수가 공황 상태였습니다. 앞으로 일본으로 가는 가스관까지 짓는다고 합니다. 멕시코만의 딥워터 호라이즌호 사건처럼 기름 유출 사고라도 나면 끝장입니다. 결국 저는 이곳에선 살 수가 없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이제 미국으로 돌아가렵니다.”

2010년 석유 시추 시설 딥워터호라이즌 폭발은 미국 역사상 최악의 기름 유출 사고이다. 위키백과

딥워터 호라이즌호 사고는 2010년 4월 멕시코만에서 석유를 시추하던 다국적 석유업체 비피(BP)의 선박이 폭발, 침몰하여 87일 동안 49만제곱미터의 원유가 바다에 쏟아진 사상 최악의 환경재앙 중 하나였죠. 하루가 멀다하고 각종 물고기와 해양포유류, 물새들의 사체가 해변으로 밀려왔습니다. 2023년 분석에 따르면, 이 사고로 주변에 서식하는 향고래의 개체수 6.3%, 긴부리돌고래의 개체수 8.4%가 감소한 걸로 나타났습니다.

고래들은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정작 자신들에게 하나도 도움되지 않는 석탄과 석유, 천연가스 개발 사업이 대기 시스템을 일상적으로 교란해 기후변화를 일으키고, 바다 속에서는 무지막지한 소음 공해를 일으키며, 언제 터질지 모르는 재앙의 폭탄을 안겨주고 있으니까요.

귀신고래는 연단에 내려와서 천천히 바다에 들어갔습니다. 수면 위로 도약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잠영하여 사라졌습니다. 수평선 너머 괴물처럼 솟은 가스전이 노란 불꽃을 피어올리고 있었습니다.

*본문의 과학적 사실은 실제 논문과 보고서를 인용했습니다.

남종영 환경저널리스트·기후변화와동물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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