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인도교 폭파 때 피난민들이 강으로 투신했다고?[역사 강사 황현필 검증4]

박종인 기자 2024. 3. 11.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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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건국전쟁’과 관련해 공무원 시험 강사 황현필씨가 올린 ‘이승만의 25가지 과오’ 영상에 대한 네번째 검증이다. ‘한강 인도교 폭파와 도망간 이승만의 진실’에 대한 검증이다. 황씨는 이승만 본인은 서울에서 도망가놓고 서울시민들에게는 서울을 사수하라고 연설을 했고 그 결과 한강 인도교를 폭파해 1000명에 이르는 민간인을 죽게 했다고 주장했다.

황씨 주장과 달리 이승만은 서울을 지키라는 연설을 한 적이 없다. 이미 검증이 끝난 가짜뉴스를 황씨는 지금도 수정하지 않고 일반대중에게 유포하고 있다. 또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에 관해 황씨가 ‘결정적 증거’라며 내놓은 사료들은 인터넷에 떠도는 자료들인데, 이 또한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황씨는 왜곡했다. 1차사료 원본을 황씨는 보지 않았거나 영문 원본을 잘못 해석하고 내놓은 주장이다.

황현필, '이승만의 25가지 과오' 강의 캡쳐

1950년 6월 27일 이승만 연설

먼저 이승만 연설 부분이다. 황씨는 이렇게 주장한다.

황씨: ‘거짓 라디오 방송, 이 라디오 방송에서 실제로 서울은 안전하니 서울 시민들은 그 자리 그대로 머물라, 이것 자체가 왜곡이다, 라고 최근에 밝혀진 바가 있습니다. 어 좋아요. 근데 그 라디오 방송을 전부 들어 보십시오. 이렇게까지 우리 국군이 힘들게 싸우고 있지만 곧 반격을 할 거고 압록강까지 갈 것이고 미국이 이렇게 도울 것이다. 결국은 서울 시민들에게 피난가란 말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황현필, [이승만의 25가지 과오])

황씨는 또 이승만이 이런 내용으로 연설했다고 한다.

황씨: ‘그리고 이제 오후 9시 저녁 9시에 이승만의 전문이 있는데, 우익 꼴통들 뭐라고 이야기하냐면, 나는 미국의 군사원조가 곧 올 것임을 단언한 바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가 그런 원조를 실현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든다. 마침내 적군은 전차 전투기와 전함으로 서울에 다가오고 있는데 우리 국군은 맞서 싸울 수단이 없다시피 합니다. 맥아더 장군은 우리에게 수많은 유능한 장교들과 군수 물자를 보내는 중이고 이는 빠른 시일 내에 도착하는데, 나는 이 좋은 소식을, 세상에 27일날 밤에, 28일 날 서울이 점령 당하는데, 나는 이 좋은 소식을 국민에게 전하고자 오늘 밤 이렇게 방송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산주의와 싸우기 위한 우리의 용기와 투지를 증명해 보였습니다. 지금까지 잘 싸우고 있다는 이야기죠?(황현필, [서울시민에게 피난 가지 말라고 안 했다? 그럼 피난 가라고 했냐고?])

잘 정리된 전황, 연설 원문

황씨가 이 원문, 미군이 감청한 원문을 읽어봤는지 의심스럽다. 황씨가 실수든 고의든 삭제한 부분을 포함해 원문을 보자. 이 원문은 이승만 연설을 미 FBIS(해외방송감청부)가 감청해 작성한 감청록에서 인용했다.

미 FBIS(해외방송감청부) 감청록

‘(어제) 의정부 일대에서 적군이 탱크 수십대를 포함해 중화기로 무장해 진격했다. 국군은 지뢰 제거 작업 중인 적군을 소총으로 저격하려 했다. 하지만 적군은 장거리 라이플로 무장했고 국군에게는 그런 무기가 없다. 무기가 없어 적과의 대적은 어려웠지만, 우리 국군은 맨손으로 용감히 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은 계속 전진해 서울 외곽 수십 리 지점까지 진출했다.’

