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적당한’ 이미지에 만족하는 시대…사진작가의 존재를 묻다

노형석 기자 2024. 3. 1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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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1일 피케이엠 전시장에서 취재진과 만나 이야기하는 토마스 루프. 그의 뒤에 우주나 자연의 심연을 떠올리게 하는 프랙탈이미지를 대형 카페트 위에 인쇄한 근작이 보인다. 작가는 자신의 근작들이 사진이 아니라 기술적 이미지로 부르고싶다고 했다.

“여기 나온 제 작품들은 사진이 아닙니다. 굳이 부르자면 기술적 이미지라고 할 수 있죠.”

독일 사진작가 토마스 루프(66)는 거침없이 말했다. 작가의 뒤편에는 우주의 심연처럼 검푸른 카페트 화폭을 배경으로 소용돌이나 꽃모양 무늬가 피어나는 현란한 이미지들이 아롱진 근작들이 펼쳐져 있었다. 그는 1990년대 이래 무미건조한 인물의 대형 초상사진과 인터넷상의 사진 이미지 파편들을 짜깁기한 작업들을 통해 현대사진의 지형을 바꾼 주역으로 평가받는 대가다. 자기 작업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깎아내리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발언이었지만 그는 단호했다. “자기 작품이 컴퓨터 디지털 소프트웨어의 도움을 받아 렌더링한 이미지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사진과는 다른 존재로 변화했다”는 단언이었다. 한국에서 20년 만에 벌이는 두번째 개인전 ‘d.o.pe.’가 개막한 지난달 21일 서울 피케이엠 갤러리 전시장에서 취재진과 만난 작가는 진지한 표정으로 디지털 이미지 시대를 통과해온 자신의 관점과 생각들을 털어놓았다.

“어떤 사진들을 찍고 나서 소프트웨어의 도움을 받아 보정하는데, 이것도 다 기술적 이미지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사람들은 렌즈를 거쳐 감광지에 옮기면서 아날로그적인 과정으로 인화를 거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디지털 기기를 통해 가상의 이미지를 현실처럼 합성하는 렌더링 과정을 널리 활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 이렇게 소프트웨어로 만든 것이든, 아니면 카메라로 만든 것이든 간에 더는 어떤 이미지가 무엇이 우리가 예전처럼 생각하는 사진인지, 무엇이 기술적인 이미지인지 정확한 경계를 구현하기가 상당히 어려워진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기술적 이미지라는 말을 쓰고 싶습니다.”

전시장에는 벨기에산 카페트에 이른바 우주적이고 환상적인 이미지들을 출력한 근작들이 선보이고 있다. 작가가 2년 전부터 시작한 ‘d.o.pe’란 난해한 제목을 단 연작들이다. 최대 290㎝ 의 큰 카펫 위에 이른바 프랙털 구조의 도상들을 정교하게 출력한 것이다. 프랙털 구조는 1975년 프랑스 수학자 망델브로트가 제시한 개념으로 우주와 지구 만물의 형상들이 부분과 전체가 비슷한 모양과 얼개를 띠고 있으며 부분의 모양새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확대되어 전체 모양새를 이루는 자기 유사성이 끊임없이 반복·순환하는 시스템을 일컫는다. 작가는 10대 시절인 1970년대 초 영국 록그룹 핑크플로이드의 명반 ‘달의 저편’ 과 도어스 음반 등에 나오는 사이키델릭 록에 심취하면서 관련 뮤지션들의 앨범 재킷 표지를 환각적인 상태에서 감상하는 것을 즐겼던 체험이 프랙탈 구조의 패턴을 통해 근작의 제작 과정에 여실하게 반영됐다고 털어놓았다.

세포, 잎사귀, 깃털, 조개껍질 같은 형상들이 꽃과 소용돌이 형상의 거대 도상들과 어울려 혹성처럼 빛나거나 서로 빨려들어가는 근작의 도상들은 서사적 내러티브 대신 이미지들이 내뿜는 심령적인 신비감과 아름다움이 눈길을 휘감는다. ‘d.o.pe.’란 제목은 이를 단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디스토피아 소설 ‘멋진 신세계’로 잘 알려진 영국의 근대 문인 올더스 헉슬리(1894~1963)의 자전 에세이 ‘지각의 문’(1954)의 영문 이니셜(The Doors of Perception)에서 따왔다고 한다. 인간이 일종의 마약에 가까운 화학적 촉매제를 통해 의식의 지평을 넓히고 자신을 초월할 수 있다고 본 책의 내용을 컴퓨터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으로 만든 프랙털 이미지를 통해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사진적 재현과는 거리가 멀고 작가의 유년시절의 환각적 기억과 세계에 대한 우리 두뇌 속의 끝모를 심연적 상상을 표출한 작업인 셈이다.

그는 1980~90년대 베른트 베허, 실라 베허 부부가 교수로 가르친 독일 뒤셀도르프 예술학교 사진학과에서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칸디다 회퍼, 토마스 스트루스 등과 수학하면서 냉혹한 분위기의 유형학적 사진으로 세계 사진사를 뒤흔든 뒤셀도르프 사진학파의 주요 작가다. 베허 부부와 독일의 현대미술 거장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영향으로 인물초상이나 포르노그라피, 온라인의 즉흥적 현실 이미지 등을 뒤섞은 사진 작업들로 20여개의 연작들을 만들면서 대가의 자리에 섰다. 아시아에 처음 선보이는 이번 근작들은 루프 특유의 인물 유형학적, 개념적 사진작업들을 뛰어넘어 재현적 사진의 존재와 회화와의 경계 자체를 부정하는 융합예술의 충동과 욕망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작가는 즉석 이미지들이 더욱 범람하게 될 디지털 시대 사진가의 미래에 대해 기자가 묻자 다소 길지만 의미심장한 답변을 내놓았다.

“사실 제대로 된 사진이나 이미지를 찍어서 뭔가 생계를 유지하는 건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대개 자기 스스로 예술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특히 문제는 신문 같은 언론 매체들도 더 이상 그런 좋은 이미지를 만드는 데 돈을 쓰고 싶어하지 않고 무료로 쓰기를 원한다는 거죠. 예를 들어서 신문에 어떤 초상사진이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 있다고 가정해보자면 더는 신문들조차도 좋은 프로페셔널 사진가가 이미지를 만들어야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기자가 아이폰 가지고 찍으면 지면에 인쇄해서 올리자고 생각할 것 같아요. 독자들도 딱히 그렇게 훌륭한 이미지를 원한다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이라고 보는 거죠. 어떻게 보면 자기 매체의 독자들도 이제 더 이상 중요한 존재로서 취급하지 않게 되는 셈입니다.”

전시는 4월13일까지.

전시장에서 취재진과 이야기를 나누고있는 토마스 루프. 그의 뒤로 우주나 자연의 심연을 떠올리게 하는 프랙탈이미지를 대형 카페트 위에 인쇄한 근작이 보인다.
토마스 루프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삼청동 피케이엠갤러리 1층 전시장. 카페트에 우주의 심연을 연상시키는 프랙탈 이미지들을 프린트한 작가의 신작들이 내걸려있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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