미 FBIS(해외방송감청부) 감청록

‘맥아더 장군의 전보는 다음과 같다. 깊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 중대한 작전이 진행되고 있다. 충분한 원조가 가고 있다 - 맥아더. 그런데 해군과 공군에서 양방향으로 진행 중인 원조는 오직 38선 이남 방어가 목적이다.’

‘오늘 오후에는 전폭기를 투입하여 적을 격파하고 경폭기가 적 탱크들을 파괴할 예정이다.’

‘현상황에서 국민이 피난을 떠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에게 닥친 위험을 극복하려면 원조가 도착할 때까지 용맹하게 싸워야 한다.’

‘특히 변변한 무기 없이 전투를 벌이고 있는 의정부 지역 군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미 FBIS(해외방송감청부) 감청록

‘세계에 우리의 용기, 힘, 결단력을 보여주어야만 그들로부터 지원을 받아 남북통일을 이룩할 수 있다. 모든 시민이 용기와 애국심을 발휘해서 전쟁 과제 수행에 차분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리라 믿는다.’

깔끔하게 전황을 정리한 연설이다. 이승만은 의정부에서 참패해 적을 막지 못했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시민들에게 전달했다. 원조 작전이 진행 중이라는 맥아더 전보를 공개했다. 또 미 공군이 날아와 적에게 타격을 가할 예정이라고 언급했다. 적으로부터 피난 가는 상황은 당연하다고 얘기했다. 하지만 용맹하게 싸워야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무기도 없이 싸우는 의정부 지역 병력에게 경의를 표한 뒤 용기를 북돋았다. 용기와 힘, 결단력을 보여야 세계 가족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임무를 수행해 달라고 시민들에게 당부했다. 여기에 시험 강사 황현필씨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용기와 투지를 증명해 보였다’는 말이 어디 있는가.

번역을 왜곡한 조작

황씨는 마지막에 나오는 ‘세계에 우리의 용기, 힘, 결단력을 보여주어야만 그들로부터 지원을 받아 남북통일을 이룩할 수 있다’는 문장을 ‘용기와 투지를 증명해 보였다’라고 과거형으로 왜곡해놓았다. 이게 무슨 ‘지금까지 잘 싸우고 있으니 걱정말라’는 말인가.

이승만은 이 연설에서 ‘오늘 오후 미군 전폭기가 투입될 예정’이라고 전했다. 실제로 전폭기가 왔다. 1950년 6월 29일자 미국 뉴욕 타임즈는 26일 미국인 철수작전 도중 소련제 전투기 한 대를 격추시켰고 27일 화요일에 다섯 대를 격추했다고 보도했다. 7월 5일 경기도 오산에서 벌어진 육군 전투보다 앞선 공중 전투다.

1950년 6월 29일 뉴욕 타임즈

황씨는 자기 영상에서 ‘실제로 서울은 안전하니 시민들은 그 자리 그대로 머물라고 했다는 연설 이것 자체가 왜곡이다, 라고 최근에 밝혀진 바가 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황씨는 이걸 슬쩍 넘어가면서 ‘어 좋아요’라고 얼버무렸다. 좌파들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연설문 감청록 맨 끝에 이렇게 이승만이 말한다. ‘모든 시민이 용기와 애국심을 발휘해 전쟁 과제 수행에서 차분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리라 믿는다.’ 이게 서울을 사수하라는 뜻인가. 감청록 원본은 이에 관해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던 KBS가 확보해 홈페이지에 올려놨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홈페이지에는 감청된 연설 오디오가 복원돼 있다.

이승만이 ‘대전이라는 사실을 숨기라’고 했다고?

황현필, [서울시민에게 피난 가지 말라고 안 했다? 그럼 피난 가라고 했냐고?] 캡쳐

황씨를 포함해 수많은 좌파들이 단골로 마치 기독교 성경처럼 빼놓지 않고 인용하는 기록이 있다. 황씨 말을 들어보자.

황씨: ‘그런데 자 이거 어디서 방송했다라고 했죠? 27일 대전에서. 그럼 대전에서 이 방송을 했던 방송국 과장이 당시 젊었기 때문에 당시 이승만의 지시가 있었다고 방송 과장 유병은의 증언이 있습니다. 이 방에서 절대로 나가선 안 된다. 그러니까 함부로 내가 무슨 라디오 방송인지 떠들거나 뭐 그러지 말라는 뜻이죠.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중계 방송기를 이 방으로 가져오라. 오늘 저녁 9시에 내가 이 방에 하는 방송을 서울로 올려 보내 전국에 중계하여 온 국민이 듣게 하라. 내가 방송한 걸 서울에서 녹음했다가 밤에 여러 번 재방하라. 이거 보세요, 누가 묻든지 대전에서 방송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쪽팔린 거 아는 거지. 서울 시민들이 피난하라는 말을 단 한 번도 하지 않고 자기는 대전에 있으면서 내가 대전에서 이걸 방송했다는 걸 서울 시민들이 알아서는 안 된다. 이 대통령이 방송한다고 미리 누설해서도 안 된다. 혼자 런해가지고 혼자 살아남고 서울시민들 멍청한 대통령 때문에 북한군 인민 통치하에서 신음했어요.’

황현필 [서울시민에게 피난 가지 말라고 안 했다? 그럼 피난 가라고 했냐고?] 캡쳐

이게 사실이라면 이승만은 만고의 역적이고 대한민국 국민을 우롱한 사악한 지도자다. 그런데 궁금하다. 황씨를 비롯한 좌파들은 이 유병은이라는 사람이 쓴 기록 원본을 본 적 있을까. 만약에 본 적이 있는데도 이따위로 주장한다면 사악하다. 만일 보지 않고 이렇게 주장하면 주장할 자격이 없다. 다 조작이다.

회고록 원문, ‘방송 전 기밀 유지’

유병은이라는 KBS 원로 방송인이 쓴 회고록 제목은 ‘방송야사’다. 정사가 아니라 야사다. 자기 기억에 의지해 평생을 봉사한 방송 뒷이야기를 쓴 책이다. 여기에 대전 연설에 관한 기록이 적혀 있다. 그리고 황씨가 인용한 이 유병은 회고록 ‘방송야사’ 원문에는 ‘도망간 지도자의 비겁한 은폐 시도’라는 사실이 없다.

유병은, '방송야사' 표지.
유병은 회고록, 이승만 대전 방송 부분.

1. 이 방에서 내가 밤9시에 방송을 하도록 준비할 것

2. 내가 방송하는 것을 서울로 보내 전국민에게 알리도록 할 것

3. 방송이 나가기까지는 누가 어디서 무슨 내용의 방송을 할 것인지는 절대 누설하지 말고 비밀에 붙일 것

4. 방송 내용을 녹음해서 오늘 밤에 여러번 반복 방송할 것(유병은, ‘방송야사’, KBS문화사업단, 1998, p184)

전형적인 전시 방송에 관한 지침이다. 송출 출력이 낮은 대전이 아니라 서울로 올려보내 서울 시민이 들을 수 있도록 송출하고, ‘방송 전 기밀 유지’라는 보안 지침이다. ‘대전에서 방송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되고’ ‘대전에서 방송하는 걸 서울시민이 알아서는 안 된다’는 지시가 어디 있는가. 황씨 본인 표현대로 본인이 ‘쪽팔려야 할’ 문제다. 이렇게 뉘앙스를 바꾸고 뒤집어서 역사를 바꿔버리고도 무섭지 않은가.

황씨를 포함해 모든 좌파들이 아무런 죄의식이나 죄책감 없이 지금 이 시간에도 이런 무모하고 무식하고 게으르고 교묘한 조작을 하고 있다. 이게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일반 대중을 기만하고 자기들 편한 대로 자기들 진영에 득이 되는 대로 역사를 바꾸고 있는 사례다.

이승만을 편드는 진영도 마찬가지다. 원전을 읽어보면 좌파들이 어떻게 사료를 조작해서 대중을 기만하는지 바로 알 수 있다. 이 책이 나온 시기가 1998년이다. 20년 넘도록 하지 않는 바람에 대중은 더더욱 이승만에 대한 조작된 악마 이미지를 갖게 돼 버렸다. 이 ‘방송야사’라는 책은 국립중앙도서관에 비치돼 있다. 또 이 유병은 회고록은 이렇게 주장한다.

‘뜻밖에도 방송 첫머리에서 ‘아군은 이미 의정부를 탈환했습니다’로 이어져 결론은 ‘아군은 서울을 사수할 것’이라는 명백한 결의를 표명하면서 ‘서울 시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로 끝을 맺었다. 사실 저자의 부모 형제들도 피난 보따리를 준비 중이었는데 ‘서울시민 안심하십시오 이미 의정부를 탈환했습니다’라는 대통령 육성을 듣고 3개월 간 공산 치하에서 고생을 했다.’(유병은, 앞 책, p186)

유병은, '방송야사' 의정부 탈환 언급 부분.

이 ‘방송야사’라는 책은 자료가 아니라 기억에 의존한 책이다. 교차검증이 필요한 기록이라는 뜻이다. 유병은이라는 인물의 기억과 미군 녹취록을 비교하면 어떤 기록이 진실에 가까운지 쉽게 알 수 있다. 녹취록에 기록된 이승만 연설은 ‘의정부를 탈취당했다’로 시작해 ‘침착한 전쟁 임무 수행’으로 끝난다. 황씨 같은 조무래기 좌파는 물론 사회적 권위를 가진 좌파들도 이 기록을 즐겨 인용해왔다. 그런데 녹취록이 나오는 바람에 입을 다문는 중이다. 황씨는 여전하다. ‘이승만이 런승만’이라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조작에 불과하다.

기록이 말해준다. 반 이승만 세력은 자기들에게 불리한 문장은 슬쩍 뉘앙스를 바꾸고 유리한 문장은 강조해서 역사를 자기네 편으로 만들어버린다. 황씨는 때로는 심각하게, 때로는 조롱기 가득한 표정으로 ‘우익 꼴통들’ 운운하면서 자기가 맞다고 한다. 맞으면 자료를 제시해야 한다.

피난민들이 강으로 투신했다고?

두번째,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 검증이다. 인민군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방부에 의해 파괴된 다리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 황씨를 비롯한 좌파들은 많게는 1000명까지 민간인이 죽었고 이는 조기 폭파를 지시한 이승만 책임이라고 주장한다. 황씨는 이렇게 주장했다.

황씨: ‘한강철교 폭파도 이승만이 직접 명령을 내린 게 아니라고 이야기 해버리면 뭐 할 말 없겠습니다만 한강철교를 폭파함으로 인해서 서울시민들의 피난로가 막혔고 그 한강철교가 폭파될 당시 죽은 사람만 천 명입니다.(황현필, [이승만의 25가지 과오])

황씨는 또 ‘이승만이 직접 명령을 내린 게 아니라고 이야기 해버리면 뭐 할 말 없겠습니다만’이라고 꼬리표를 달았다. 할 말이 없으면 입을 다물어야지 왜 계속 말을 하는가. 황씨 같은 좌파들은 이 사건에 대해 증언들이 있으니까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폭파 사건에 개입된 많은 사람들의 법정 증언이 남아 있다. 황씨가 인용한 그 증언에는 사건 직후 다리 위에서 있던 사람들이 목격한 참상이 잘 표현돼 있다. 이들 증언에는 희생된 민간인들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황씨 주장을 보자.

황씨: ‘우리 구독자님께서 보내주신 너무너무 소중한 자료, 국방부 공문입니다. 6.25 전쟁 당시. 한강 인도교 폭발에 따라 사망한 민간인 위령탑을, 6.25 전쟁 초기에 한강 인도교를 폭파했다가 사망한 민간인을, 그 민간인을 당시 국방부에도 500명에서 800명으로 봅니다. 국방부에서 500명 800명으로 본다고요.’(황현필, [한강인도교 폭파 때 민간인 희생이 없었다는 거짓말])

황현필 [한강 인도교 폭파, 민간인 희생자 없었나?] 캡쳐

황씨는 구독자가 보내줬다는 이 자료가 ‘민간인 500~800명 희생’의 근거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황씨는 저 문서 아래에 적혀 있는 출처, ‘한국전쟁사’를 읽지 않았다. 공문에 있는 ‘민간인’이라는 단어가 ‘한국전쟁사’에서 찾아보면 ‘인원’이라고 적혀 있다. 민간인 희생자가 500~800명이 아니라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한 전체 희생자’가 그렇다는 이야기다.(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1, 국방부, 1977, p547) 이 공문을 쓴 국방부 공무원이 이를 민간인이라고 잘못 인용한 것이다.

국방부 '한국전쟁사' 1권 p547

이 같은 오류를 피하기 위해 어떤 자료든 황씨가 입에 달고 사는 ‘교차검증’이 필요하다. 황씨는 입으로는 교차검증하라고 하면서 본인은 하지 않는가. 그리고 황씨는 또 이렇게 주장한다.

황씨: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로이 애플먼이라는 사람이 미국 기자 세 명이 한강 인도교가 폭발할 때 맨 앞에서 다리를 막 벗어나고 있었는데 4000명 이상의 피난민들과 군인들이 다리 위에 있었다고 증언을 하잖아요. 새벽 2시 반에 한강 인도교가 이렇게 폭파됩니다. 한강 하늘의 번쩍이고 땅이 뒤흔들렸다. 고막이 찢어졌다. 남쪽 두 개 긴 아치가 출렁대는 시커먼 물속으로 떨어졌다. 최소한 500명 내지 800명이 공중으로 뛰어오르고 아까 국방부 공문과 민간 희생자 숫자가 완전히 일치하죠?’(황현필, [한강인도교 폭파 때 민간인 희생이 없었다는 거짓말])

황현필 [한강 인도교 폭파, 민간인 희생자 없었다?] 캡쳐

번역을 조작한 영어 원문

검증해본다. 황씨가 인용한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원제: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미육군 군사센터, 초판 1961)’는 전쟁사의 명저다. 6.25전쟁에 관한 기록 가운데 가장 많이 인용되는 책이다. 그런데 황씨는 이 책도 읽지 않았다.

로이 애플먼,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일단 화면에 황씨가 제시한 인용문은 2020년 8월 7일자 시사잡지 ‘시사인’ 기사를 베낀 글이다. 원문을 축약한 글이다. ‘새벽’이라는 단어에 괄호를 쳐놓은 것까지 그대로 복사해서 붙였다.

황현필씨가 인용한 '시사인' 기사.

황씨는 이 기사를 인용해 ‘아까 국방부 공문과 민간 희생자 숫자가 완전히 일치하죠’라고 주장했다. 이건 당연한 숫자다. 국방부가 제시한 500~800명이라는 숫자는 이 애플먼 저서에서 인용한 숫자와 출처가 같다. 사고 현장에 있던 미국 군사고문단 장교들이 추정한 숫자를 애플먼이 인용하고 국방부가 인용한 것이다. 당시 대한민국 국방부는 이를 추정해낼 능력이 없었다. 애플먼 저서 해당 문장 각주에는 군사고문단 라이트 대령을 비롯한 미군 장교 메모와 인터뷰, 다리 위에 있던 키스 비치를 인터뷰하고 버튼 크레인 기자가 쓴 1950년 6월 29일자 ‘뉴욕 타임즈’ 기사를 인용했다고 적혀 있다. 이 기사에는 ‘수백명의 자기네 병사들(several hundred of their own soldiers)을 죽였다’라고 기록돼 있다.

그리고 황씨는 또 ‘4000명 이상의 피난민들과 군인들이 다리 위에 있었다’며 애플먼 책을 인용했다. 자칫하면 다리 위에 있던 4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몰살할 초대규모 참사임을 강조했다. 그런데 황씨는 책을 읽지 않은 게 틀림없다. 읽었다면 황씨는 영어 독해능력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원문을 보자.

‘Double this number probably were on that part of the bridge over water but which did not fall, and possibly as many as 4000 people altogether were on the the bridge if one includes the long causeway on the Seoul side of the river.’(로이 애플먼,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미육군 군사센터, 1961, p33)

이런 뜻이다. ‘만일 폭파되지 않은 부분에 있었던 사람을 합치면 두 배는 됐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서울 방면 기나긴 둑방(causeway)에 있는 사람들을 합친다면 4000명에 이를 수 있었다.’

로이 애플먼,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p33

‘causeway’는 ‘포장도로’를 뜻하기도 하고 ‘둑방’을 뜻하기도 한다. 로이 애플먼이 말한 4000명은 다리 상판이 아니라 다리 북쪽 뚝길 혹은 지금 한강대로로 불리는 긴 도로에 늘어서 있던 사람들을 다 포함한 숫자다. 어느쪽이 됐건 이 4000명 가운데 파괴가 예정된 다리 위에 있던 인원은 훨씬 적었고 파괴된 상판 위에 있던 사람은 더욱 훨씬 적었다.

애플먼은 중지도(노들섬)를 중심으로 한강 남북을 잇는 다리 전체 위 사람은 희생자 숫자의 두배인 1000~1600명으로 추산했다. 그런데 국군에 의해 폭파된 다리는 상판 두 개다. 그 상판 위에 있다가 희생된 숫자, 민간인과 군경을 다 합한 숫자가 애플먼은 500~800명이라고 추정했다. 국방부가 펴낸 ‘한국전쟁사’ 또한 이를 500~800명으로 추정했다. 그리고 이 추정치는 당시 미군고문단 장교들이 눈대중으로 추정한 숫자다. 그리고 이 숫자는 ‘민간인와 군경을 합한’ 숫자다.

전쟁 초기인 1951년 종군기자 마가렛 히긴스가 쓴 ‘War in Korea’에는 ‘폭발 직후 현장에서 만난 라이트(Wright) 대령이 “한국군이 아군 수 백명(hundreds of their own men)을 죽였다”라고 증언했다’고 기록돼 있다.(M. Higgins, ‘War in Korea’, Lion Books, 1951, p26) ‘hundreds of their own men’을 넓은 의미로 ‘자기 편 사람들’로 해석하면 민간인이 포함될 수도 있다.

마가렛 히긴스, ‘War in Korea’, Lion Books, 1952, pp.25, 26

구글 번역기로 번역한 사료

그리고 황씨는 아주 악의적이고 사악한 조작을 했다.

황현필 [한강 인도교 폭파, 민간인 희생 없었다?] 캡쳐

황씨: ‘코리안 타임즈. 우리 앞에 있던 트럭에 타고 있던 군인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다 그래요.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나와요. 죽은 자와 죽어가는 시체가 다리 흩어져 있고 여기 민간인도 나오잖아, 민간인과 군인도 있었다. 민간인도 죽었다. 부상자들과 죽어가는 이들의 비명소리를 배경으로 수많은 난민들이 난민, 민간인 아닙니까 피난민이죠. 필사적으로 다리를 뛰어내려 밤하늘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한강에 얼마나 빠져 죽은지 알지를 못해요.’(황현필, [한강인도교 폭파 때 민간인 희생이 없었다는 거짓말])

우선 황씨가 인용한 이 글 출처는 ‘코리안 타임즈’가 아니라 ‘코리아 타임즈’다. 시기도 1950년 당시가 아니라 2012년 로버트 네프라는 한국 근대사에 정통한 미국인이 쓴 기사다. 네프는 사건 당시 인도교 위에 있었던 미국 기자 프랭크 기브니의 당시 기사를 인용했다.

황씨는 이 글에서 ‘수많은 난민들이 필사적으로 다리를 뛰어내려 밤하늘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라는 부분을 인용했다. 상상해보자. 저 높은 다리 위에서 폭발과 화염을 피할 길 없는 민간인들이 다리를 뛰어내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 끔찍하다. 황씨는 배경화면에 이 글 해당 부분을 띄워놓았다.

‘우리 앞에 있던 트럭에 타고 있던 군인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습니다. 죽은 자와 죽어가는 시체가 다리 위에 흩어져 있었고 민간인과 군인도 있었습니다. 혼란이 완료되었습니다. 부상자들과 죽어가는 이들의 비명소리를 배경으로 수많은 난민들이 필사적으로 다리를 뛰어내려 밤하늘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황씨는 이 글 또한 원문을 읽지 않았다. 원문은 이러하다.

‘All of the soldiers in the truck ahead of us had been killed. Bodies of dead and dying were strewn over the bridge, civilians as well as soldiers. Confusion was complete. With the cries of the wounded and the dying forming the background, scores of refugees were running pell-mell off the bridge and disappearing into the night beyond.(로버트 네프, ‘Destruction of Han River Bridge’, 2012년 6월 22일 ‘Korea Times’)

이 글 원문을 ‘구글번역기’에 넣으면 황씨가 인용한 한글 문장과 단 한 글자도 다르지 않게 나온다. 잘못된 번역까지 똑같이 나온다. ‘혼란이 완료되었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Confusion was complete’은 ‘혼란이 극에 달했다’ ‘혼란도 그런 혼란이 없었다’는 뜻이다.

기브니 원문과 구글 번역

마지막 문장 원문을 보자. 1950년 7월 10일 미국 시사잡지 ‘타임(TIME)’지에 기브니 본인이 기고한 글에도 동일한 문장이 나온다.

‘Scores of refugees were running pell mell off the bridge and disappearing into the night beyond.’(Frank Gibney, ‘War: Help Seemed Far Away’, 1950년 7월 10일 ‘TIME’)

기브니 원문, 1950년 7월 10일 'TIME'
기브니 원문, 1950년 7월 10일 'TIME'

황씨는 이 문장을 ‘수많은 난민들이 필사적으로 다리를 뛰어내려 밤하늘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습니다’라고 번역했다. 구글번역기가 이렇게 번역해놓았다. 틀렸다. 제대로 된 번역은 이렇다.

‘많은 난민들이 허둥지둥 달려서 다리에서 빠져나가 어두운 밤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다리에서 뛰어내린 게 아니다. 다리를 벗어나 북쪽으로 달아났다는 뜻이다.

1982년 조셉 굴든(Joseph Goulden)이라는 저술가가 쓴 ‘Korea: The Untold Story of the War’(Times Books, 1982) 82페이지에는 기브니가 남긴 기록이 이렇게 인용돼 있다.

‘Other screaming refugees raced pell-mell for the north shore.’

‘다른 난민들은 비명을 지르며 허둥지둥 북쪽 강변으로 달려갔다.’

조셉 굴든, 'Korea: The Untold Story of the War', 1982
조셉 굴든, 'Korea: The Untold Story of the War', 1982, p82

황씨는 이 문장을 마치 난민들이 참극을 피해 강 속으로 투신한 것처럼 조작했다. 이런 감성팔이 논리 혹은 무논리로 대중을 현혹하는 행위를 기만 혹은 날조 혹은 선동이라고 한다. 이승만이 지시하지 않았다고 치자라는 둥 서울 사수라는 연설이 없다고 치자 라는 둥 자기 주장과 다른 사실이 나오면 그냥 얼버무린다. 정작 주장은 철회하지 않는다. 영어 판독 능력도 없으면서 자기가 자료를 제시했다고 주장한다. 잡지 기사에 실린 축약본을 마치 원문인 것처럼 인용한다. 국방부 자료라고 내놨는데 실무진 실수로 오류다. 교차검증도 하지 않았다. 이게 좌파들이 역사를 대하는 태도다.

다리 폭파사건의 진실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은 비극이다. 영화 ‘건국전쟁’에서 말하듯 민간인 인명피해가 없었다는 주장은 잘못이다. 현장에 있던 외국 기자 3명 가운데 프랭크 기브니는 구체적으로 ‘민간인’ 사망자를 언급했다. 기브니는 1950년 7월 10일자 ‘TIME’지에는 민간인 희생자를 언급하지 않고 같은 날 ‘LIFE’지 기고문에 군인과 민간인 사망자 및 죽어가는 사람을 언급했다.(프랭크 기브니, ‘Don’t Forget, On June 27...Bingo!’, 1950년 7월 10일 ‘LIFE’) 하지만 확인된 희생자 숫자와 이름은 종로경찰서 소속 경찰관 77명밖에 없다.(국방부, 앞 책, p852)

국방부, '한국전쟁사'.

나머지 인원은 이름도 알지 못하고 정확한 숫자도 모른다. 로이 애플먼도 ‘미군고문단 장교, 500~800명 추산’이라고 기록했고 종군기자 마가렛 히긴스도 ‘라이트(Wright) 대령’을 인용해 “아군(자기 편 사람) 수 백명(hundreds of their own men)을 죽였다”고 했다. 추산이다. 이 추정치 ‘수백명’이 500~800명으로 확정되고 황현필 같은 사람은 이를 ‘민간인’ 1000명이라고까지 부풀려놓았다.

사건 발생 이후 발파 책임자에 대한 조사만 있었을 뿐 그 누구도 희생자에 대해 조사가 이뤄진 적이 없다. 이 사건은 아직도 공중에 떠 있는 사건이다. 좌파든 우파든 이 희생자를 두고 자기 쪽에 편한 단정은 하지 말아야 한다.

책임자에 대한 결론은 법적으로 나와 있다. 사건 직후 남쪽에서 전사한 참모총장 채병덕이다. 국방부 ‘한국전쟁사’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이날 17시00분에 적의 전차가 길음교 전방에 나타나고 이어서 재개된 적의 침공으로 서울 방수를 위한 마지막 저지선이 붕괴되기에 이르자 채병덕 참모총장은 육군본부의 1차 철수 때와 같이 전방부대와 재경부대 그리고 시민의 철수는 고려되지 않은 채 또 다시 폭파 준비를 명령하였으니 이 때가 23시30분이었다.’(국방부, 앞 책, p544)

한국전쟁사, 폭파명령

군사적인 목적과 고려에 의해서, 참모총장에 의해서 그렇게 폭파 명령이 하달됐다. 중간에 이를 보류하려는 조치가 있었지만 이는 유선연락망이 차단된 인도교 초소 부근에서 진입 제지로 인해 전달되지 못했다.(국방부, 앞 책, p546) 결국 다리 상판은 폭파됐다.

이게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에 대한 진실이다. 군사적인 판단 오류로 애꿎은 관민(官民)이 집단으로 죽은 사건이다. 누가 얼마나 죽었는지 파악되지 않은 미제 사건이다. 좌파들 말처럼 비겁하지도 않고 우파들 말처럼 민간인 희생이 없다는 주장도 말이 되지 않는다. 사실과 진실은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는다. 군사적 필요에 의해 진행된 이 끔찍한 사건은 여전히 진실을 기다리고 있다.

소위 ‘런승만’과 ‘인도교 폭파 민간인 학살’ 주장은 뚜껑을 열어보니 아무 근거도 없는 막말 덩어리다. 1차사료를 들여다보지 않고 무조건 내뱉은 주장에 불과하다. 인도교 폭파에 대한 1차사료들을 보면 좌파 주장이 근거가 엉성하고 과대포장돼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전 연설에 관한 방송인의 회고록은 좌우 그 어디에서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다. 그래서 좌파는 가짜뉴스를 진짜라고 주장해왔고 우파는 그 주장에 침묵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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